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2월12일 열린 크리스챤 디올의 '뉴룩' 패션쇼. [사진 중앙포토]
잘록한 허리선에 우아하게 떨어지는 긴 치마.
무려 75년 전인 1947년 프랑스의 디자이너 크리스챤 디올이 선보인 이 패션이 최근 한국에서 다시 회자되는 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 때문일지 모른다. 디올은 2차 세계대전 후 여성복이 군복처럼 남성적으로 바뀌자 여성의 곡선을 드러내는 ‘핏 앤 플레어(Fit&Flare)’스타일의 옷을 만들었다. 당시 사람들은 “본 적이 없는 옷(New Look)”이라며 극찬했고 ‘뉴룩(New Look)’이란 명성을 얻게 됐다. 김 여사가 대통령 취임식 때 입은 흰색 투피스가 바로 그런 스타일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여사가 지난 5월1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모습. [사진 국회사진취재단]
뭘 입고 무슨 신발을 신고 어떤 가방을 들었는지…. 영부인(First Lady) 패션에 대한 관심과 논란은 어느 나라나 뜨겁다. 임기 동안 한 국가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공식적으로 드러난 영부인 패션에는 대중과 소통하는 기능이 있다고 봐야 한다. 패션 역사가인 카슨 포플린은 지난해 글로벌 비영리단체인 ‘패션그룹인터내셔널’이 주최한 토론회에서 “사람들이 영부인 패션에 집착하는 것은 패션을 통해 그들과 연결돼 있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 ‘100% 국산’ 강조하는 영부인들
가장 대표적인 소통의 주제는 애국이다. 영국에서 6월 초 열린 재위 70주년 행사의 주인공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었지만, 가장 화제가 된 건 케이트 미들턴 왕세손비와 그의 패션이었다.
지난 2일 케이트 미들턴 왕세손비(오른쪽)가 찰스 왕세자의 부인 카밀라 콘월 공작부인과 함께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재위 7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모습. AP=연합뉴스
아이보리색 코트드레스(알렉산더 맥퀸), 빨간색 울 코트(에포닌 런던), 하늘하늘한 시폰 드레스(셀프포트레이트), 맞춤형 핑크 드레스(스텔라 매카트니) 등. 글로벌 패션 쇼핑사이트인 러브더세일즈는 행사 기간 ‘로열패션’ 검색량이 206% 급증했다고 밝혔다.
옷 자체에 대한 관심일 수도 있지만, 사람들은 미들턴이 패션을 통해 어떤 얘기를 할지 궁금해했다. 결과는 영국에 대한 자부심과 환경을 보호하자는 메시지였다. 그가 나흘 동안 입은 옷은 모두 영국 브랜드였고 대부분 예전에도 입었던 것들이기 때문이다.
1889년 미국 벤저민 해리슨 대통령 취임식 때 입은 부인 캐롤라인 해리슨의 드레스. [사진 국립미국사박물관]
시대를 거슬러 지난 1889년 미국 벤저민 해리슨 대통령 취임식 날 부인 캐롤라인 해리슨은 원단부터 장식, 디자인 하나까지 모두 미국에서 미국산 재료로 만든 드레스를 입었다. ‘미국제품을 구매하자’는 남편의 경기부양 기조에 힘을 싣기 위해서였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부인 멜라니아 트럼프 역시 본인은 비록 유럽 브랜드를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2017년 취임식에는 미국 디자이너인 랄프로렌의 캐시미어 드레스와 재킷을 입었다. 캐롤리나 헤레라, 오스카 드 라 렌타 등의 미국 브랜드 역시 미국 영부인들의 단골 의상이다.
◇ 당당한 내 모습, 어떠신가요?
지난 2020년 7월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투표를 독려하는 연설을 하는 미셸 오바마. [사진 트위터캡처]
영부인 패션은 개인의 소신을 드러내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부인 미셸 오바마는 2020년 여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바이든에게 투표해 달라”면서 ‘VOTE(투표하라)’라는 장식이 달린 목걸이를 착용했다. 이 목걸이는 연설이 시작된 뒤 한 시간 동안 구글트렌드 인기 검색어 1위에 올랐다.
