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음부터 좀비는 아니었습니다. AI가 보여주는 진화적 사고를 보며 얘기를 하다가, 이걸 좀비로 풀 수 있겠다 싶었죠."
색다른 시작점이 있었던 덕분일까. 영화 '부산행', 영화 '반도'로 한국형 좀비의 대부로 등극한 연상호 감독이 '군체'로 좀비물의 진화를 선보이는 데 성공했다. 고립된 공간, 외부와 단절된 상황에서 좀비가 된 사람들이 폭주하며 생존자들을 위협한다는 기본적인 설정은 가져오지만, 이들이 '집단지성'으로 이어지고, 진화한다는 사고의 전환은 끊임없는 변수를 제공하고, 눈을 뗄 수 없는 재미를 선사한다.
21일 개봉한 '군체'의 배경은 서울 도심의 초고층 빌딩 '둥우리'다. 기업 컨퍼런스가 진행되는 공간과 대형 쇼핑몰까지 겸비한, 대도시를 상징하는 복합 공간이다. 이곳에서 정체불명의 집단 감염 사태가 발생한다. 건물은 순식간에 봉쇄되고, 안에 갇힌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움직인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알고 있는 좀비물의 공식이다.
하지만 '군체'는 그다음 순간부터 다른 이야기를 시작한다. 처음에는 짐승처럼 네 발로 기어다니던 감염자들이 어느 순간 두 발로 일어선다. 생존자들을 알아보고, 무리를 지어 전략적으로 움직이며, 매순간 새로운 방식으로 공격을 갱신한다. 이 감염자들은 그저 달리지 않는다. 학습하고, 진화하며, 업데이트된다.
연상호 감독은 "초고속 정보 교류의 시대, AI가 인간의 집단지성을 모방하는 세상에서 이 영화의 좀비를 떠올렸다"고 했다. 개별성이 사라진 채 군집 자체가 하나의 생명체처럼 움직이는 존재, 그것은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무언가의 그림자를 닮아 있다.
한정된 공간, 33층 빌딩이라는 수직적 무대는 영화 내내 생존자들을 옥죈다. 올라갈수록 상황은 더 예측할 수 없게 변해간다. 게임의 난이도가 단계별로 높아지듯, 감염자들의 진화 속도는 생존자들의 탈출 계획을 끊임없이 무력화한다. 그 답답하고 긴박한 전개 속에서 관객은 좀처럼 눈을 뗄 수가 없다.

이 긴장을 더욱 단단하게 받쳐주는 것은 배우들의 앙상블이다. 11년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온 전지현은 생명공학자이자 생존자 그룹의 리더 '권세정'을 연기한다. 냉철하게 감염자들의 패턴을 분석하면서도, 공포 앞에서 무너지지 않는 의지를 가진 인물이다. 전지현은 이 캐릭터를 결코 과하지 않게, 그러나 결코 작지 않게 채워낸다. 실제 카 액션에도 직접 탑승해 임한 그의 열정은 화면에 고스란히 담겼다. 왜 우리가 이토록 전지현을 기다렸는지를, 영화는 시원하게 납득시킨다.
구교환은 감염 사태를 일으킨 생물학자 '서영철'로 등장한다. 잘못된 신념으로 스스로가 만든 감염자들을 '새로운 인류의 탄생'이라 믿는 인물이다. 확신과 광기, 섬뜩한 미소가 공존하는 이 입체적 빌런은 영화의 철학적 무게를 짊어지는 존재다. 단순한 악당이 아닌, 인간의 오만과 욕망이 빚어낸 비틀린 이상주의자로서 구교환은 또 한 번 새로운 얼굴을 보여준다.
지창욱은 감정과 액션, 캐릭터 변화의 모든 영역을 아우르는 '최현석' 역으로 극의 감정 온도를 조절한다. 신현빈은 현실적인 두려움과 연대의 순간들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고, 김신록은 인간에 대한 신뢰를 끝까지 놓지 않는 '최현희'를 통해 극의 인문적 감성을 이끈다. 고수는 감염자들에게 가장 먼저 노출되는 '한규성'으로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생존자들의 연대에 불씨를 당긴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이 배우들 중 누구도 화면을 독점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욕심 없이 영화 전체의 완성도를 위해 움직인다. 그 조화가 '군체'를 단순한 장르 영화 이상의 것으로 만드는 힘이다.

'군체'의 매력은 오락성과 철학성이 동시에 작동하면서 발현된다. 빠른 전개와 진화하는 좀비, 눈을 뗄 수 없는 액션 시퀀스가 장르적 쾌감을 충족시키는 동시에, 그 속에 전혀 다른 질문이 깔려 있다. 집단의 광기 속에 개별 행동, 소수의 의견은 무시당하지만 그것이 결국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메시지까지 담아내며 '군체'는 오락영화의 재미와 마냥 가볍지만은 않은 메시지를 세련되게 전하는 데 성공했다.
감염자들과 소통하고 그들을 조종하는 서영철의 존재는 단순한 빌런의 등장을 넘어, 인간의 욕망과 집단주의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묻는다. 극한 상황 속에서 이기적인 선택을 하는 인간과 끝까지 타인을 위해 움직이는 인간이 공존하는 방식은, 스릴러가 아닌 인간 드라마로서의 '군체'를 완성한다.
연상호 감독은 '부산행'으로 1000만 관객을 동원하며 좀비물을 메이저 장르로 올려놓았다. 전지현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킹덤' 시리즈에 출연하며 한국형 좀비의 재미를 선보인 바 있다. 올해 제79회 칸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공식 초청으로 상영 후 7분간의 기립박수를 받은 '군체'가 국내 관객들에게도 박수받을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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