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벅꾸벅 조는 머리를 따라 동그랗게 올려 묶은 머리카락이 흔들린다.
달랑달랑, 어쩐지 그 모양까지 주인을 닮아 귀여운 건지 선재는 저도 모르게 따라 끄덕이며 웃었다.
"볼 때마다 졸고 있네."
오늘은 아주 운이 좋았다.
부서진 어깨는 오늘따라 아파왔으며 선수가 아닌 학생으로 다니는 학교생활은 여전히 적응이 어려웠지만, 하교하는 솔과 만났으니.
볼 때마다 자고 있는 통에 감겨 있는 속눈썹은 한 올까지도 외울 지경이었다.
[백인혁]
갑자기 울린 벨소리에 솔이 깰까 얼른 받은 선재가 목소리를 낮췄다.
"어."
- 야, 아직도 못 깨웠냐?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냥 같이 가. 너도 정류장 지나친 척하고 사이좋게 돌아오면 되겠네. 이번 기회에 말도 좀 걸고, 이 답답아.
"야, 끊어. 깨워야겠어."
전화를 끊은 선재가 창밖을 확인했다, 슬슬 어두운데.
이제 내릴까? 아니다, 조금만 더 자게 두 자.
저수지 인근에서 같이 내릴까 하던 계획을 접고 가방을 안은 그가 다시금 달랑이는 머리카락에 시선을 고정했다.
저렇게 잘 자는데. 조금만 더.
논밭과 저수지 인근을 지나자 새카맣게 불이 꺼진 버스들이 가득한 종점이 보였다. 역시, 막차 끊겼구나.
"학생들! 종점이야, 내려!"
"아, 네!"
벌떡 일어서서 큰마음을 먹고 손을 내밀어 봤지만 떨리는 손가락은 옷자락 끝만 살짝 스치고 지날 뿐이었다.
"그, 저기. 일어나야 되는데."
속삭이는 목소리도 자세히 듣지 않으면 들리지도 않을 터였다.
다시 한번 톡, 톡. 닿은 게 느껴지기나 할까? 두드린 팔은 아무 답이 없다.
입술을 앙다문 선재가 용기를 내어 조금 더 세게 두드렸다. 톡-톡-
"저기."
아이고. 그 꼴을 보다 못한 기사님이 성큼성큼 걸어와 선재의 어깨를 툭 쳤다.
"학생, 그게 깨우는 거야? 자장자장 아주 더 자라고 재우네."
"아."
머쓱해져 목덜미를 주무르는 선재의 옆에서 대화 소리에 천천히 눈을 뜬 솔이 눈꺼풀을 깜박였다.
버스 안…, 버스!?
"아저씨, 여기 어디예요?"
"어디긴 어디야, 학생이 자다가 종점 온 거지. 이 학생이랑. 둘 다 내려, 얼른."
비몽사몽한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어어? 종점? 빠르게 가방을 챙긴 솔이 버스를 잽싸게 내리다 말고 고개를 휙 돌렸다.
쟤도 잤나 봐, 어색하게 서서 애꿎은 입술만 물어대는 길쭉한 남자애.
보아하니 자감고 교복이네, 어휴 쟤나 나나.
"넌 안 내려?"
"어? 어! 내려!"
퍼뜩 놀라 대답한 선재가 가방을 들어 올리자 촤르륵- 열린 가방 지퍼 사이로 펜 떨어지는 소리가 조용한 버스 안을 가득 메웠다.
훕. 작게 새어 나온 웃음소리가 곧 깔깔대는 웃음소리로 바뀌고 빨개진 귀로 펜을 줍던 선재가 멍하게 웃는 솔을 보았다.
아, 그때 그 얼굴과 똑같다.
"야아, 다 주웠으면 내려."
"어! 어어."
따라 내린 선재가 어색하게 솔의 뒤를 걸어왔다.
이제 차가워진 가을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둘을 휘감고 지났다.
저 멀리 버스 회사의 컨테이너 하나만 불이 켜져 있는 어두운 공간에서 어색하게 선 선재에게 솔이 사탕을 내밀었다.
"자, 먹어."
박하사탕, 진짜 좋아하나 보네. 사탕을 문 볼이 언뜻 보기에도 볼록하다. 진짜 귀, 아니.
"여기는 뭐라고 해야 택시가 오려나? 근데 너 몇 살이야? 어디 살아?"
