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증외상센터 보고 주지훈 필모를 찾아보는 중인데 말랑한 걸 보고 싶어서 키친부터 봤음. 불륜 소재에다가 스토리가 산으로 간다는 평을 봐서 큰 기대 안하고 봤는데 ((개인적))으로 결말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다고 영화 중간 부터 생각했고 무엇보다 영상미나 배우에게 설득이 돼서 스토리를 이해해보려고 과몰입해서 깊생함.....
영화 보고 나면 영화 평이나 비하인드 스토리 찾아봐야 하는 성격인데 예전 영화라 그런지 후기를 찾아볼 수가 없더라. 그래서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에서 주절주절 써보는 키친 후기.
모래와 양산
모래의 첫인상은 좋게 말하면 천진한 어린아이고 나쁘게 말하면 자아가 없는 사람. 남편이 뭐라고 하든 다 좋다고 하고 (상의도 없이 회사를 그만 두건, 갑자기 식당을 차리건, 동업자이자 멘토를 집안에 들이건 뭐든 남편 상인이 좋으면 모래 본인도 마냥 좋기만 한게 동등한 부부 관계 같지 않음) 남편 외의 인간 관계라고 하면 사진 작가인 언니 밖에 없는데 그마저도 남편과의 공통 지인임.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는데 남편 상인과의 관계는 지금은 말할 것도 없고 영화가 만들어진 십수년전에도 묘할 수 밖에 없음. 정확히 모래와 상인이 몇 살인지 알 수 없지만 배우 나이 차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여기에 상인이 잘나가는 증권맨이라는 설정도 고려하면) 최소 30대 중반과 20대 중반 정도? 10살은 차이 나보이는데 그런 나이 차이 나는 어린 애가 어릴 적부터 따라다녔고 주변에 여자라곤 혼자였고 모래 부모님의 존재는 찾아볼 수 조차 없고, 모래의 세상은 전부 상인이다? 그루밍…이 생각이 안날 수가 없는데 과거 이야기는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처리되었으니 좋은 쪽으로 해석을 해보려고 해도 여러 인물의 입에서 쎄한 대사들이 등장함. 형이라는 호칭도 그렇고, 꼬맹이 때부터 너만 바라봤다고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사진 작가나, 상인에게 형이니, 남매니 그런 소리도 듣는데 그게 괜찮냐는 두레, 모래에게 너 그거 사랑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두레 등.
최소한 모래에게 상인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남편 그 이상으로 부모 같은 보호자이고 새끼 오리의 낙인 수준으로 의지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음. 모래의 호오는 모두 상인에게 의탁했는데 모래의 직업은 양산 디자이너고 모래가 드물게 단호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우산 안 팔고 양산 만든다는 얘기임. 양산이 지금이야 보편화되었지만 그 시대에는 젊은 사람이 양산 쓰고 다니는 건 매우 드문 일이었고 역시나 단 하나 뿐인 손님도 우산으로 착각해서 양산을 사간 것이었음. 그런 상황에서 모래는 양산을 단 한시도 손에서 놓지 않음. 여기서 양산은 상인이나 상인의 보호인 것 처럼 보임.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햇볕(세상)으로부터 모래를 차단하려는.
그래서 처음 모래는 그냥 몸만 어른이지 성장하지 않은 애 같음. 상인에게 불륜을 털어놓고 (부부 사이의 솔직한 대화라기엔 처음으로 상인이 개입하지 않은 새로운 경험이 이상한 맛이라고 고백하고) 상인이 눈이 고양이 만큼 밝다는 (사실 이것도 두레가 한 말에서 시작이었지만) 뉘앙스의 말에 새삼스레 내가 섹시한가, 몸매도 좋잖아? 이런 모습들이 이제서야 이차 성징이 온 사춘기 같기도 함. 성장하려면 햇볕이 필요한데 모래는 양산으로 빛을 꼼꼼히 차단함. 심지어 휴관인 전시회에 몰래 들어왔다가 계단 뒤에 숨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햇볕에 어지럽다며 (온갖 부스럭 소리를 내면서) 양산을 꺼내드는데 양산(상인) 안에 들어온 두레와 모래의 모습은 이후에 상인의 집 안에서 같이 살게 되는 모습과 겹쳐지는 것 같기도 함. 결국 양산 밑에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키스를 하게되는 것과 집에서 상인의 의도와 달리 둘이 서로에게 끌리게 되는 것까지 결과가 비슷함. 급박한 상황에서도 꼭 붙들던 양산을 버려둔 채로 모래는 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두레 품에 안김.
