2. <군체>에는 시대에 발맞추듯 과학적 설정이 등장한다. 하지만 과학적 설정을 뒷받침할 역량이 꼼꼼하지는 않으니 주요 인물 몇명을 과학자로 구성한다. 그러면 ‘집단지성’이라는 중심 아이디어에 자연스럽게 설득력이 생기지만, 다른 면에서 보자면 게으른 작법이다. 어쨌든 <군체>의 초반부는 지루하지 않게 흘러간다. 점점 좀비들의 지능이 업데이트되면서 공포가 강화된다. 하지만 그 공포는 의기투합했던 생존자들이 금세 배신하고 흩어지면서 순식간에 옅어진다. 이것은 편집의 탓도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기차에서 좀비와 사투했던 <부산행>과는 달리, <군체>는 권세정(전지현)의 전남편 한규성(고수)의 현부인 공설희(신현빈)가 활약하는 외부의 이야기가 내부의 이야기와 교차된다. 그런 와중 정부의 대책본부는 어느새 빌딩 바깥에 생겨났고, 시간의 흐름을 관객이 알아서 가늠하도록 맡긴다. 그렇기에 개연성도 헐거워질 수밖에 없다. 나는 후반부에 권세정이 두 여고생과 문자를 나누는 장면에서야 그때가 새벽 1시 50분 즈음인 것을 알았다. 이런 대목에서, 좀비물은 아니었지만 최악의 바이러스를 피해 생존하려는 시민들과 퍼지는 것을 막으려는 정부의 모습을 역동적으로 그려낸 2013년 영화 <감기>와 비교하면서 보게 됐다. (<감기>가 걸작이라는 뜻은 아니다)
3. <군체>는 기본적으로 <부산행>의 답습이자 하위호환이다. 캐릭터 면에서 특히나 그렇다. 이혼했으며 마음 터놓을 친구도 없는 듯한 권세정은 차가운 성격의 아버지 서석우(공유), 등장인물 중 가장 몸싸움이 많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최현석(지창욱)은 임신한 아내를 지키는 윤상화(마동석), 하반신 장애인인 최현희(김신록)는 임신부 성경(정유미)과 석우의 딸 서수안(김수안), 관객들을 화나게 한 빌런 용석(김의성)은 일진 소녀(채서은), 육상 선수 출신의 중년 아저씨는 두 할머니(예수정/박명신)로 치환된다. 물론 같은 감독이기에 비슷한 성질의 캐릭터들로 이야기를 구성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할 수 있다. 하지만 <군체>의 캐릭터들은 <부산행>보다 덜 입체적이고 더 평면적이며 훨씬 기능적이다. <부산행>은 남고생 민영국(최우식), 여고생 김진희(안소희), 기장(정석용), 노숙자(최귀화)까지 주조연 캐릭터가 모두 뚜렷했다. 그러나 <군체>는 한규성의 퇴장 방식과 경찰 이봉석(이중옥)의 활용마저 뻔하더니, 중반부부터 등장하는 공설희의 동료들과 대책본부위원회 사람들의 행동과 대사 모두 고루하다. 이 치명적인 결함은 <군체>가 가진 개성을 약화하는 데 일조한다. (<부산행>은 <화이 : 괴물을 삼킨 아이>의 각본을 쓴 박주석 작가가 연상호 감독과 시나리오를 썼다. <군체>는 <계시록>과 <지옥> 시리즈의 최규석 작가가 연상호 감독과 시나리오를 썼다고 한다.)
