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이미 지나갔고, 그 시절 우리는 이미 없다는 것. 돌이킬 수는 없다는 것.” 과거 연인이었던 은호(구교환)와 정원(문가영)은 태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귀국행 비행기에서 우연히 마주친다. 비행기가 지연되면서 둘은 해외에 하루 더 체류하고, 친구이자 연인으로서 함께한 지난날을 밤새 되새긴다. “그때 헤어지지 않았더라면…”이란 가정은 이별한 뒤 어느 시점까지 유효할까. 김도영 감독이 연출한 <만약에 우리>에서 정원과 은호는 오랜 기간 잊고 있던 서로의 20대를 소환한다. 건축가와 게임 개발자라는 각자의 꿈을 이룬 정원과 은호가 30대의 시선으로 돌이켜본 둘의 20대는 애틋했고, 애석했다. 그런 은호와 정원의 사랑과 이별, 재회를 배우 구교환과 문가영은 어떻게 체화했을까. 오랜만에 멜로영화로 돌아온 두 배우는 결과적으로 은호와 정원의 삶에 따뜻한 색채를 불어넣었다. <만약에 우리>가 내포한 사랑의 이상과 현실에 관해 구교환, 문가영 배우가 전한 이야기로 새해의 포문을 열어보았다.

<만약에 우리>의 주인공 은호는 근래 구교환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범상한 풍경 속에 놓인 남자가 아닐까. 좀비 아포칼립스(<반도>), 내전으로 고립된 도시(<모가디슈>), 휴전선 인근 부대(<탈주>), 킬러들(<길복순>)과 기생동물(<기생수: 더 그레이>)의 난장을 휘젓던 배우가 2000년대 서울 대학가로 뚝 떨어졌으니 말이다. 언덕배기 자취방을 오르내리며 청운의 꿈을 꾸는 생기만큼이나 반가운 건 비로소 로맨스의 시작과 끝을 면밀히 통과하는 구교환의 얼굴이다. 짝사랑하는 여자를 향해 곤두선 감각이 권태기의 피로로 무뎌지기까지, 그는 오래 숙성한 감정의 결을 살려 정원(문가영) 앞에 섰다. 젊은 날의 서툰 진심을 복기하며 연기하는 와중에도 유머 한 꼬집을 흩뿌렸다. 긴박한 장르물의 무대에서 간과되었을 뿐 “내 캐릭터 안에는 언제나 멜로가 있었다”고 자신한 배우는 그렇게 이 영화를 결말을 알아도 귀 기울이게 되는 친구의 연애담처럼 만들었다.
- <탈주> 개봉 당시 <만약에 우리> 촬영 중이었다. 그때 신작에서 양조위 분위기를 노리고 있다고 인터뷰한 걸 기억하나.
= 농담처럼 한 이야기였다! 양조위 선배님은 멜로의 대명사니까.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장국영 선배, 여명 선배가 섭섭해할 것 같고…. (웃음) 사실 특정한 레퍼런스는 없었다. 내 시선은 항상 나를 향해 있다. 이 영화에서는 내가 첫사랑에게 느낀 설렘을 잘 담아보려 했다.
- 혹자는 구교환의 멜로 연기가 새롭다고 하지만 태초에 단편 <4학년 보경이> <서울생활> <연애다큐>가 있었다.
= <꿈의 제인>에서 제인도 정호(이학주)를 계속 그리워했고….
- <길복순>과 <탈주>도 빼놓을 수 없다.
= 그렇지. <길복순>에서 (전)도연 선배를 정말 좋아했으니까. 내 캐릭터 안에는 언제나 멜로가 있었다. 마음의 노출도가 달랐을 뿐. 조금 신기하기는 하다. <반도>를 기점으로 장르적으로 또렷한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시기를 겪었고, 지금은 내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좀더 궁금해하는 시기 같거든. 작품 선택도 그런 식으로 하고 있다.
- 마치 한 사이클을 돌 듯하는 건가.
= 그건 아니다. 계획형 인간은 아니라서. (웃음) 그냥 그때그때 궁금한 것에 반응하는 게 아닐까? <만약에 우리> 촬영 후에는 배우이자 연출자로서 <너의 나라>를 찍었지만, 그다음으로 참여한 작품은 <군체>다. 늘 내가 궁금한 인물과 상황을 우선순위에 둘 뿐이다.
- <만약에 우리>는 무엇이 호기심을 자극했나.
