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년 tvN 12부작 드라마 ‘미지의 서울’은 ‘나의 아저씨’ ‘나의 해방일지’ ‘우리들의 블루스’를 잇는 명품 드라마로 격찬을 받았다. 1인 2역을 맡은 박보영과 주변인물의 흠결없는 연기력도 작품 밀도를 끌어올렸지만 금이 간 채로 하루를 반복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대사와 서사가 호평을 가능케 했다.
‘미지의 서울’을 집필한 이강 작가는 그러나 대중 앞에 모습을 한 번도 드러낸 적이 없다. 언론 인터뷰 요청이 쇄도해도 전부 사양했던 그였다. ‘한국판 타임지 올해의 인물’을 표방하며 CJ ENM이 출범시킨 ‘비저너리(Visionary)’에 이름을 올린 이강 작가를 최근 서면으로 인터뷰했다.
“드라마 구상 초기부터 마음에 품은 테마는 ‘최선을 다한 사람이 벽을 마주한 순간’이었어요. 소중하고 반짝이던 것을 잃고 좌절했을 때, 그 벽 앞에 주저앉았다가도 더듬더듬 새로운 길을 찾아 나가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드라마 ‘미지의 서울’은 쌍둥이 자매 이야기다. 단거리 육상선수를 꿈꾸다 사고 이후 고향에서 일용직 청소부로 마대걸레를 쥔 동생 미지와, 서울 금융 공기업에 입사한 엘리트이지만 직장 내 괴롭힘의 표적이 된 언니 미래가 헤어스타일을 바꾸고 인생을 ‘체인지’한다.
좀 과장하자면 ‘일자무식’인 쌍둥이 피붙이가, 언니의 복수를 위해 용어조차 헷갈리는 금융공기업에 잠입하는 이야기. 처음엔 웃다가 어느새 전부 울고 만다. 그런데 미래와 미지를 비롯해 모든 등장인물은 선역부터 악역까지 모두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아예 가져본 적 없을 때보다 잠시나마 가졌던 것을 잃었을 때의 고통이 훨씬 크고 깊잖아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모든 인물이 저마다의 상실을 안고 있는 것으로 설정된 것 같습니다.”‘미지의 서울’이 호평받은 이유는 매회 반복되는 고요한 어조의 대사들 때문이었다. “하루씩 버텨서 오늘이 된 거예요”, “안 놓고 붙잡고 있으면 다른 걸 못 잡잖아요” 등의 대사를 들으면 시청자는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거짓 위로를 넘어서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삶의 여백을 생각하게 한다.
“너무 꾸미지도, 그렇다고 불친절하게 생략하지도 않는 적정선을 찾는 것은 늘 어려운 숙제예요. 내가 가장 아까는 사람이 힘겨워할 때 어떤 위로를 건네야 할까를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썼는데, 어떤 말보다도 위로가 가장 어렵고 조심스럽게 느껴져서 문장을 거듭 갈무리했어요.”
드라마에는 ‘상월의 바다’라는 제목의 시 한 편이 극을 지배한다. ‘반짝임에 열광하던 그이들 어디로 갔나/ 불빛 토하던 여름의 폭죽/ 어느새 모래 속에 식어버리고// 그 많던 사람 사람들 다 어디로 갔나’란 문장으로 시작되는 극중 김로사 시인의 작품이다.
이강 작가는 ‘상월의 바다’를 직접 썼다고 털어놨다.
“미지와 로사의 마음을 동시에 담아낼 작품을 찾기가 쉽지 않아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직접 ‘상월의 바다’를 썼습니다. 대학교 때 시 수업을 들으면서도 왜 칭찬을 받는지, 또 왜 혼나는지조차 몰라 그냥 아는 척 고개만 끄덕였는데, 조금이나마 좋게 봐주시는 분들이 계신 걸 보면 글은 고칠수록 나아진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미지의 서울’은 모든 인물들이 마주보는 구도로 설계돼 있다. 미지와 미래가 육체적 쌍둥이라면 상월과 로사는 정신의 쌍둥이로 이들은 거울처럼 서로를 본다. 미래를 짝사랑하는 변호사 친구 호수와 호수를 괴롭히는 충구 역시 신체장애라는 교차점 위에 선다.
“겉보기엔 단순하고 행복해 보이는 타인의 삶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복잡하게 꼬인 나의 삶과 다르지 않기도 하잖아요. 그 이야기를 풀어내려다 보니 자연스럽게 모든 인물이 거울처럼 설정으로 배치됐던 것 같아요.”
드라마 각본을 쓴다는 건 상업적으로 소비될 작품을 만드는 일이다. 그러나 좀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는 현실 세계엔 존재하지 않고 존재한 적 없으나,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와 유관한 또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일이기도 하다. 현실을 ‘복붙’하진 않으면서도 외면할 수 없는 세계를 한 땀 한 땀 엮는 일. 이강 작가는 “세상을 향해 편지를 쓰는 마음”이라고 드라마 쓰는 일을 재정의했다.
“제 글의 시작점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편지’였던 것 같아요. 누군가를 향해 마음을 담아 글을 쓰는 순간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내 앞에서 편지를 읽으며 문장마다 변하는 상대방의 표정을 지켜보는 걸 참 좋아했어요. 더 많은 사람에게 닿고 싶다는 마음에 드라마 작가의 길로 들어섰던 것 같아요. 준비하던 작품이 엎어지면 ‘이쯤에서 그만둬야 하는 게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좌절하던 시기도 있었어요. 만약 그때의 저 자신을 만난다면 ‘네가 보내려던 편지는 수신인에게 닿지 않았어. 곧 잊지 못한 답장을 받게 될 테니 믿고 좀 더 써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