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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퀘어 [씨네21/특집] 정성일 평론가・감독이 기억하는 배우 안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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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23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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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rTaS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하지 않았는데 갑작스럽게 작별의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저는 어찌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당황한 나머지 황급하게 쓰고 있는 이 문장들이 예의 바르지 않은 것은 아닌지 그저 조바심이 날 따름입니다. 제가 지금 쓰고 있는 이 말들은 누구를 위해서, 누구를 향해서, 그렇게 누구에게 하는 걸까요. 이미 우리 곁에 없는 분을 위한 말. 그러므로 제가 이 말을 해도 괜찮은 것일까요. 자꾸만 저에게 다시 물어보고 금방 쓴 문장을 되짚어보고 있습니다. 지금 할 수 있는 한 불러보아야 할 이름을 미루고 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더 미루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름을 부르는 순간 지금 우리가 마주한 작별을 공식화하는 게 되어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걸 용기라고 불러야 할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침묵을 지키는 것이 제가 해야 할 일일까요. 어쩌면, 네, 아마도 어쩌면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마주한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듯이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그 이름이 이제 우리 곁에 없다고 말해버리는 순간 마주하게 될 그 텅 빈 공허한 자리의 크기가 두렵습니다. 그저 슬픔이라는 말만을 가지고 그 자리에 갈 수 없을 때, 그래서 그 이름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흠모하면서 지내왔는지를 비로소 깨달으면서, 그러면서도 얼마나 귀한 줄도 모르고 당연히 있어야 할 이름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저 누리기만 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마주하게 되는 그 설명하기 어려운 두려움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만 하기에 제가 말을 꺼내 들겠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안성기 배우가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할 수 있는 한 아무 감정을 담지 않고 건조하게 이 말을 하고 싶습니다. 일단 여기에 저의 추억, 몇번에 걸친 만남, 그때마다 보여주신 친절한 대답, 그리고 웃음, 거기에 담겨 있었던 더도 덜도 아닌 호의, 그러면서 해주셨던 말, 저는 그 말을 아직도 잊지 못하는데, 게다가 정작 제가 했던 질문은 떠오르지도 않는데, 성일씨나 나나 영화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잖아요, 라고 했을 때 느껴보았던 그 공동체의 가족 같은 포근한 자부심을 주신 분에게, 제가 일단 감정을 담게 되면 아무 말도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이렇게 매정하게 시작하는 걸 이해해주실 것입니다.


한번도 그런 걸 따져 물으면서 헤아려보진 않았지만, 그래서 이제야 떠올려보니, 제가 스크린에서 안성기 배우의 얼굴을 처음 유심히 본 영화는 1983년 그해 겨울 어느 날 할리우드 극장에서 본 <안개마을>이었습니다. 물론 이 얼굴이 갑자기 나타나기라도 한 것처럼 제 주변의 모두가 <바람 불어 좋은 날>과 <만다라>를 본 다음 배우 안성기의 이름을 이야기하고 있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영화들이 처음 개봉했을 때 저는 군대에 있었고, 그런 다음 제대하고 스크린에서 볼 수 있기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비디오로도 볼 수 있었지만, 하지만, 네, 그렇습니다, 모두가 칭찬을 아끼지 않은 이 영화들을 그렇게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그때 저는 안성기 배우보다는 <족보>부터 따라가고 있었던 임권택 감독님의 새 영화가 이전까지의 영화들과 너무 달라서 몹시 당황하고 있었고 배우의 얼굴을 살펴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 배우의 얼굴에 비로소 멈추어선 것은 일년이 더 지나서 <적도의 꽃>을 볼 때였습니다. 여기서 무언가 엄청난 연기를 보여주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전혀 다른 연출, 전혀 다른 이야기, 전혀 다른 인물 안에서 배우 안성기를 보며 제가 마주친 건 경험적으로 이전까지 보았던 한국영화 안의 배우들, 아니 차라리 여기서는 인물들이라고 불러야 할 터인데, 그들과 다른 종류의 존재, 이 표현이 지금 저항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걸 저도 알고 있는데, 다른 말을 불러올 수 없어 이 말을 꺼내 들긴 했지만, 그래도 망설임을 무릅쓰고 좀더 말하자면, 흔히들 말하는 연기가 아니라 인물들의 존재 사이에서 분리를 끌어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둘은 다르면서도 하나의 쌍을 이루면서 각자가 그 자리에 있을 때는 그저 자신에게만 충실했는데 함께 있게 되자 유의미한 응답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걸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알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저의 착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애써 무시하고 지나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서로 전혀 다른 영화인 <적도의 꽃>과 <안개마을>을 연결하면서 안성기라는 배우가 만들어내고 있는 인물, 그러니까 두명의 인물이 지닌 서로 다르면서도 가까이 머무는 이 친화성이 무엇일까. 라는 질문은 고스란히 남았습니다. 질문이 알고 있음에 틀림이 없을 대답. 그러므로 대답의 몫은 고스란히 저에게 넘겨졌습니다. 거기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당장 대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영화를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네, 그것이 항상 제가 대답을 얻어내는 방식이었습니다.


