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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퀘어 [씨네21] '휴민트' 박정민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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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6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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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휴민트> 촬영 이후 박정민은 잠시 휴식을 선언했지만 카메라 앞에 서기를 멈추었다고 해서 이 탐구심 넘치는 배우가 세계를 향한 넘실거리는 애호마저 중단했을 리는 없다. 숨 고르기 중 그는 출판사 대표로 여느 때보다도 바쁘게 활동하더니, 시상식 객석에 초대된 자리에서조차 만인의 연인이나 다름없는 신드롬을 낳았다. 그에게 배우로서의 과도기는 애꿎은 방황 대신 치열한 확장을 뜻했다. 신기하게도 연기의 뉘앙스 역시 달라졌다. <얼굴>에 이어 <휴민트>에서 박정민은 한때 그의 장기로 호출됐던 ‘생활 연기’의 영토를 과감하게 벗어난다. 장르에 부응하며 적시적소에서 선명하게 내리꽂는 표현력이 힘 있게 나서는 인상이다. 선 굵은 연기로 완성한 국가보위성 조장 박건은 그렇게 <휴민트>를 순정의 멜로드라마로 불리게 만든 주범이 됐다. 도착 지점을 예리하게 겨냥하는 동시에 마음의 항로를 따라 움직이는 박정민의 연기는 지금까지 그래왔듯 부지런히 자기만의 스타일을 조각 중이다.



- 어느 순간 박건이라는 인물이 북한어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잊게 되더라. 특히 북한 식당 뒷문에서 채선화(신세경)에게 “왜 그렇게 가혹하게 사라졌소”라고 묻는 대사처럼 고전미가 도드라진다. 언어적으로 어떻게 접근했나.
= 방언 연기를 몇번 해보니까 공통된 억양 속에서도 사람마다 말투가 다 다르다는 걸 실감하게 됐다. 선생님이 알려주는 대로만 하면 결국 그 사람을 따라 하는 연기에 갇히게 된다. 그런데 이번에 함께한 북한어 선생님이 대사를 일단 우리말로 먼저 읽어보라고 하신 뒤, 꼭 필요한 포인트만 짚어주면서 나머지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표현해도 좋다고 명쾌히 짚어주셨다. 덕분에 언어에 갇히지 않고 인물의 감정과 그 말에 담긴 진심의 리얼리즘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 대사의 클래식함이 박건과 잘 어울렸다.
= 감독님도 선화와 대화할 때는 고전체나 경어체를 썼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경어를 씀으로써 느껴지는 감정의 깊이와 두 사람의 역사가 보이는 느낌이 나도 좋더라.



- 박건은 속을 알 수 없고 냉혹한 인물형이지만, 역설적으로 <휴민트>에서 가장 강렬한 감정을 드러낸다. 이를테면 식당 앞에서 채선화를 보내고 난 후 혼자 돌아서서 일그러지는 표정 같은 것.
= 그래서 감정을 충분히 느끼는 것만으론 안되는 연기였다. 내가 평소 쓰지 않았던 표현 방식들을 꺼내야 했다. 배우는 자기 안으로 무수한 감정과 말을 읊조리며 자연스럽게 표정이 배어 나오길 바라지만, 그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때로는 화보를 찍듯이 효과적으로 표정을 만들어줘야 할 때가 있다. <휴민트>에선 이런 표현이 필요했다. 나로서는 그동안 자주 해오던 방식이 아니어서 현장 모니터링을 더 꼼꼼히 했다. 촬영·조명 감독님까지 다 같이 모니터를 보고 ‘인물이 이런 표정일 때 어떻게 찍는 게 가장 효과적인지’ 등등을 다 함께 계산하며 찍은 결과물이다. 사실 때로는 자연스러운 연기가 훨씬 쉽다. 말 그대로 자연스러우면 되니까. 하지만 자연스럽지 않은 연기를 관객에게 자연스럽게 다가가게 만드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그런 연기를 능숙하게 해내는 선배님들을 볼 때마다 늘 존경의 박수를 보내게 된다. 이번에 직접 해보니 정말 고통스러울 정도로 어려웠고(웃음) 다시는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 <휴민트> 이전에 홍산오의 옥상 신으로 회자되는 <헤어질 결심>은 물론 강동원 배우와 앙숙으로 맞붙은 <전,란>도 박정민의 멜로드라마였다. 캐릭터의 숨은 정념을 찾아나가는 편인가.
= 잃고 싶지 않은 모든 마음은 사랑의 일종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속에서 서로를 지키기 위해 하는 모든 행동이 사랑이기에, 꼭 이성간의 멜로가 아니더라도 사랑과 흡사한 감정을 계속 연기해왔다. 다만 연인 관계의 직접적인 표현은 여전히 조금 부끄럽다. 만약 <휴민트>를 보신 분들이 ‘박정민의 멜로가 역겹지 않다’고 해주신다면 앞으로 조금 더 용기를 내보겠다.



