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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퀘어 런온 트랙 바깥을 비추는 방법-<Run on 런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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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5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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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종영한 Jtbc 드라마 <Run on 런 온>의 오프닝 타이틀은 육상 경기가 이루어지는 트랙 위에 드라마 제목을 의미하는 영어와 한글이 차례로 일어서는 이미지에서 시작한다. 국가대표 육상 선수인 기선겸(임시완 역)과 외화 번역가인 오미주(신세경 역)의 만남을 담은 간결하고 인상적인 그림이다. 직업만 놓고 봐서는 인생에서 만날 일이 별로 없을 듯한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나서 서로의 언어로 소통을 시작하는 이야기. 여기까지만 봐서는 흔한 로맨스가 예상된다. 눈이 환해지게 예쁜 배우들과 달콤한 대사들, 외적인 시련을 극복하고 돈독해지는 사랑의 서사도 빠지면 섭섭하다. 드라마는 자기 욕망에 따라 자신을 위하며 사는 방법을 모르고 살아온 선겸이 오직 자기 자신만 믿고 열심히 살아온 미주를 만나 진짜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로맨스의 안정된 구조를 따라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이러한 로맨스를 지탱시키는, 각자 자기 세계의 궤도를 이탈하지 않으려고 고군분투하는 이야기 쪽으로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나는 달리지 않는 걸 선택했다”

국회의원 아버지, 국민배우 어머니, 세계적인 골프선수 누나를 가진 선겸은 늘 2등만 하는 선수다. 그는 어깨 부상으로 달리기로 종목을 바꾸고 1등을 바라보며 뛰다 보니 꾸준히 2등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도 1등 하고 싶어. 그냥 조용히 원하는 것 뿐이지"이라는 말은 남들과 드러내서 경쟁하기 보다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는 선겸의 성격을 잘 드러낸다. 달리기를 왜 하는지 확실히 답할 수 없지만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일어나 뛰는 몸이 된 그는 후배 선수의 폭행 사건을 알게 된 뒤로 참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3화 마지막에 그 결심을 보여주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출발 신호가 울린 후에도 선겸은 움직이지 않는다. 부정 출발은 아니지만 경기를 마치지 못한 채로 트랙에서 이탈한 것이다. 그는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지자 “못 뛰겠어서요.”라고 답한다. 그는 이 일을 계기로 국가대표가 아닌 삶을 살기로 한다. 달리기를 좋아하지만, 꼭 트랙 위에서 뛰어야만 그 마음이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기선겸이 트랙을 벗어나는 이 시퀀스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출발 신호가 울리고 달려나온 선수들 중에 가장 먼저 도착하는 선수가 이기는 방식으로만 경기가 진행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 기선겸은 경기의 룰을 어기지 않으면서도 달리지 않을 것을 선택함으로써 인생이라는 경기의 다른 진행 방식을 보여준다. 당연하게도 트랙을 벗어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제와는 다른 삶이 예고될 뿐이다.

처음 극장에서 본 영화에 어떤 대사가 있었는데 그게 엄청 위로가 됐거든요. 근데 자막이 없으면 그게 내가 무슨 말인지 몰랐을 거잖아요, 그렇죠? 그렇게 ‘말과 말 사이에 다리를 놔 주는 저 사람은 누굴까’ ‘아, 나도 저런거 하고 싶다 참 좋겠다’ 이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더라고요. 그래서 죽어라고 열심히 하다보니깐 진짜 이렇게 됐네?

영화가 다 끝나고 가장 마지막에 자막 타이틀이 올라가는 번역가인 오미주는 지금 트랙 위를 열심히 달리고 있지만, 당차게 속엣말을 다 하고 살기까지 힘든 세월을 보냈다. “죽어라고 열심히 하다보니깐 진짜 이렇게 됐네?”라는 말이 툭 튀어나오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은 오미주의 작업실을 보면 알 수 있다. 어지럽게 널려 있는 책과 자료들 포스트잇과 메모지, 듀얼 모니터와 기계식 키보드까지. 드라마는 오미주가 영화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또 어떻게 삶 그 자체가 되었는지를 디테일하게 묘사한다. 드라마 곳곳에 배치된 영화의 대사들과 오마주된 장면들만 봐도 그렇다. <베트맨 비긴즈>의 대사와 카페에서 번역하고 있던 <캐롤>의 대본, 상상 장면에서 나온 <카사블랑카>, <내 머릿속의 지우개>, <달콤한 인생>, 또 임시완의 전작인 <불한당> 패러디와 007시리즈까지 영화팬이라면 바로 떠올릴 수 있는 대사와 장면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8화에서 현장 통역으로 일하다 벌어진 에피소드에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촬영감독에게 통역 시간을 요청하는 장면은 오미주가 그간 어떤 일을 하며 경력을 쌓았는지를 잘 보여준다.