= 멜로를 원래 좋아한다. 문가영 배우, 김도영 감독에 대한 팬심도 컸다. 여러 요소가 호기심을 키웠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는 내가 잘 아는 감정을 다룬다고 생각했다. 나만이 아닌, 대한민국 국민 모두, 어쩌면 전 세계인이 다 알고 있을 이 감정을 잘 표현해보고 싶었다.
- 그 보편성 내지는 전형성을 어떻게 다룰지가 관건이었다는 뜻일까.
= 그렇게 접근하지는 않았으나 흥미롭게도 장르를 불문하고 모든 영화에는 관객이 경험한 적 있는 감정이 들어 있다. <만약에 우리>가 주는 영화적 쾌감은 이별한 인연이 우연처럼 다시 만난다는 건데, 이것만큼은 대부분의 관객이 경험하지 못한 순간일 것이다. 그게 이 영화의 순기능이다. 재밌는 거짓말 하나를 해서 관객에게도 누군가와 잘 헤어질 수 있는 기적을 선물하니까.
- <만약에 우리>에서 비로소 한 연인의 만남과 헤어짐을 그리며 연애의 생애를 전부 통과한 소회는.
= 은호와 정원의 과거를 먼저 촬영했고, 흑백으로 된 현재를 나중에 촬영했다. 이 순서가 크게 도움이 되었다. 내가 진짜 은호를 체험하는 기분이었다. 비행기 안에서 정원을 마주할 때 전 회차의 추억이 파노라마처럼 스쳤다. (문)가영씨 도움도 정말 많이 받았다. 그는 프레임 안에서 항상 정원으로 존재하며 매 테이크 처음 연기하는 것처럼 에너지를 줬다. 멜로야말로 형사 버디물만큼이나 투톱 주인공의 호흡이 잘 맞아야 하는데, 은호가 등장하지 않는 신에서조차 정원의 시선에서 관객이 은호라는 캐릭터를 알아갈 수 있게 해줬다. 각자의 연기가 서로의 캐릭터를 만들어준 거다.
- 차기작에 배우로 캐스팅한 김도영 감독과의 작업은 어땠나.
= 감독님은 첫 테이크는 지켜보는 스타일이다. 리허설할 때도 배우가 편하게 느끼는 호흡과 동선을 기본에 둔다. 배우가 편하게 여기는 방법으로 감정을 잘 전달할 수 있다면 준비한 콘티나 앵글을 바꾸기도 한다. 그와 인간 대 인간으로 친밀해졌다고 느낄 때부터 서로 합이 더 잘 맞아들어갔고, 어느 순간 우리가 이 영화만을 위해 존재하는 프로젝트성 그룹이 아니라는 걸 느꼈다.
- 관객으로서 은호와 친해졌다고 느낀 시점은 그가 정원 앞에서 짝사랑에 빠진 사람 특유의 어색한 몸짓을 보여주는 와중에도 타고난 장난기 덕에 자주 능청스러워질 때부터였다. 술자리에서 홍합 껍데기를 씹어먹는다든지, 세차장에서 빙빙 돌며 거대한 수건을 짜낸다든지 할 때 말이다.
= 굉장한 슬랩스틱을 하려던 건 아니었다. 다들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다 고장날 때가 있지 않나. 거기에 많이들 공감해주신 것 같다. 특히나 은호 같은 인물은 관객과 친밀해져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감정에 너무 깊게 빠지기보다 유머를 장착하고 있기를 바랐다. 도영 감독님도 그렇게 디렉션을 주셨고.
- 은호와 정원의 대화만으로 이뤄진 현재 신에서도 마찬가지였나.
= 그때도 순간순간 은호의 과거 모습이 튀어나온다. 외형적으로는 변할 수 있어도 은호다움을 잊지 말자고 했다. 억지로 어른스럽게 굴면서 굉장한 시간이 흘렀다는 식으로 표현하지 않으려 했다.

- 은호가 어떤 시간을 살다가 이국에서 정원을 대면했을지는 염두에 뒀나.
= 그 서사를 의도적으로 궁금해하지 않았다. 영화도 거기에 포커스를 두지 않으니까. 물론 내가 알고 있는 은호에 관한 디테일한 정보들이 있지만, 공개하기 꺼려지기도 한다. 이 영화만큼은 관객이 그 공백을 채울 수 있게 말을 아끼는 태도를 유지하고 싶다. 모두의 은호, 모두의 정원이 될 수 있도록.
- 분명한 건 두 사람이 한때 서로를 사랑했기에 성장하고 휴식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최근 바쁜 와중에 보는 동안 푹 쉴 수 있게 해준 영화 한편을 꼽는다면.
