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이 저마다의 색을 찾아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아음은 가만히 눈을 감고 형형색색 숲의 향기를 호흡하였다. 중심을 잃고 넘어질 새라 가만히 다가온 이연이 아음의 둥근 어깨를 살포시 잡아주었다. 눈을 뜨자 아음의 앞에 가을볕을 등지고 서서 음영 진 이연의 얼굴이 가득 들어찼다.
“여름이 좋다 했던 게 달포 전이었던가. 헌데 이젠 또 가을에 취한 것이냐.”
“여름이 좋다 하였지 다른 날들이 좋지 않다고는 하지 아니 하였다.”
“어련하시려고. 그럼 또 말해 봐. 여름은 왜 좋은지. 가을은 왜 또 좋은지.”
“여름은 바람결에 무성한 나뭇잎들이 사부작사부작 흔들리는 소리들이 좋고, 풀벌레 울음소리가 좋고, 어린애들의 멱 감는 소리가 좋고, 낮이 길어 좋다면, 음, 가을은 산천이 알록달록하여 좋고, 열매 맺은 나무들의 묵직함이 좋고, 낫으로 벼 베는 소리가 좋고, 일찍 산을 내려가야 하는 아쉬움 대신 네 머리색과 같이 타는 듯 붉은 노을을 볼 수 있어 좋다.”
이연은 아찔하였다. 모든 물음에 대한 아음의 갈무리는 언제나 저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알면서도 묻는 자신이 도통 이해되지 않으면서도 늘 질문을 던졌다. 묻지 아니하면 될 터인데, 듣지 아니하면 될 터인데 알 수 없는 설렘, 그 철렁함을 쉬이 포기하지 못하였다. 그렇대도 아음에게 결코 보여서는 아니 되는 마음. 이연은 짐짓 심드렁한 표정으로 바위에 걸터앉았다.
“그런 이연 너는? 이연은 좋은 것이 없어? 때마다 시마다 계절이 오고 가는 것이 설레거나 신비롭지 않아?”
“천 년을 살아온 내가? 바람을 다스릴 줄 아는 내가 새삼스러울 것 하나 없는 것들에 놀라거나 감탄할 리가.”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하며 잘난 체 하는 이연이 얄미울 법 한데도 아음은 외려 더욱 진지해졌다.
“허면 너의 그 사사로움은 달라지는 것들에 대한 설렘과 기대보다는 오랜 시간 인내하여 피고 지고 나고 지는 것들의 수고를 치하하는 마음이려나.”
스스로 찾은 답이 꽤나 만족스러운 듯 단정한 눈매가 이연의 마음을 다시금 어지럽혔다. 그까짓 천 년 세월 따위가 다 무어냐 그 간극을 훌쩍 뛰어넘어 눈을 맞추어 오는 아음을 이연은 어찌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연!”
“또 왜.”
아음은 날이 갈수록 알고 싶은 것이 많아졌다. 저가 모르던 시절의 이연은 어떻게 살아왔을지, 더는 새로울 것도 없는 그 긴긴 세월 이연을 살아가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지 몹시도 궁금하였다.
“너는 어떤 마음으로 천 년을 살아왔어? 기댈 곳 없이 보살피기만 하는 삶이 고단하지는 않았어?”
“고단했다라. 뭐 별로. ……그저 그것이 내게 주어진 삶이니 그렇게 살아가는 것일 뿐.”
“그러니까 그런 삶이 무엇이냐 말이야. 간절히 바라거나 반드시 이루고자 하는 것들은 없었어?”
“글쎄, 간절하게 바랄만한 것이 있을 게 무얼까. 굳이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그냥 그저 내게 주어진 본분을 다하는 것. 만물의 질서를 무너뜨리거나 해하지 않고 지켜내는 것. 그리하여 그것들이 내내 안녕하도록. 그뿐이다. 물론 앞으로도 그러할 테고.”
여우의 본분을 망각하고 수많은 여인들을 홀려댄 아비의 무질서를 따르지 않는 것. 여우의 품격을 자부심으로 알고 만물의 질서를 거스르지 않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아니한가. 이 이상 더하거나 뺄 것이 무언가.
“이연의 그 잔잔한 평정심은 그런 생각에서 기인한 것이로구나.”
“겨울이 서두른다 하여 가을을 앞질러 여름에 닿을 수 있으랴. 누구나 거스를 수 없는, 거슬러서는 안 되는 저마다의 본분이 있는 게지.”
아음은 그만 서러워졌다.
‘마땅히 이무기의 제물이 되었어야 했는데 이리 내쳐진 주제에 아비를 죽이려는 나는 본분을 망각한 것이란 말인가. 불충이자 불효이니 나라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란 말인가.’
허나 아음은 이내 다시 생각하였다. 종묘사직을 바로세우고 굳건히 할 수만 있다면 어떠한 희생도 감내하겠노라고. 때로는 순응이 아닌 불응이 질서를 바로잡을 때도 있을 거라고. 비록 작고 보잘것없는 저이지만 그렇게 지켜낼 거라고. 마음을 다잡고 보니 아음은 이연이 못내 애틋하였다. 위로하고 싶었다.
“많이 외로웠겠구나, 이연.”
“뭐?”
“한 나라를 다스리는 국왕에게도 우러르는 이나 입 안의 혀처럼 구는 이는 있으되 정답게 이름 부르며 다독여주는 이는 없단다. 하물며 영생하는 백두대간의 주인이야 두말할 필요가 있을까. 만물을 돌보는 본분에 순응하여 사는 이연의 성실함은 누가 알아주나. 그간 알아주는 이가 있기는 하였나.”
말간 미소 머금고 가만가만 머리칼을 쓰다듬는 아음의 그 따사로운 손길을 이연은 끝내 뿌리치지 못하였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순탄히 흘러가던 날들에 균열이 생길지도 모르겠다고, 그 틈을 기어이 비집고 그리해서는 아니 되는 마음들이 맞닿을지도 모르겠다고, 세상 무서울 것 없던 이연에게 두려움이란 감정이 급물살처럼 밀려들었다. 실로 모든 것이 낯설고, 모든 것이 새롭기만 한 어느 가을날이었다.
난 사실 현재진행형인 연지아의 일상이 더 궁금한데 왜 자꾸 연아음을 쓰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여기까지가 한계다 싶고...
그냥 연지아가 너무너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