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나 지금 공항. 지욱이가 같이 왔어"
[걔가 거기까지 왜?]
"아니이. 안우재 와이프가 공항 버스타는 것까지 지켜봐가지고."
[걔는 왠 오지랖이야.]
"내 업보지 뭐."
전화 통화를 하며 대기실로 향하던 해영의 걸음이 지욱을 발견하는 순간 멈췄다. 지욱은 한 가족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하하호호 웃으며 선물을 이야기하는 가족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그걸 바라보는 지욱의 모습은 퍽 쓸쓸해보였고, 그걸 보는 해영은 안타까움에 입이 썼다. 해영은 아무렇지 않은 척 지욱에 옆으로 가 앉았다.
"다했다~"
해영의 목소리에 지욱의 고개가 해영 쪽으로 돌아갔다.
"편 is free~ 이제 가도 돼. 뭐 어떻게, 온 김에 신행도 같이 갈래?"
해영의 너스레에 지욱이 픽 웃었고, 해영도 따라 웃었다.
"휴가.. 어머니하고 보낼 줄 알았어요."
해영의 입가에 웃음이 사라졌다. 지욱에게 향했던 시선을 거두며, 해영이 말했다.
"나 엄마랑 그렇게 안 친해.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고."
"아, 안 친해? 안 좋아한다고? 어머닐?"
"응"
예상치 못한 답변에 놀란 지욱의 입에서 반말이 튀어나왔지만, 해영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어떻게 은옥 엄마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지? 지욱은 햇살같이 따스하고 살갑던 은옥을 떠올리며, 이번 가짜 결혼식의 또다른 목적을 언급했다.
"가짜 결혼식 어머니 위해 한 거였잖아요. 사랑하니까."
"사랑은 하지. 근데.. 좋아해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것처럼, 사랑해도 좋아하지 않을 수 있는 거잖아."
엄마니까, 가족이니까. 그래서 사랑은 하지만.. 그 뿐이라는 뜻이 담긴 말을 덤덤하게 뱉는 해영의 얼굴이 퍽 쓸쓸해보였다. 마치 담배와 겨루던 어린 지욱의 모습처럼. 왜 저런 생각을 했을까. 무엇이 손님을 서운하게 했을까. 고민하던 지욱이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이, 서운해서 그런 거예요? 어머니가 손님 기억못해서, 아, 그건 병 때문에~"
"우리 엄마 원래 그랬어."
"원래?"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해영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관심 줄 데, 신경쓸 데가 많아서, 난 늘 기억 안나는 애. 까먹은 애. 그래도 괜찮은 애. 왜냐? 친딸이니까"
순간적으로 자신을 따스히 안아주며, 더없는 애정을 베풀던 은옥의 모습이 떠올랐다. 해영이 말하던 관심 줄 데, 신경쓸 데였던 지욱. 어쩌면 자신은 해영에게 돌아가야했을 애정과 관심을 갈취한 것이었을까. 한편으로 지욱은 조심스레, 진심으로 미안해하며 해영에게 자신이 은옥의 위탁아임을 들키지 말아줄 것을 당부하던 은옥의 모습을 떠올렸다.
'지욱이 비밀 잘 지키니?'
왜 그토록 은옥이 자신의 존재를 해영에게 숨기려 들었는 지, 이제는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해영에게, 지욱의 존재는 상처가 되기 충분했으니까. 지욱의 표정이 조금씩 어두워졌다.
"헐, 나야말로 까먹을 뻔 했다. 이거, 알바비"
그 때 해영이 호들갑을 떨며 제법 두툼한 봉투를 지욱에게 내밀었다. 알바비?
"애기 임보해 주기로 했잖아요"
"노동력의 대가는 무조건 돈이야~ 돈으로 받아. 네가 여기까지 와준 것처럼 나도 임보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해영은 세상물정 모르는 애에게 한 수 가르쳐준다는 듯이, 충고까지 하면서 지욱에게 알바비를 받을 것을 종용했다.
"됐어요."
엄마를 위한 결혼인데, 사실은 아무것도 받지 않고 할 수도 있었던 일이라, 지욱은 거절하려 했다. 그러나 해영은 아랑곳하지않고 억지로 지욱의 주머니에 봉투를 쑤셔넣었다.
"최저시급에서 아주 조금만 더 넣었어. 딱, 캐나다 항공권 살 정도로만"
"누가 캐나다에 간대? 캐나다 오라는 소리 듣기 싫어서 결혼한 건데."
"가고 싶어서 듣기 싫은 건 아니고?"
말이 전혀 안 통하네. 진짜 그런 거 아닌데. 지욱은 한숨을 푹 쉬고 이별을 고했다.
"갈게요. 여행, 잘 다녀와요."
"남편!"
채 한 걸음 떼기도 전에 등 뒤에서 들리는 말에 지욱이 멈춰서 돌아섰다.
"할머니는 손자보다 딸이 우선이었지만, 나는 내 남편이 우선이야. 오로지 내 남편을 위해서 말하는 거야, 난. 남편이 가고 싶은 데 가고, 남편이 보고싶은 사람 만나고, 남편이 살고 싶은 대로 살아."
어제 내가 한 말이 마음에 걸렸었나. 그런데 그보다,
"왜 자꾸, 남편이라고 불러?"
우리의 계약은 결혼식까지였잖아. 결혼식이 끝난 지금은, 이제 아무것도 아니고. 의아해하는 지욱에게 해영이 반지낀 손을 흔들며 말했다.
"우리 아직, 가족이야!"
당신은 내가 누군지 모르면서, 그저 식이나 같이 올린 가짜신랑에게, 그 잠깐의 인연만으로도 내게, 그렇게 말해주는 구나. 지욱은 자신도 모르게 픽 웃어버렸다. 그리고 결심했다.
한순간이나마 자신을 가족으로 생각하고, 가장 아픈 손가락으로 생각해준 해영이 상처받지 않게 하기 위해, 도망치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