4. <군체>를 이끌어가는 캐릭터는 생명공학과 교수 권세정이다. 빌딩에서 생존하기 위한, 이 바이러스가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한 영화 속 방법의 8할이 권세정의 두뇌에서 나온다. 권세정은 두뇌를 쓸 뿐만 아니라 좀비와 직접 싸우기까지 한다. 아주 다양하게 활약하지만 권세정이라는 캐릭터는 그렇게 매력적이지는 않다. 정확히는 매력을 보여줄 틈이 없다. 권세정이 멋있어 보인다면 그건 전지현이라는 배우의 매력에서 99% 발화된 것이다. 실제로 저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아무리 똑똑한 교수라도 끝까지 살아남기 힘들 것이 분명한데, 전지현이라는 액션 스타가 권세정을 연기했기 때문에, 평소 운동을 한다는 등의 일말의 설정 없이도 약간의 설득력이 생겼다고 본다. “생명공학과 교수가 액션을 잘해도 될까?”라고 되물으며 액션을 절제했다던 전지현의 고민은 지극히 타당했다.
5. <군체>에서 가장 인상적인 배우는 구교환이라는 의견에 동의한다. 위와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군체>는 구교환이 연기한 메인 악역 서영철이 이끄는 내용이기도 한데, 초반부에 잠깐 등장한 서영철은 생존자들이 서영철을 체포하는 장면 직전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좀비들에 의해 풀려나는 후반부까지 손도 묶여있고 눈도 가려진다. 그럼에도 여유 있고 무척 지능적인 서영철을 잘 흡수해낸 구교환의 연기가 이 영화의 몇 안되는 장점 중 하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연상호 감독의 <반도>에서 서대위로 분했던 구교환의 악역 연기가 더 무섭고 더 좋았던 것 같다. 서영철이 지닌 광기에 비해 행동의 동기가 빈약하기에, 배우가 캐릭터를 열심히 살려낸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사실은 서영철의 아버지가 권세정과 엮여 있었다는 발상 자체는 괜찮았으나, 좀더 서사의 레이어를 깊게 파고들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왜냐하면 서영철이 아예 서사가 없는 악역이었다면 <군체>는 지금보다 더 희한한 만듦새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6. 4번과 5번의 연장선에서, 나는 <군체>에 이르기까지 연상호 감독의 영화를 보면서 연기 앙상블이 뛰어나다든지 어떤 배우가 인생연기를 펼쳤다든지 인식한 적이 딱히 없는 것 같다. 그냥 영화 속의 모든 배우들이 각자 할 거 하는 것 같고, 연기톤이 적절히 조율됐다고 느낀 적이 없다. 이번에 <군체>를 관람하면서 좋은 배우들을 캐스팅해놓고 잘 응용해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반의 부정확한 후시녹음부터 많이 실망했고, 다른 작품에서 연기가 나쁘지 않았던 이중옥의 연기는 <군체>의 몰입을 해친 수준이었다. 지창욱과 김신록은 영화의 한 축으로서 남매 연기를 안정적으로 보여줬으나, 끝내 현석이 현희를 잃는 장면은 억지 신파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부산행> 때 감성에 머물러 있었다. 지창욱은 피 튀기는 액션 시퀀스들을 위해 캐스팅한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만약 그랬다면 지창욱은 멋있게 연출됐기에 성공한 듯하지만, 연기로는 두말하면 입아픈 김신록은 올해 개봉한 두 편의 영화가 <프로젝트 Y> <군체>라니 그 쓰임새가 이루 형용할 수 없이 아쉽다. 사실 가장 의문스러웠던 것은 고수와 신현빈이다. 특별출연이라 하더라도 고수는 정말 아무 임팩트 없이 감염되며 퇴장해 당황스러웠다. 권세정과 한규성이 이혼한 부부라기엔 대사도 행동도 그저 동료를 대하는 것 같았고, 한규성이라는 인물 없이 그냥 처음부터 권세정이 컨퍼런스에 초대되는 전개가 차라리 자연스럽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나는 후반부에 권세정이 공설희와 연대하는 것도 작위적으로 다가왔다. 둘의 연대가 여성 연대라는 카테고리로 묶이긴 하지만 결국 중간에 한규성의 죽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고, 공설희라는 인물을 전남편의 현부인이 아닌 권세정의 주변인물로 설정했어도 충분히 그 연대는 가능했으리라 본다.
7. 나의 점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