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 회사도 그만뒀어. 나 이제 백수야.”
지금..지금 방금 니가
결혼식 한 달 앞두고 파혼 선고를 한 이 타이밍에?
이건 불난데 기름을 붓는 정도가 아니라
볏짚을 온몸에 두르고 뛰어드는 거 아닌가?
손수건을 쥔 미숙 이모의 손이 순간정지화면처럼 멈추고,
옆에서 근식 아저씨가 한숨과 함께 공기가 빠진 바람인형처럼 미끄러져 쓰러진다.
온갖 야단법석이 벌어지는 가운데, 석류와 이모 사이가 잠시 정적에 빠졌다.
위험하다.
태풍이 올 것이다!
“..어머 이 개도 안 물어갈 년을…파혼도 모자라 회사를 관둬! 오 미친년!”
대파보다도 한층 그 맵기를 더한, 이모의 손바닥 공격!
하지만 이모의 공격이 적중하는 곳은 내 뒤에 숨은 표적 배석류가 아닌 내 온 몸이다.
아니 어떻게 된게 대파보다 더 매워!
“야, 튀어 튀어 튀어!!”
그 애가 냅다 내 손을 잡아끌고 뛴다.
“튈 거면 너 혼자 튈 것이지 왜 날 데리고 튀어!”
“처맞는 거 구제해 줬더니 고마운 줄도 모르고”
구…구제?
“와, 내가 누구 때문에 대파로 채찍질을 당했는데! 너 이제 어쩔 거야!”
“그냥 술래잡기다 생각해. 잡히면 죽는 거야.
그렇게 둘이 숨차게 길을 달려나가며,
나는 문득, 어릴 적의 우리를 떠올린다.
이 길은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술래가 하나, 둘, 셋을 세는 동안
앵두같은 입술의 그 애는 내 손을 다부지게 잡고 앞서 달렸다.
그 무렵 내 손과 엇비슷한 크기였던 너의 손은
이제는 내 한 손에 쏙 들어온다.
두꺼운 옷을 잔뜩 껴입은 너의 뜀박질이 조금씩 느려지고,
이모의 목소리가 우리 뒤를 바짝 쫓아오기 시작하자,
나는 너의 손을 힘껏 잡고,
어린 시절의 너를 뛰어넘어 앞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한다.
이 밤중에 대파로 채찍질을 당하고,
야밤에 생각지도 못한 질주를 하고,
너랑 얽히면 꼭 이런 부산한 일들이 일어나는데,
왜 내 입가에는 이럴 때면 미소가 물리는지는 나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