=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가끔 꺼내 보는 영화 중 하난데, 엔타운이라는 가상 세계를 경험하는 일 자체가 너무 재밌다. 영화는 만든 이의 세계 안으로 보는 이를 들어가게 해주는 매체라는 걸 다시금 느꼈다. 오랜만에 이와이 슌지의 세계에 다녀온 것 자체로 힐링이었다.

“원래 내 작품을 보며 절대 안 운다. 일이라 생각하고 체크하며 보기 마련인데 이상하게 <만약에 우리>는 볼 때마다 항상 운다. 은호(구교환)가 정원(문가영)을 업고 계단을 오르고, 둘이 함께 돌탑을 쌓으며 소원을 빌고, 행복하게 지내는 순간들도 왠지 마음이 아리다.” 헤어진 연인의 우연한 재회로 시작하는 <만약에 우리>를 보면 문가영 배우의 눈물에 자연히 공감하게 된다. 그가 연기한 정원은 가족 없이 외롭게 자랐으나 은호를 만나 조금씩 변화한다. 현실의 벽에 부딪혀 포기했던 건축가의 꿈도 다시 꾸기 시작한다.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20대의 고단함과 천진한 웃음, 30대에 이르러 더 넓은 세상을 품게 된 정원의 얼굴을 배우 문가영만큼 그려낼 이가 또 있을까. 은호와 나눈 행복, 그 관계를 “자의로 포기하며 느꼈을 두려움”(문가영)까지 정원의 삶은 가장 개인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서사가 되어 우리 앞에 당도한다. 정원의 존재로 다시 한번 증명됐다. 배우 문가영의 로맨스는 실패하는 법이 없다.
- <커터> <두 번째 스물> 이후 9년 만의 영화 출연작이다. <만약에 우리>의 출연을 결심한 계기는.
= 첫째로 이야기가 좋았고, 그동안 꾸준히 로맨스를 해왔기 때문에 장르 면에서도 자신 있었다. 한 인물의 20대, 30대를 함께 펼쳐 보이는 동시에 정원의 감정의 파동이 커서 보여줄 연기의 스펙트럼이 넓은 작품이었다. 배우로서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사실 영화는 계속 하고 싶었다. 그런데 20대 초중반의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는 영화가 적다보니 맞는 작품을 찾기 어려웠다. 그러다 <사랑의 이해>가 끝났을 무렵 드라마를 좋게 보신 제작사에서 출연 제안을 주셨다. 내가 가장 먼저 작품에 합류했고 이후 김도영 감독님과 구교환 배우가 들어오면서 퍼즐이 완성된 기분이 들었다.
- 김도영 감독이 배우들이 가져온 인물 해석을 바라보는 재미가 있었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문가영 배우가 체화한 정원은 어떤 인물이었나.
= 정원은 계속 집을 찾아다니는 사람이다. 그러다 집과 다름없는 은호, 은호의 아버지를 만난 뒤로 안정을 찾는다. 차이가 잘 드러나길 바라서 초반부 정원의 톤을 거칠게 잡았다. 원래 거칠어 보이는 사람일수록 외로움이 크지 않나. 정원은 진한 스모키 메이크업을 한 채 담배를 피우며 등장한다. 잘 보면 몸 곳곳에 타투도 있는데 그동안 시도해보지 않은 컨셉이라 재밌었다. 나이별 말투도 달리했는데 20대 초반일 땐 목소리 톤도 높게 잡고 그 나이대 친구들이 자주 그러는 것처럼 말끝을 정확히 끝맺지 않았다. 그러다 지킬 게 많아지면서 정원은 성숙해진다. <만약에 우리>는 자유도가 높은 현장이었다. 그만큼 내가 채워갈 영역이 넓어 어디까지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이 많았다. 그런데 교환 오빠는 정말 자유롭게 곳곳을 누비더라. (웃음) 보면서 많이 배웠다. 지금까지 한 작품 중 동선, 대사, 표정, 눈빛 모든 면에서 가장 제약 없이 자유롭게 시도한 작품이었다.
- 은호가 자신에게 호감을 느낀 순간, 반대로 은호의 애정이 식은 순간을 언제 처음 정원이 알아차렸다고 생각하나.
= 은호가 자신을 좋아하는 건 처음부터 알았을 거다. 아마 모든 여성들이 그렇지 않을까. 말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게 있다. 개인적으로 은호의 감정이 식었다고 느낀 장면이 있다. 정원이 은호와 은호 아버지 식당을 가는 신인데 은호는 친구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문자를 하며 조금 앞서 걷는다. 거의 다 도착했을 때 은호가 정원의 짐을 들고 먼저 들어간다. 교환 오빠에게도 말하진 않았는데. 그 장면을 찍을 때 서러웠다. 은호의 무관심이 그대로 느껴져서다. 편집됐지만 내가 “은호야, 같이 가”라고 애드리브를 했는데 그 말을 하면서 눈가가 촉촉해졌다.