남들보다 약간 뒤늦게 낯선 동네까지 찾아가서 이제는 그 이름조차 잊어버린 재개봉관에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보았습니다. 워낙 조세희 작가의 원작을 좋아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저뿐만이 아니라 제 친구들도 모두 그러했습니다. 필름에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습니다. 박정희의 유령이 여전히 어슬렁거리고 있었고, 살인자 전두환이 대통령이 막 되고 난 다음의 이야기라는 걸 셈에 포함해주십시오. 거기서 이제 막 제대하고 돌아온 다음 가난한 ‘난장이’의 집에서 하릴없는 나날을 보내는 장남을 보았습니다. 무언가 특별한 연기를 하는 게 아닌데도 그냥 거기 있으면 되었습니다. 한번 더 문장을 마치 정식화시킨 것처럼 반복하겠습니다. 그냥 거기 있으면 그러면 되다. 마치 무기력한 장남은 <안개마을>의 깨철과 <적도의 꽃>의 미스터 엠 사이를 중재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문열과 최인호와 조세희를 연결하는 이 배우의 존재를 나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게 존재의 문제가 아니라면 달리 무엇이겠는가, 라고 내게 되물어보았습니다. 그건 배우들에게서 늘 마주치는 인물의 가면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오해는 하지 말아주십시오. 지금 저는 어느 쪽 표현도 부정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둘 사이에 어떤 우열의 관계를 논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그 둘을 다르게 사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거기서 그 존재의 얼굴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말하다, 라는 표현에 주의를 기울이고 싶습니다. 얼굴이 내게 말을 할 때 내가 귀 기울이는 방법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그건 그 얼굴을 다시 보면서 그 목소리를 구별해내는 것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제가 질문에서 대답을 구하는 첫 시작이었습니다.


가까스로 그 대답의 실마리를 붙잡게 된 것은 <고래사냥>에서였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그때는 1984년이었습니다. 역설의 학습. 그런 의미에서 여기서 제가 마주한 것은 시대정신의 파산이었습니다. 그런데 대학생 병태와 벙어리 창녀 춘자를 데리고 섬으로 향하는 황당무계한 인물인 거지 왕초 민우가 기이하게도 반시대적인 이 영화를 동시대적인 영화로 되돌려놓고 있었습니다. 거지 왕초 민우는 대학생 병태의 텅 빈 상징적 아버지의 자리에 초대받은 상상적 아버지이며, 동시에 그 자리에서 아무 책임도 지지 않으면서 인도하고 명령하는 상징적 스승이었습니다. 이전에는 존재한 적이 없는 아버지의 외양. 더 이상 무섭지 않은 아버지. 심지어 어머니처럼 부드러운 아버지. 아니, 차라리 상처받은 아버지. 짓밟힌 아들, 한번 더, 그때는 1984년이었습니다. 박정희라는 아버지, 전두환이라는 아들, 두명의 군인, 총칼을 든 무서운 아버지,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 내려다보고 있을 때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당신의 아버지,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당신의 아들, 일그러지고 지워진 어둠 속에서, 그림자 안에서,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무언가를 말하고 있을 때, 스크린에서 겨우 거기에서 견디고 있는 한 남자를 보았습니다. 한국영화에서 존재한 적이 없는 아버지. 그건 최인호 작가가 만들어낸 아버지도 아니고 배창호 감독이 이루어낸 어머니도 아니었습니다.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안성기라는 배우의 존재가 그 자리에 도착해버렸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새로운 등장인물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제 비로소 차례로 마주했던 이 인물의 존재에 대해서 알 것만 같았습니다. 이 등장인물의 존재는 무능력한 아버지, 가련한 아들, 영웅 서사도 부재하고 책임질 만한 것도 가져본 적이 없는 남성, 이제까지 한국영화에서 마주친 적이 없는 남성성을 상실한 남성의 모습이었습니다. 대답의 좌표.