"나 열아홉…살. 너네 앞 집 사는데."
"동갑이네! 우리 앞 집? 거기 배씨 아저씨넨데? 아저씨 이사 가셨나? 너 언제 이사 왔어? 난 왜 못 봤지? 너 나 본 적 있어?"
"아, 그, 봄에. 택시, 내가 부를게."
본 적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차마 첫사랑이 너라고 말하지 못한 선재가 어색하게 말을 돌렸다.
- 아, 거기까지 가려면 30분은 걸려요.
"네, 알겠습니다."
"오신대?"
"응, 30분 정도 뒤에."
아, 그렇구나. 으, 좀 춥다. 쫑알쫑알 말하던 솔이 팔을 슥슥 문질렀다. 감기 걸릴 것 같은데.
"난 좀 더운데."
"덥다고? 안 추워?"
"어어, 와, 덥다. 아직 여름인가? 왜 이렇게 덥지? 이, 이거 입을래?"
셔츠를 벗은 선재가 솔 쪽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셔츠만 슥 내밀었다.
어색하게 서서 키만큼 길쭉한 팔만 뻗은 걸 보니 조금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입술을 삐죽 내민 솔이 셔츠를 받아 들어 걸쳤다, 따끈따끈하기도 하네.
앞집이라고 하니까 언젠가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난 임솔! 넌 이름이 뭐야?"
"류, 선재."
"류선재? 류선재…….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좀! 흔한! 흔한 이름이라 그래."
"그건 아닌데…. 너 공부 잘해? 이번 모의고사 진짜 공부 하나도 못했어, 어떡해? 망했어, 진짜."
"나는 체육 특기라서, 최저만 맞추면 돼. 어디 쓸 건데?"
"체육? 우리 오빠 체교관데! 좋겠다, 상 받고 막 그랬어? 부러워. 가고 싶기야 한국대 가고 싶지! 근데 아무래도 성적이 거기까진 안될 거 같구 욕심내면 연서대 정도?"
"아, 연서대……."
일단 집에 가면 연서대도 찾아봐야겠다. 머릿속의 후보 학교 top3를 거침없이 지워버린 선재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어? 택시 왔다!"
30분은 걸린다고 했으면서. 15분 만에 와버렸다.
저도 모르게 비죽 튀어나오는 입술을 수납한 선재가 문을 열어 솔을 먼저 태웠다, 춥다고 했으니까 다행일지도.
"학교는 보통 몇 시에 가? 혹시 너 나 버스에서 본 적 있어?"
"그, 7시 20분쯤."
"나도 그런데!"
"훈련 있을 때는 더 빨리 갔었는데 이제 훈련이 없어서."
어쩐지 목소리가 서글퍼진 것 같아 솔이 선재의 표정을 슬쩍 바라보았다. 괜찮은가?
특기생으로 내세울 만한 상도 있는데 훈련이 이 시기에 없으면 부상인가 보다.
제 오빠의 경우를 봐왔던 솔이 어림짐작으로 답을 맞히곤 말을 돌렸다.
"그럼 내일 나랑 같이 버스 탈래?"
"어!?"
"응? 왜? 싫어?"
"아니, 당연히 좋지. 내가 왜?"
"어?"
"아, 그, 학교, 학교 갈 때 심심하니까."
화끈화끈 올라오는 귀를 슬쩍 가리고 새어 나오는 웃음을 옆으로 숨겼다.
"아저씨, 요기요기 세워주시면 돼요."
"감사합니다."
"내가 낼게!"
"내일, 네가 버스비 내주면 되겠네."
그래, 그거야 내가 내주면 되지만.
어쩐지 미안해진 솔이 맑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선재에게 마주 손을 흔들었다. 그래, 뭐.
"그래! 잘 들어가, 내일 보자."
"응."
타박타박 계단을 오르는 솔의 뒷모습을 가만 보던 선재가 뒤돌아 제 가슴에 손을 대었다.
전국체전에서 금메달 따는 날에도 이 정도까지 심장이 뛰진 않았는데, 아니, 그 어떤 힘든 훈련에도 이 정도까지 빠르게 뛴 적은 없는 것 같다.
너무 빨리 뛰어서 온몸을 팽글팽글 심장이 돌고 있는 것만 같은 이 기분.
내일, 꼭 일찍 일어나야지.
가슴을 꾹꾹 누른 선재가 기분 좋게 대문을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