미셸 오바마는 영부인 시절에도 이민자 출신이나 한국계 등 소수인종 디자이너의 옷을 입어 평등의 가치를 강조했다. 특히 민소매 옷, 스웨터, H&M 같은 중저가 패스트패션 브랜드를 즐겨 입어 ‘격에 맞지 않는다’는 공격을 받기도 했는데 전문가들은 오히려 허례허식과 특권의식에 맞선 본인의 표현으로 해석한다.
석유파동이 일어난 1970년대 후반 지미 카터 대통령의 부인 로잘린 카터는 불황기에 패션은 중요하지 않다며 수수한 옷차림을 강조하고 취임식 때 입었던 옷을 다시 입어 논란이 되기도 했다.
1977년 취임식 퍼레이드에서 시민들과 인사하는 지미 카터 대통령과 부인 로잘린 카터 여사. [사진 국립미국사박물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보다 25세 많은 브리짓 마크롱(69)은 활동적인 재킷과 달라붙은 바지, 높은 힐을 즐긴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지만 젊고 자신감 있는 그의 패션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많다.
지난 4월 23일(현지시간)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부인 브리짓 마크롱 여사가 프랑스 북부 해안 휴양 도시 르 투케 해변을 걷고 있다. EPA=연합뉴스
카슨 포플린은 “사람들이 재클린(존 F.케네디 대통령 부인)을 그토록 좋아했던 이유 중 하나는 그녀의 패션에 더 성공하고, 더 잘 나가고 싶다는 야망이 당당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지적이면서도 카리스마있는 트렌치코트를 즐겨입었던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사진 국립미국사박물관]
◇ 산업 일으키는 ‘영부인 파워’
영부인 패션은 자국의 패션산업 성장에 큰 영향력을 지닌다. 데이비드 예르마크 뉴욕대 교수는 미셸 오바마가 2008년 11월부터 2009년 12월까지 패션업계에 미친 경제적 파급효과가 무려 3조원에 달한다고 밝혔다. 당장 김건희 여사가 든 펜화 그림 가방은 주문량이 급증해 품절사태를 빚고 있다. 앞서 문재인 정부에서 김정숙 여사가 주요 20개국(G20) 정상 배우자 모임에 들고 간 한지 가죽 가방도 해외에서까지 주문이 밀려들어 업체가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두 가방 모두 국내 업체가 만든 제품이다.
지난해 10월 프란시스코 교황을 만나기 위해 바티칸시티를 찾은 질 바이든 여사. EPA=연합뉴스
디자이너들을 고무시키는 효과도 크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 아담 립스는 핸드폰으로 뉴스를 검색하다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부인 질 바이든 여사가 교황을 만나면서 자신이 디자인한 남색 투피스를 입은 것을 보고 온종일 가슴이 뛰었다고 했다. 그는 패션전문지 바자(Bazaar)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패션 일에 정말 많은 사랑을 쏟아붓는데 영부인이 그런 옷을 입어주는 건 정말이지 감동적이다”라고 했다. 실제 바이든 여사와 미국의 첫 여성 부통령인 카멀라 해리스는 자국 디자이너들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윤석열 대통령과 부인 김건희 여사가 지난 12일 제75회 칸 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작 영화 '브로커'를 관람하기 위해 서울 메가박스 성수점을 찾은 모습. 뉴스1
최윤정 목포대 패션의류학과 교수는 “유명 연예인보다 공인(公人)이 미치는 선한 영향력이 더 크다”며 “영부인들이 패션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경우 자국 패션브랜드와 디자이너들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프랑스 문화기업 ‘애술린’의 한영아 한국대표 역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영부인은 패션산업을 일으키는 핵심 인물”이라고 했다. 그는 “영부인 패션을 일일이 얼마냐고 따지기보다 잘 활용하는 게 중요하다”며 “대중가요와 영화 등으로 세계무대에서 한국 문화의 위상이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지금이야말로 K패션도 함께 날개를 달 때”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