- 박건의 첫 등장 신에서 다트를 던지는 솜씨는 거의 마블급이던데. 이후 그 실력을 더 활용하지 않는 게 아쉽지 않았나.
= 그러게! 배우로서 첫 등장할 때 어떻게 보일지에 대한 고민이 늘 있는데, 이번 박건의 등장은 대본부터 참 좋았다. 실루엣만으로 인물의 동세를 만들어내는 과정이 흥미로웠고 그만큼 세밀하게 표현을 준비했다. 정자세로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던지는 버전, 여유 있게 놀리듯이 던지다가 마지막에 어둠을 뚫고 훅 나오는 버전이 있었다. 내가 후자를 제안했고 감독님도 받아들여주셨다. 인물의 첫 등장에 이렇게 힘이 실린 신은 배우 인생 15년 만에 처음이라 정말 제대로 해보고 싶었다.



- 이번 현장에서는 동료 배우들과 사전에 의견을 굉장히 많이 나누었다고 들었다. 평소 스타일과는 조금 달랐던 것 같은데.
= 원래는 각자가 준비해온 것으로 카메라 앞에서 생생하게 앙상블을 만드는 편을 선호한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적은 대사량, 절제된 상황이 돋보여야 하고 그외의 순간엔 액션이 많다 보니 각 배우가 자신의 자리에서 정확하고 치밀하게 조우해야만 했다. 현지 카페에서 삼삼오오 모여서 내일은 또 어떻게 할까, 의논하곤 했다. 학교 다닐 때 연습실에서 그랬듯이.



- <밀수>에 이어 류승완 감독과의 재회는 어땠나.
= 감독님과 나누는 대화의 밀도와 총량이 또 달라졌다. 내가 느끼는 책임감의 무게도 커졌고. 감독님과의 첫 만남은 2013년 단편 <유령>이다. 필모그래피가 <파수꾼> 하나뿐인 배우를 감독님이 선택해준 것이 감사해서 정말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난다. 어느덧 마흔이 되어 감독님과 깊은 교류를 하며 작품을 만든다는 게 아직도 꿈같고 신기하다. 사실 종종 이런 얼얼함을 느끼곤 한다. ‘내가 동경했던 감독, 배우들과 함께 작업을 하고 있다고?’ 무뎌지기 쉽지만 정말, 정말 감사한 일이다. 류승완 감독님이 나라는 배우에게 중요한 역할과 디렉션을 주셨으니 그 신뢰를 잘 받아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임했다.



- 누군가의 인정이 꼭 필요하고 인정욕구가 동력이 되는 시절도 분명 있다. 그 시기를 지나온 지금 마흔의 박정민은 요즘 어떤 관문을 마주하고 있나.
= 예전엔 존경하는 분들의 인정이 연료였다면 이제는 더 많은 관객의 기대를 흡수하고 나아가 어떤 판타지를 채워드릴 수 있을까 스스로 고민하는 상황이다. 과거 황정민 선배님이 “사람들이 내 연기 잘하는 건 다 아는데, 다음 스텝은 뭘까”라고 고민하던 인터뷰를 보며 참 부러웠다. 스스로를 군더더기 없이 ‘연기 잘한다’고 표현하는 이유 있는 자긍심이 느껴져서다. 선배님들이 가신 그 끝없는 길을 어떻게 가야 할지 매일 고민한다. 가도 가도 끝이 없다는 게 배우라는 직업의 숙명 같다.