그제야 비로소 미루었던 두편의 영화를 볼 수 있었습니다. <바람 불어 좋은 날>과 <만다라>. 서로 다른 원작 소설, 최일남과 김성동, 서로 다른 감독, 이장호와 임권택, 서로 다른 인물, 중국집 배달부와 만행 중인 승려. 서로 다른 상황. 일자리를 구하러 상경한 서울에 와서 내내 답답하게 말도 더듬으며 모두가 무시해도 그저 웃기만 하면서 가진 것을 차례로 잃어가다가 역에서 떠나는 친구가 제 짝 손을 쥘 수 있게 도와줄 때 가까스로 제자리를 견뎌내는 애처로운 남성. 김진규, 최무룡, 박노식, 신영균, 장동휘, 신성일, (…)에게서 이런 남성을 만나본 적이 있던가요. 집을 떠나 사바세계를 떠돌면서 깨달음을 구하지만 끝내 어머니와도 절연하고 다시 길을 나서는 아들을 본 적이 있던가요. 안성기는 다른 남성배우라면 불가능했을 그 역할을 가능하게 만든 존재입니다. 그렇습니다. 안성기는 아버지의 무게를 떨쳐버렸고, 남편의 권위를 보잘것없게 만들고, 아들의 자리를 거절하면서 한국영화에서 가부장제를 외면하였습니다. 한국 남성의 다른 가능성. 네, 그 자리에 있었던 분, 당신.


마치 희생을 떠안은 것처럼 그렇게 그 물음에 어떤 우위를 점하는 법 없이, 그래서 자신의 존재에 맡겨준 역할 안으로 들어가서 그 인물을 수행하기라도 하듯이, 그 배역들과 관계 맺어 왔습니다. 그 존재는 차례로 선명해졌습니다. 아니, 한국영화는 안성기라는 존재의 사용법을 익혀나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기쁜 우리 젊은 날>의 성장하지 않는 소년성, <칠수와 만수>에서 아버지의 무게에 등 떠밀리다시피 추락하는 아들, <남자는 괴로워>의 어디선가 이미 잃어버린 꿈, 그리고 <남부군>의 무참히도 실패한 이상과 감당할 수 없는 책임, 그 자리의 반대편에서 역사 앞에 끌려가며 부끄러움에 가득 차서 진행되는 것만 같은 <아름다운 시절>. 이 모든 남성성의 패배, 아니 차라리 자살에 가까운 파괴와 자포자기의 결단. 안성기라는 존재는 그걸 모두 끌어안고 거기 있었습니다. 의외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저는 그 명단에 <투캅스>를 더하고 싶습니다. 여기에는 아무것도 책임지고 싶지 않은 남자, 최소의 책임, 최소의 정의, 최소의 도덕으로 가까스로 남아서 막다른 골목에 이른 남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거기서 위로를 얻거나 혹은 연민을 가졌거나 때로 자신을 떠올리면서 가끔 웃기는 했지만 대부분 남몰래 우울하게 들여다보았던 우리의 시대는 반대편에 있던 안성기라는 존재가 얼마나 불편했던가요. (하지만 구태여 여기서 그 명단을 부를 필요가 있을까요.)


아마 가장 어려운 질문은 그래서 당신에게 안성기라는 배우는 결국 어떤 영화입니까, 라고 물어볼 때일 것입니다. 아무래도 망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한참을 머뭇거린 다음 제 대답은 <축제>입니다. 이청준 작가의 동화를 영화로 옮긴 어머니 장례식에 관한 이 영화에서 이제까지 어떤 영화와도 달리 모친상을 담담하게 치르면서 그 내면을 거의 보여주지 않는 배역 준섭을 통해 화면에서 아, 이 배우는 연기가 아니라 인격이 찍히고 있구나, 라는 것을 저는 보았습니다. 시사실에서 <축제>를 본 다음 그때 곁에 계셨던 이청준 작가에게 조심스럽게 말씀드렸습니다. 안성기 배우의 연기가 정말 훌륭하지 않습니까. 이청준 작가께서 언제나처럼 어린 저에게조차 겸손한 표정으로 대답해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어머니를 떠나보내는 한국인의 얼굴을 갖게 된 것이지요. 말 그대로 존재의 인격. 그러므로 거기서 저는 이 존재가 살아왔고, 그것도 열심히 살아왔고, 그 과정에서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으면서, 어떤 것도 명령하지 않으면서, 어느 것도 요구하지 않으면서, 우리 앞에, 우리 곁에, 우리 뒤에 머물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자리가 텅 비어버렸습니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많은 영화가 그 이름을 불러볼 것입니다. 하지만 대답을 듣지 못할 텐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마 앞으로도 많은 영화가 그 존재를 그리워할 것입니다. 하지만 허공을 향해 내민 손을 누가 잡아줄까요. 아마도 기회가 닿을 때마다 이름을 부르게 될 것입니다. 그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귀한 이름이었는지 그때마다 떠올릴 것입니다. 그러니 이 작별 인사는 다음에 이름을 부를 때까지 잠시만 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수백번의 작별 인사. 수천번의 작별 인사. 더 많은 작별 인사, 아마도 더 자주 하게 될 인사. 그렇게 우리 곁에 머물러 계실 것입니다. 금방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2026년 일월 날씨가 화창하지만 먼 길을 떠나시기에는 몹시 추운 날,

정성일 드림



https://naver.me/G9pgnF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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