(햇볕 외에도 성장에 필요한 비의 이미지도 등장하는데 비는 두레랑 많이 연관이 됨. 두레와 같이 시장 구경을 갔을 때에도 비가 조금 내리고 있었고 셋이 삼자대면하고 싸우는 씬에서는 아예 폭우가 내리는데 두번 다 비를 막기 위해 모래는 우산이 아니라던 양산을 쓰고 있음)
상인은 모래가 길치고, 도움이 없으면 시장 갔다가 돌아오지도 못하는 애 같다고 생각하는데 모래는 언제까지고 어린애가 아님. 산부인과를 가기 위해 씩씩하게 지하철도 타고 (그리고 이 때는 양산을 들고만 있고 쓰지 않음. 양산을 쓰지 않을 때가 몇 번 나오는데 그 순간들이 다 모래의 성장을 보여주는 장면이라는 것이 의미심장함. 예를 들면 마지막 바닷가씬.) 두레의 배의 흉터가 아플까봐 그림으로 커버업해주는, 남의 상처를 보듬을 줄도 아는 사람임. 이 장면에서 모래는 두레에게 사실상 이별을 고하고 내 사랑은 그냥 한상인이라는 사람 자체라고 고백하는데 두레가 누가 너를 변하게 할지 궁금하다고 함. 그 누가는 모래였음. 상인에게서 독립해서 스스로를 보듬을 수 있게 성장한 모래.
그래서 모래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떠날 수 밖에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게 되더라고. 아니 근데 모래만 썼는데 왜 이리 길어 두레랑 상인이도 남았는데 쓰기 시작한게 아까워서 계속 쓴다.
상인과 요리
상인은 잘나가던 증권맨이었지만 진정으로 좋아하는 요리를 하기 위해 퇴사를 할 만큼 요리에 진심이고 파리 유학했을 때 멘토로 삼은 두레를 집으로 모시기까지 하는데 사실 두레를 데려온 이유나 데려오고 나서 하는 행동들은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음. 파리 유학까지 해서 프렌치를 배웠는데 정작 오픈하는 레스토랑은 한식이고, 오픈 직전까지 프렌치 요리를 하는 두레에게 배우면서 투자자들에게는 서빙하지도 않을 샌드위치 레시피만 잔뜩 만들고. 프렌치를 접목한 모던 한식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새로움만 추구하고 요리에 마음을 담지 못한 모습을 평론가에게 바로 들킴.
영화 제목이 키친일 만큼 주인공들의 요리하는 모습이 많이 나오는데 상인은 레스토랑 메뉴 사진을 찍기 위해 모두를 초대해서 요리를 했을 때 외에는 딱히 모래에게 요리를 해주지 않는 모습을 보임. 오히려 결혼 1주년이라고 오프닝에서 모래가 상인을 위해 요리를 해줬고 (맛있냐고 물었지만 상인은 대답하지 않음), 셋이 삼자대면 후에 모래가 두레와 상인을 위한 요리를 해주면서 내 마음의 맛이 전달되었냐고 물음. 그리고 두레는 말할 것도 없이 주변 사람을 위한 요리를 함. 처음 집에 온 날, 다 같이 피크닉을 간 날, 그리고 모래의 임신을 축하하기 위한 파티도. 두레에게 요리는 마음이고 진심이고 그래서 상인이 레시피를 달달 외워서 간신히 따라가는 맛을 내는 것도 두레에게는 자연스러움. 1차 테스트에서 디저트 하나만 빼고 요리를 이해하려는 마음이 없다는 혹평을 받았는데 그 마지막 디시는 두레가 만든 것이었음.
그렇다면 상인은 왜 요리에 마음을 담지 못하는지? 상인은 자기기만에 빠져있음. 위에 쓴 모래와의 관계. 두레가 얘기한, 모래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보다 자신이 모래를 훨씬 더 좋아하고 모래가 자신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모래가 모르는 남자와의 불륜을, 진실을 고백하려고 할 때 그냥 덮어두자며 진실로 상처 덧나게 하지 말자고 함. 어쩌면 불륜 외에도 둘의 관계는 위태로웠을지 모름. 그것도 그대로 묻어두었을지 모르고. 받아들이지 못하면 그냥 그렇다고 말을 하라는 모래의 말이나 형 곁에 남거나 떠나는 건 모래의 선택이라고 형이 어떻게 할 수 있는게 아니라는 두레의 말을 보면 상인은 모래나 두레가 본인의 뜻대로 움직일거라고 생각했을 것 같음. 일반적으로 비슷한 또래의 남녀가 같은 집에서 사는데 둘이 친하게 지내라는 둥, 내가 없을 땐 모래랑 다니라는 둥 둘을 너무 믿는 걸 넘어서 내 친한 동생이자 내 아내의 역할을 벗어날리가 없다는 이상한 확신이 느껴짐. 초반에 모래와 두레의 텐션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이후에 상인이 화내는 욕실씬이나 초반이나 모래와 두레 텐션은 비슷하게 느껴졌음. 오히려 욕실씬은 모래가 두레에게 이별을 고했고 두레도 셋은 안된다고 혼잣말한 이후로 감정을 정리하는 그런 상황이었는데 뒤늦게서야 상인은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화를 냄) 깊은 속마음에서는 눈치를 챘다고 할지라도 그냥 진실을 묻어두고 싶어하는 것 같이 보임. 그리고 집에 모든 문을 떼버리고 이걸로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듯이 의기양양함 (여기에 문 떼버리는거 좋다는 모래. 나중에 모래가 문에 장식을 걸어주기까지 하는 것이 의미심장함. 상인이 끝까지 가지 않았으면 셋은 그렇게 살았을 것 같음).