<Run on 런 온>의 로맨스가 기존의 드라마와 다른 점은 주인공이 자신의 감정을 모르고 상대방에게 감정적 책임을 떠넘긴다거나, 자기의 일을 등한시하면서 상대방에게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미주와 기선겸 뿐만 아니라 서단아(최수영 역)와 이영화(강태오 역)의 로맨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자기 감정에 충실하고 그 감정이 자신의 일과 사회적인 관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고려한다. 그들은 서로의 언어가 다름을 인지하고 마치 번역의 단계를 거치듯 서로의 언어체계를 고려하는 과정에 뛰어든다. 영화에 전혀 관심이 없는 기선겸이 검색을 통해 ‘존 윅’을 알아내고 그림을 미술관에 거는 결과물로 취급하던 서단아가 그림을 그리는 과정 자체에 동참하는 일을 드라마는 섬세하게 담아낸다. 사랑 때문에 무언가를 포기하거나 잃는 ‘희생’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발견하게 되는 의미가 이들의 사랑을 진행형으로 보이게 만든다.



허들을 넘어 함께 달리기 위해

메인 플롯은 아니지만, <Run on 런 온>이 기존의 관습이나 편견을 불편하지 않은 방식으로 넘어서는 방식도 인상적이다. 계급차를 인지하면서도 관계를 불평등하게 만드는 장애물로 받아들이지 않는 점이나 성별과 나이에 따른 고정관념도 크게 의식하지 않는 등, 불편하지 않게 다양한 삶의 모습을 골고루 비춘다. 축구선수가 되고 싶었던 단아가 운동화를 고집하는 이유나 여자 고등학생인 예찬이 복싱을 포기하지 않는 장면 등은 고정된 젠더 역할을 부드럽게 넘는다. ‘한국 영화계에서 최초로 사람 가죽 벗기는 연기를 한 배우’로 나오는 육지우(차화연 역)는 자신이 엄마 역할에 소홀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고 “내가 애들 교육에 매진했으면 칸의 여왕 됐을까 신사임당 됐지.”라고 일갈한다.

단아: 미안해요.

예준: 네?

단아: 그때 내가 했던 짓거리가 좀 무례했던 것 같아서. 남의 감정을 막 그렇게 묻고 그러면 안 됐던 건데.

예준: 좋아해요. 물어준 사람이 처음이라 사실 대답하고 싶었어요. 그때. 말 한마디면 되는 건데

단아: 나 사실 결혼하기 싫어서 집에다가 가짜 커밍아웃 했어요. 누군가에겐 일생일대의 굴레였을 텐데 나는 그거 핑계로 삼았어서. 미안합니다.



이영화의 오랜 친구인 고예준(김동영 역)과 관련된 에피소드 역시 자연스럽게 극 속에 녹아든다. 기독교인으로서 성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로 괴로웠을 예준의 삶이 적극적으로 묘사되지는 않았지만 그가 우리의 친구이자 이웃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드라마는 꽤 섬세하게 환기시키고 있다.

인생은 트랙 위를 달리는 경주가 아니지만, 저만큼 뛰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따라 나도 모르게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달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1화에서 늦은 약속 때문에 전력 질주를 했던 기선겸이 오미주의 전화를 받고 가던 길을 되돌아 뛰어오는 장면이 있다. 아까보다 늦게 뛰는 것 같다는 미주의 말에 선겸은 “너무 빠르면 또 스쳐 지나갈까봐.”라고 말한다. 이 가벼운 대사도 놓치기가 아쉬운 드라마였다. 달리는 동안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트랙 바깥에 있는 삶에도 문득 햇살이 비치고 그림자가 진다. 어쩌면 트랙이 가짜고 허상인지도 모르겠다.


링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14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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