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탈주>의 개봉 이후 누구보다 바쁜 2025년을 보냈던 이종필 감독이 신작 <파반느>로 그 기세를 이어간다. 박민규 작가의 2009년작 로맨스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 <극장의 시간들>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다시 시작한 미쟝센단편영화제의 ‘질투는 나의 힘’(로맨스/멜로) 부문의 심사위원으로 이름을 올렸던 이 감독이다. 그리고 얼마 전 개봉한 <당신이 영화를 그만두면 안 되는 30가지 이유> 프로젝트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여러모로 정신없는 시기를 보내고 있을 이종필 감독에게 소회를 물었다. 뜻밖에도 그는 <파반느>의 넷플릭스 공개를 기다리고 있는 지금이 “데뷔작 찍은 기분” 같다는 대답을 들려줬다.
- <탈주> 이후 대외 활동이 많았는데 그사이에 신작 준비를 한 것이 놀랍다.
= <파반느> 본촬영은 <탈주> 개봉 전에 마친 상태였다. 그 후 겨울에 눈 오는 몇 장면을 추가 촬영했을 뿐이다. 그리고 편집을 마칠 때쯤 넷플릭스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굉장히 감사한 마음이 큰데, 뭔가 지금까지 만든 영화들의 개봉 때와 다른 기분이 든다. 전엔 철저히 대중영화적 관점에서 잘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나 자신보다는 관객들이 영화를 어떻게 보실지 궁금했다면 지금은 마음이 더 초조하고 뒤숭숭하달까. 마치 데뷔작을 찍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 ‘데뷔작 느낌’이라는 게 작품의 애정도에 대한 표현일까, 아니면 연출 방법론적인 의미로 비로소 하고 싶은 것을 했다는 의미일까.
= 데뷔작이란 표현이 적절한진 모르겠는데, 이를테면 소설가들이 작품을 발표할 때 ‘발가벗겨진 것 같다’라고 말할 때가 있지 않나. <파반느>는 조금 더 개인적인 작품에 가까운 거다. <탈주>나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기본적으로 내 이야기는 아니었다. 물론 <파반느>도 완전히 내 이야기는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나의 감정이나 내가 했을 법한 것들이 영화에 담긴 편이다. 그래서 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도 다른 결에서 기대가 된다. 전에는 ‘좋다’, ‘재밌다’라는 피드백으로도 만족했다면, 이번엔 내가 느낀 걸 다른 사람들도 느낄지가 무척 궁금한 상태다.
- 처음 소설을 읽었을 때부터 이 작품이 특별하게 다가온 것일까.
= 딱 서른살이 되던 시기에 갓 출간된 소설을 읽었다. 웃기지만, 그때부터 내가 쓴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20대 때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에서 했던 고민들, 사랑했던 사람뿐만 아니라 여러 인간관계에서 정리하지 못한 채 막연하게 흘려보낸 것들이 책에 정확히 묘사되어 있는 것을 보고 완전히 빠졌었다.
- 그때부터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나.
=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니지만 우연한 기회가 왔을 때 놓치고 싶지 않았던 건 분명하다. 내 이야기 같다는 것에 매력을 느낀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멜로영화를 꼭 만들어보고 싶었던 게 컸다. 10대 때 잘 이해도 못하면서 <첨밀밀>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같은 영화를 즐겨 보기도 했다. 막연한 꿈이었던 걸 이 소설이 구체화시킨 게 맞는 것 같다. <도리화가>를 만든 이후부터 작품 구상을 시작한 것이니 거의 10년에 달하는 프로젝트인 셈이다.

- 멜로영화로서 <파반느>의 차별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 내가 좋아하는 멜로는 반짝반짝하고 내세울 게 있는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것이다. 앞서 말한 <첨밀밀>도 홍콩에 돈을 벌러 온 사람들의 사랑 얘기이지 않나. <파반느>도 비슷하다. 백화점 지하 공간이라는, 서울의 후미진 곳에서 벌어지는 투박한 사랑 이야기이다. 매우 현실적이다.
- 영화는 주인공 경록의 부모의 전사로 시작된다. 둘이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고전영화처럼 연출한 게 인상적이었다.
= 소설에도 한 챕터 이상 나오는 부분이다. 말씀해주신대로 볼 수도 있는 장면이지만, 나는 특정 연인이라기보다는 태초의 남녀 아담과 이브의 사랑을 표현하려 했다. 시대가 달라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음을 그리고 싶었다. 그래서 얄궂지만 사과를 장면에 넣기도 했다. (웃음) 동시에 오프닝에서 어떤 선언을 하고 싶기도 했다. 이 이야기가 삐까번쩍한 곳에서 벌어지는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 세명의 주요 인물이 극을 이끌어간다. 고아성, 변요한 배우도 인상적이었지만 신예 문상민도 돋보인다.
= 소설을 극화하는 과정에서 세 인물을 기준으로 축을 바꿔가면서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으로 극을 구성했다. 셋이 어우러지는 결과물을 통해 이 영화가 단순한 사랑 이야기로 읽히기보단, 청춘 시기를 전반적으로 담고 있는 작품으로 읽히길 바랐다. 문상민 배우는 적극적인 점이 정말 마음에 들었고 그래서 참고할 만한 영화를 많이 보여준 기억이 있다. 그중 한편이 <봄날은 간다>인데, 이게 문상민 배우가 태어났을 때쯤의 영화다. 그와 작업하며 젊은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그들이 영화를 보는 감각과 내가 어릴 때 영화를 봤던 감각이 얼마나 같고 다른지 비교해보는 모든 과정이 정말 즐거웠다. 앞으로도 젊은 배우들과 작업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 미정 역을 맡은 고아성 배우가 없었다면 만들어지기 어려운 영화였다고 들었다.
= 정말이다. 작업 초기 단계에서 한 가장 큰 고민이 원작의 ‘못생긴 여자’를 영화로 표현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었다. 아직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을 찍기도 전이었는데, 어느 날 우연히 만난 고아성 배우가 내 고민을 듣더니 자신의 눈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을 했다. 그런데 그걸 듣고 다 정리가 되더라. 굳이 못난 얼굴을 표현하기보다는, 못난 마음을 잘 그려내는 것이 중요하겠다고 생각했다.
- 변요한 배우가 맡은 요한 캐릭터에 대해서도 소개해준다면.
= <고래사냥>의 민우(안성기)나 <비 오는 날 수채화>의 천호(이경영) 같은 캐릭터를 떠올렸다. 두 남녀 사이에 낀 독단적이고 이상한 캐릭터다. <파반느>를 이끌어가는 또 하나의 축이자, 말과 글로 상황을 설명해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름이 같은 건 우연이다. 변요한 배우의 규정지을 수 없는 연기가 캐릭터와 정말 잘 어울렸다고 생각한다.
- 아이슬란드에서 오로라를 보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로 방문한 것인가.
= <탈주>로 유럽 영화제들을 방문한 틈을 타서 찍고 왔다. 원작은 알프스이지만 영화에서 계속 강조하고 싶었던 빛과 어둠의 대비를 표현하기 위해선 아이슬란드의 오로라만 한 게 없다고 여겼다. 그 장면은 스태프 없이 고아성, 문상민 배우 둘, 그리고 현장에서 구매한 카메라로 내가 직접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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