그런 상인이 도저히 회피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하는데 모래의 임신임. 상인은 모래의 임신을 달가워하지 않는데 정황상 임신한 아이가 두레의 아이일 거란 의심 때문으로 보임. 여태까지 덮어두었던 모든 걸 마주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상인은 두레를 때리고 상처입히고 (형 아니라면 버림 받은 한국에 올 일도 없다는 애에게 여기는 아무도 몰라서 너 죽는다고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 거라니요.. 두레 길들여서 데려왔으면 길들임에 대한 책임을 져라..) 모래에게는 선택하라며 떠난다고 해도 받아들이겠다고 함.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냥 그렇게 말하라는 모래 대사를 보면 은근 모래가 떠나길 바라는 것 같이도 보임. 자기기만의 가면은 깨졌고 외면하던 진실을 마주했고, 모래는 떠나기 전에 마음이 담긴 따뜻한 요리를 상인에게 선물함. 이를 계기로 상인은 형식에 벗어나서 (요리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는 모래의 말, 그리고 1차 테스트에서는 코스요리였지만 2차 테스트에서는 한상 차림) 요리에 이해하려는 마음을 담을 수 있었음. 그리고 드디어 사랑하는 주변 사람들을 위한 음식을 함 (결혼식 케이터링).
그리고 마지막에 이혼한 모래에게 다시 돌아와라, 두레도 데려올거라고 하는데 (또 다른 자기 기만이었지. 삼자 대면 이후 운전을 못해서 비맞고 걸어가는 두레를 데리고 갈 정도로 상인 본인도 두레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한채 두레에게도 본인에게도 상처를 입혔으니까) 과연 상인은 진정한 자기 자신의 마음을 이해한 것일지 개인적으로는 의심이 드는 결말이었음. 그래서 모래도 안 받아줬을 것 같다는 상상을 하게됨. 적어도 당분간만이라도. 모래는 상인이 없어야만 성장하니까. 상인은 모래와의 관계가 크리피하게 느껴진 탓에 야구, 어머니나 두레와의 관계 등 해석(혹은 선해)할 여지가 많은 인물임에도 여기서 더 깊생을 하지 못함.. ㅎㅎ
아니 이거 어디까지 길어질거임. 과몰입 레전드네. 그래도 두레 얘기는 짧게라도 해야함. 두레 때문에 영화를 보게 되었으니까.
봉합되지 않은 상처 두레
모래의 성장이나 상인의 깨달음 등에 비하면 두레는 변화가 크지 않은 인물이라 인물보다는 비유나 상징처럼 느껴짐. 말그대로 진실의 입에 거리낌 없이 손을 넣는 박두레(진실을 외면하는 상인이 대문에 진실의 입 장식을 해둔것도 ㅎㅎ). 초반에는 모래와 상인이 외면하고 싶은 달콤한 진실이었고 어린왕자처럼 중요한 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중반부의 두레는 모래나 상인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길들여진 여우였고 마지막에는 상처. 상인이 아니였으면 오지도 않았을 입양 보내진 나라에서 다시 한번 버려져서 돌아가는 두레. 모래가 그려준 그림은 지워졌겠고 수술 흉터는 다시 벌어지겠지. 모래나 상인과 달리 두레가 과연 아물 수 있을까? 젊은 날의 상처가 두레의 엽서처럼 언젠가 그리워지는 날이 올 수도 있겠지만 엽서 속 시소는 둘이서 하는 것. 셋은 하지 않겠다던 두레의 자리는 없을 것 같음. 개봉 시기에 보았으면 당시 익숙한 배우 얼굴 덕분에 상처가 중화되었겠지만 십수년이 지난 후에야 보니 영화 속 배우가 지금과 마치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탓에 내게 두레는 그냥 그 어린 시절에 박제되어버림. 두레는 그냥 두레야. 그래서 영원히 봉합되지 않는 상처일 것 같아.
결론은 기대했던 것보다 만족스러운 영화였다. 영상미나 그런건 말할 것도 없이 좋았음. 뇌절인 후기를 혹시 읽은 사람이 있다면 고맙고 키친 어떻게 봤는지 궁금해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