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의 첫 만남이 생각난다.
20대의 순수한 청년에서 강렬한 눈빛의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이 친구에겐 특별한 뭔가가 있구나!' 촬영을 거듭할 수록 나 뿐만 아니라 스태프들 모두가 한 번쯤은 그에게 놀라워했다. 김수현은 외모도 훌륭하지만, 난 그의 작품에 대한 열정을 얘기하고 싶다.
김수현은 진짜 멋진 역할을 볼 줄 아는 배우다.
연기의 기본기를 갖췄으며, 경험이 쌓여야만 가능한 캐릭터에 대한 통찰력과 이를 표현하는 능력을 갖췄다. 또 아이처럼 놀다가 갑자기 집중력을 뿜어낼 줄도 안다. 이는 재능과 노력이 함께한 덕분일 거다.
그의 시나리오는 금방 너덜너덜하고 지저분해진다.
이 배우는 사라질 별이 아니라 오래도록 빛날 별이 되리라.
김수현이 혼자 캐릭터 노트를 썼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페이지마다 꽉꽉 찬 분석 노트가 있어서 캐릭터를 현미경처럼 분석하더라.
류환이라는 인물을 수십 갈래로 분석해 메모해 놓은 것이었다. 현미경으로 세포를 보듯이 그 캐릭터에 어떤 성분이 있는지 깨알같이 파악하려고 하더라.
분석만 하고 표현을 못하면 소용이 없는데 표현까지 잘 하니까. 촬영하러 가면 '오늘은 뭘 볼 수 있을까' 기대가 될 정도였다. 그걸 보니 단순히 운이 좋아서 지금 자리에 오른 배우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처음 준비하는 과정에서 김수현에게 많이 놀랐다. 이미 원작이 있고, 바보 하면 굉장히 단순한 인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김수현은 동구 역할을 하기 위해서 머리에 써야 하는 가발의 모양, 질감, 머리 숱의 정도 등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썼다. 동구가 입은 녹색 추리닝도 어떤 느낌의 녹색이 가장 잘 어울리는지, 수 많은 녹색 츄리닝 중에서 이 영화에 가장 잘 맞는 녹색이 뭔지, 세세하게 설정하고 들어가려고 했다.
이런 것뿐만 아니라 연기와 표정 하나하나 세밀하게 관찰하고 분석하고 어떤 것들을 조합하면 좋은지 너무나 많은 연구를 하고 있는 게 굉장히 놀라웠다.
그러다 보니 김수현 본인이 생각한 대로 연기가 안 나올 때는 굉장히 괴로워했다. 겨울에 비 맞는 장면을 촬영할 때였는데, 눈에 빗방울이 떨어지면 눈을 깜빡거릴 수밖에 없다. 눈을 계속 뜨고 있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괴로워하고 미안해 했다. 그럴 정도로 열정적인 친구다.
'노상 방변' 하는 장면은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준비를 많이 했다. 2분이 넘는 동영상도 미리 찍어와서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얘기도 나눴다. 김수현은 말리기 힘들 정도로 에너지가 넘친다.
촬영하면서 느꼈지만 수현이는 참 얼굴이 깨끗하다. 하얀 도화지 같다. 빨간색을 칠하면 빨갛게, 파란색을 칠하면 파랗게 물든다. 어떤 색을 주문해도 제 색을 내는 배우다.
촬영 와중에 날씨가 너무 추워서 촬영을 못하고 김수현도 한 4박5일 태국으로 CF를 찍으러 갔다 온 일이 있었다. 돌아와서는 한다는 이야기가, 며칠 떠나 있었더니 불안하다고 하는 거다. 그 떨리는 눈빛이, 큰 작품을 잘 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남다르게 느껴졌다. 이상하게 그 배우가 멋있어 보였다.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게 뭔지,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고. 되게 머리가 좋다.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남들과 다른 지점에 서려고 하는 의욕도 크고, 적당히 만족하진 않더라. 스스로 채찍질 하면서 가는 걸 보면 앞으로도 잘 할 것 같다.
비 맞으며 액션하는 신을 열흘 넘게 찍었다.
겨울에 그냥 있어도 추운데 비까지 맞았으니 얼마나 춥겠나.
그런 와중에 수현이가 제안을 하나 하더라.
멋진 슈트를 차려입고 비를 맞으며 감정연기를 하는 거였는데, 슈트의 재킷을 벗고 와이셔츠만 입고 더욱 극적으로 만들자는 거다. 나야, 냅다 물었지(웃음).
영화를 보면 배우들이 육체적인 고통을 견디고 찍은 장면들이 의외의 감동을 줄 때가 있는데 바로 이 장면이 그런 경우다. 수현이 같은 배우들에겐 경외심이 생긴다.
판에 박힌 틀 안에서만 움직이는 게 아니라 벗어나려고, 뛰어나가려고 하는 모습이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스스로를 굉장히 다그친다. 첫 주연을 하면서 그렇게 영화를 끌고가는 역량은 아무나 갖고 있는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