- 얼마 전 의외의 유튜브 채널(<충주맨>)에 출연해서 놀랐다. 지금까지 같은 채널의 모든 콘텐츠를 다 봤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영화, 책, 각종 영상 콘텐츠와 게임에 이르기까지, 박정민은 사랑이 많은 사람 같다. 세상의 많은 것들에 관심을 두고 끝까지 들여다보는 성향 말이다.
= 좋아하는 게 많고 관심 있는 게 참 많긴 하다. 한번 꽂히면 일단 끝까지 파보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이 궁금하면 그가 관여한 콘텐츠를 다 찾아본다. 나중에 그 사람을 만났을 때 두루뭉술하게 “나 당신 팬이에요”라고 하는 대신 “당신 그때 그 얘기했잖아요, 무슨무슨 대학교 중퇴한 거 맞죠?”라고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싶기 때문이다! 출판사 대표로서 작가님들과 계약할 때도 그분들의 책을 가능한 한 전부 보고 자리에 나가려고 한다. 그래서 시간이 조금 오래 걸린다. 그렇게 깊숙이 알려고 하는 에너지가 삶의 동력인 것 같다. 물론 그러다 흥미가 떨어지면 딱 그만두기도 한다.



- 다각으로 사랑을 뻗치는 능력은 오래전부터 꾸준했을 텐데, 그중에서도 연기를 이렇게 오래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 나도 신기하다. 사실 배우 역시 관심이 생겨서 일단 시작해본 일이다. 영화감독이 되고 싶어 공부하다가 대학로에서 배우 선배들을 보며 ‘저게 더 재밌겠는데’ 싶어 기웃거린 게 시작이었다. 결국 연기는 많은 관심사 중 변함없이 흥미를 유지하고 있는 일인 셈이다. 물론 이건 배우로서 내가 어느 정도 인정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보다 조금 더 나은 내가 되려고 아등바등하다 보면 결국 일이 재밌어진다. 다만 그래서 더 경계한다. 언젠가 이 일이 내게 진정으로 재미있지 않거나 삶 자체를 훼손하는 순간이 오면 미련 없이 관둬야 한다고.



- 사랑하는 상대 앞에서 괜히 훗날의 이별을 가늠해보는 연인 같기도 하고.
= 아, 사랑하는 연인에게 ‘우리 나중에 헤어질 거잖아’라고 말하면서도 평생 같이 살고 싶어 하는 마음 같은 걸까? (웃음) 사실 누군가 나를 찾아줄 때까지는 정말 오래 열심히 하고 싶다.



- <휴민트>처럼 몸을 많이 쓰고 긴장감이 높은 장르영화를 촬영할 때도 틈틈이 독서를 하나.
= 쉴 때보다는 덜 읽게 되지만 이번 촬영지였던 라트비아는 밤이 되면 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 현지인들도 여기 왜 왔냐고 물어볼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미리 챙겨간 종이책, 전자책을 가릴 것 없이 싹 다 읽고 왔다. 재미있는 건 그때 촬영지에서 제일 즐겁게 읽은 책의 작가님과 얼마 전 우리 출판사가 계약을 맺었다는 사실이다. 삶과 연기, 출판 일이 유기적으로 돌아가는 게 신기하다. 오히려 요즘처럼 홍보 활동이 잦거나 공연(<라이프 오브 파이>)이 있는 시기에 책 읽기가 더 어렵다. 그럴 땐 단편소설을 주로 본다.



- 짧은 휴식기 동안 인간 박정민은 쉼 없이 바빴다. 한동안은 <휴민트> 이후 3월까지 <라이프 오브 파이> 공연을 이어갈 예정인데, 돌아온 배우 박정민의 근미래 계획은 뭔가.
= <휴민트> 촬영 이후 잠시 쉰다는 건 촬영장에 가서 연기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이후 나를 믿고 원고를 맡겨준 작가님들을 위해 책을 팔아야 하는 임무가 있으니 대외적으로 더 많이 앞에 나서게 되더라. 성향상 맡은 일은 최선을 다해야 직성이 풀린다. 작가님들한테 그냥 회사만 차리고 거들먹거리는 대표처럼 보이긴 죽어도 싫으니까. 또 <얼굴> 개봉도 있었고. <휴민트>까지 마무리하면 미리 찍어둔 작품이 없는 시기가 온다. 오히려 지금부터가 휴식이려나, 아니면 이래저래 더 바쁘게 지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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