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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재계 1순위여도 궁 안에서는 맨 뒷자리, 기둥 뒤편에 서야 하는 게 성희주의 현실이었으니, 입헌군주제 세계관에서 억울함의 원인이 신분제로 튀어도 이상한 건 아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모든 걸 설명할 수는 없다. 신분제보다 더 밑바닥에 근원적인 가부장적 위계가 있다.
현재 대한민국 국왕은 이윤(김은호), 8살이다. 너무 어린 나이에 왕위를 이어받아 그의 숙부인 이안 대군이 섭정 중이다. 드라마에서는 아무 문제 없이 매끈하게 넘어갔으나 의문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국왕의 어머니 대비 윤씨(공승연)가 버젓이 살아 있건만 왜 섭정을 숙부가 이어받은 것일까. 아마도 <21세기 대군부인>이 설정한 세계관은 섭정 자격을 왕실법 상 남성 부계 왕족에게 우선적으로 부여했을 것이다. 부계 혈통 중심으로 권한과 권위가 계승되면서 어머니는 자동으로 배제된다. 21세기에 맞춰 세상을 각색했지만 정세를 손에 쥔 멋쟁이 남자주인공을 만들기 위해 가부장제를 앞세운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 똑똑한 성희주는 희한하리만치 신분만을 꼬집어 탓한다. 새언니 한다영(채서안)이 이안 대군과 첫 인사를 나눌 때 눈앞에 있는 당사자가 아닌 아버지 존함을 먼저 묻는 장면을 보고도. 심지어 다영의 아버지가 전 법무부 장관이었다는 사실로 대리 칭찬을 듣는 모습을 목격하고도 그는 이상한 것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다. 의붓오빠 성태주와 한다영의 결혼에서 성희주가 느껴야 했던 건 못난 놈이 데릴사위로 신분 상승한 불편함이 아니라, 상향혼을 하고도 대중에게 ‘신데렐라’ 소리 한번 듣지 않는 남성의 왜곡된 권력이자 불합리함이어야만 했다. 정작 성희주는 호텔에 이안 대군과 함께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혼전 임신이라는 모멸적인 추문에 휩싸이지 않았던가.
<21세기 대군부인>은 성희주를 당당하고, 자기 일을 사랑하고, 글로벌 성과까지 거두는 능력 좋은 여성으로 설정했지만 그가 집착적으로 결혼을 외침으로써 자신을 고독하고 억울하게 한 가부장제를 오히려 연장시키는 꼴이 되고 만다. 남편의 신분이 자신의 신분이 되고, 시댁 주장에 따라 일을 반드시 그만둬야 할 운명을 군말 없이 받아들이며. 그게 이 드라마의 ‘주체적인 여자주인공’이다. 로맨스 측면으로 느슨하게 보아도 여전히 이상하다.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며 성장하는 쌍방 구원 서사를 목표로 두고도, 그 방식이 구태의연한 결혼으로 귀결되면서 왕실 문화에 저항하는 아이콘 이안 대군마저 기존 남성 중심 세계에 순응하는 한명의 평범한 남자가 되어버리고 만다. 최근 많은 멜로드라마는 메인 타깃인 여성층을 공략하기 위해 젠더적으로 안전한 남자주인공을 구가해왔다. 현실 세계의 가치관이 변하니 드라마 또한 자연스레 구색을 맞춰간다. 그러나 성희주가 불합리한 현실로부터 도망가는 곳이 그보다 더 폐쇄적인 궁궐일 때, 게다가 그의 연인이 보수적인 궁궐 문화를 어쩔 수 없다는 듯 받아들일 때 드라마가 무엇을 ‘로맨스’로 내세우고 싶은 것인지 아득하게 헷갈린다. 성희주가 진정 오랫동안 갈구해온 것은 무엇일까. 아버지의 인정, 선입견 없는 세상의 객관적인 평가, 지긋지긋한 신분제 타파. 그게 무엇이든 성희주는 다른 어딘가에 새로 귀속될 게 아니라 자기 세계의 알을 깨야만 한다.
좋은 기사라고 생각함
대군부인 속 세계관은 신분도 신분이지만 여성의 지위도 특이한데(조선시대보다 대비의 역할이 별다른 이유없이 축소되고 양반임에도 신분낮은 시집내에선 며느리일뿐임, 대군 부인은 대군과 동등하지 않아서 뒤에서 걸어야 함) 왜 모든 불합리함이 신분제로 귀결되는 건가, 생각해봄직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