- 30대가 되어 재회했을 때 은호는 둘이 헤어진 이유를 되묻거나 만약 헤어지지 않았다면 어땠을지 상상해본다. 그에 대한 정원의 답변을 들으며 이미 둘의 관계에 관해 더 많은 생각을 해봤을 거라 짐작했다.
= 나 역시 정원이 훨씬 성숙하고 과거에 관해 더 많이 생각하고 정리한 입장이라고 봤다. 그래서 이제 와 은호가 말을 꺼내는 게 고통스러운 거다. “네가 선풍기 바람 혼자 쐐 헤어진 거잖아, 치사하게”라는 정원의 대사가 아팠다. 농담처럼 가볍게 던졌지만 말의 무게감이 남다르다.
- 인물의 감정을 세심하게 인지하는 것 같다. 감정선을 미리 상세히 분석하나. 아니면 현장에서 직접 부딪히며 느껴지는 대로 연기하길 선호하는지.
= 둘 다이긴 한데 현장에서 자유로우려면 사전에 완벽히 준비해야 한다. 어떤 대사, 표정이 어울릴지 최대한 다양한 예시를 수집하고 촬영 당일의 공간, 상대의 대사, 장면의 분위기 등에 맞춰나간다. 열심히 준비하는데 성격상 티를 내는 걸 좋아하진 않는다. 타고난 재능에 대한 열망과 동경이 있어서다. 예전엔 이런 말도 잘 안 했는데 서른이 되고부턴 질투가 나면 난다고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하게 됐다.
- 지난해 산문집 <파타(PATA)>를 펴냈다. 배우이자 작가로서 평소 ‘만약에’라는 질문을 많이 던지는 편인가.
= 그렇다. 과거의 선택이나 일에 관해 ‘그때 그랬다면’ 하며 괴로워하는 성격은 아니고, 일상의 작은 순간이나 글을 쓸 때 주로 ‘만약에’란 질문을 던진다.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은 아니다보니 뭔가를 만들어내는 게 정말 어렵다.
- 나중에 픽션을 써보고 싶은 마음도 있나.
= 물론이다! 사실 지금 쓰고 있는데, 어렵다. 소설은 호흡이 더 길고 산문과 달라 자꾸 막힌다. 그래도 조금씩 작업하고 있다.
- 연초 방영한 <그놈은 흑염룡>과 <서초동>, 영화 <만약에 우리>까지 연이어 작품이 공개됐고 9월엔 팬미팅도 진행했다. 숨 가쁘게 달려온 2025년을 돌아본다면.
= 감사할 만큼 꽉 찬 해였다. <만약에 우리> 촬영을 마무리한 지 일주일 만에 <그놈은 흑염룡>에 들어갔고, <그놈은 흑염룡>을 끝낸 지 이틀 만에 <서초동> 촬영을 시작했다. 일은 너무 재밌는데 체력이 받쳐주질 않아 집에 돌아와 혼자 울곤 했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 홍보를 시작한 지금, 기분이 너무 좋다. 다이어리에 쓰고 싶을 만큼. 오랜만의 영화이고 촬영 일정과 겹치지 않다보니 온전히 이 기분을 느끼며 관객과 만날 수 있어 그런가보다. 스스로에게 주는 연말 선물은 내 감정을 통제하지 않은 채 현재를 즐기는 것이다.
- 행복하게 한해를 마무리 짓는 요즘, 자주 듣는 곡을 추천해준다면.
= 류이치 사카모토의 <Merry Christmas Mr. Lawrence>. 마침 오늘이 크리스마스이기도 하니까. 정말 좋아해서 연말이 아니라도 가끔씩 꺼내 듣는다. 베트남 촬영 때도 이 음악과 함께했다. 어떤 의미에선 가장 중요한 신들이 남았기 때문에 마인드컨트롤이 필요했다. 대기 시간에 교환 오빠가 노래를 하나 추천해달라고 했는데 마침 그때 듣던 게 <Merry Christmas Mr. Lawrence>였다. 둘 다 이 노래를 듣고 강가에서 은호와 정원의 감정 신을 촬영했다.

https://naver.me/5M570tBL
https://naver.me/GvftJA6d
https://naver.me/x6xY4BX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