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전 남자친구의 ‘구여친’들을 모두 만나야 하고, 그들 앞에서 넌 내 여자 친구가 아니었다고 부정당해야 하는 상황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인지 원수인지 전 남자 친구인지 모를 이 남자와 계속 만나야 하고, 구여친들에게서 쏟아지는 미묘한 무시와 비아냥거림을 감수해야 한다. 사사건건 마주치는 것도 피곤한데 매회 그의 연애사를 함께 복기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면 연애는커녕 관계 유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감이 들 정도다. 하지만 엎치락뒤치락 싸우는 새 다시금 둘 사이 미묘한 감정이 피어오르기 시작하고, 우정과 사랑의 기로에서 고민하던 여자는 힘겹게 일보 전진을 결의한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시청자들은 환호성을 터뜨린다. 왜냐고? 이 모든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그는 더없이 사랑스럽기 때문이다. 그렇다, tvN <구여친클럽>의 주인공 방명수(변요한)가 네 여자의 사랑을 받는 데에는 마땅한 이유가 있다.
초반부, 수진(송지효)과 아웅다웅하던 명수의 모습은 눈길을 끈다. 명수는 넌 내 여자 친구가 아니었으며 우린 친구일 뿐이라고 단호하게 부정하면서도 수진을 냉정하게 일별하지 못하고, 제 이야기를 쓸 수 없다 단호히 손을 내젓는 화영(이윤지)을 설득하기 위해 귀여운 사기극을 벌이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인상 깊은 것은 화영에게 들켜 머리를 꺼들리면서도 수진을 원망하긴커녕 어떻게든 그녀를 돕기 위해 애쓰는 장면이다. 수진의 꿈을 이해하고 전력투구하는 모습은 그가 본디 다정하고 사려 깊은 성품임을 짐작케 하기 때문이다.
명수는 화영을 위해 약혼자 영재(김사권) 앞에서 수진의 연인인 양 가장하기도 하고, 지아(장지은)를 위해 매사 레스토랑 일을 두 팔 걷고 나서 돕기도 한다. 이미 종언을 고한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구여친들은 명수를 만나 제 고민을 스스럼없이 털어놓곤 하는데 이는 매우 상징적이다. 이미 끝난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이들 사이 인간적 신뢰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네 여자와 한 남자, 이 묘한 구도 속에서 한 남자가 네 여자 모두에게 사랑받기란 어려운 일이다. 특히 과거에 연인 관계였다면 더욱이나. 그런데 여기 모여든 세 여자는 명수에게 호의적인 데다 자기들까지도 미묘한 동지의식을 드러낸다. 물론 결혼이나 영화 출연 등 각자의 목적을 염두에 두고 있지만, 이들의 선택이 명수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기반으로 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다.
드라마는 구여친들의 입을 빌어 명수를 설명한다. 시종일관 명수의 애정을 그리던 지아는 명확히 말한다. “나 그 사람이랑 사는 내내 너 생각했어. 그 사람은 날 사랑하지 않았어. 뭐, 나도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잘해보고 싶었어. 여자인 거 잊고 살면 되지, 그냥 사람으로 살면 되지 했는데 근데 그게 잘 안 됐던 게…, 난 너한테 사랑 받아 본 기억이 있잖아. 여자로 예쁨받는 게 어떤 건지, 따뜻하고 보호받고 사랑 받는 게 어떤 건지 알잖아.” 화영도 그에 위로 받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말한다. “너 참 그대로다. 너랑 있으면, 세상 모든 문제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거든.” 연인으로서, 인간으로서 명수가 얼마나 충실하고 따뜻하게 그녀를 아껴줬는지 짐작할 수 있다.
명수는 솔직하거니와 자신의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다. 5회, 명수는 오래된 과거의 기억을 꺼내 놓는다. “첫키스는요, 충무로에요. (…) 3년 전에 둘이 썸 타다가 잠깐 멀어진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 엄마가 아프셔서 저는 제천으로 내려가고, 수진인 영화 현장 일로 매일 지방으로 돌고. 만나는 건 둘째 치고 전화 한 번 하기 어렵더라고요. 근데 너무 보고 싶더라고요. (…) 찾아갔어요, 무작정. 두 시간 차 타고 잠깐 얼굴 보러 간 거거든요. (…) 그쵸, 그냥 갔으면 우린 그냥 영영 친구로 남았겠죠. 술집으로 쳐들어갔어요, 무작정. 수진이가 절 보고 놀라더라고요.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래서 저도, 굳이 말하지 않고… 거기서 첫키스를 했습니다.” 명수의 내레이션이 깔리고 과거의 장면이 이어진다. 회상 장면에서, 명수는 내레이션과는 달리 수진을 부르지 못하고 되돌아선다. ‘그냥 갔으면 우린 그냥 영영 친구로 남았겠다’는 그 말처럼, 수진과 명수는 결정적 한 발을 앞에 두고 연인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서로의 관계를 완전히 다르게 판단하고 있었던 두 사람에 대한 설득력 있는 대답이며, 명수의 뒤늦은 고백이기도 하다.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보다 지금까지 다른 모양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던 관계를 바꾸기가 훨씬 어려운 법이다. 후자의 경우 훌륭히 기능하던 기존의 관계를 부정하고 자신이 놓쳤던 가능성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명수는 자신과 수진 사이 새로운 가능성이 피어나고 있음을 인정하고 먼저 한 발짝을 내어 놓는다.
물론 쉽지는 않다. 과거와 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명수는 무심한 수진에게 지친다. 여행을 떠나 애써 다른 데로 관심을 돌리려 해 보지만 뜻대로 되지 않고, 머릿속에 수진 생각만 뱅뱅 돈다. 몇 번이고 연필을 들었다 놓았던 그는 결국 자리에 앉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망설이던 것이 거짓인 양 손길은 거침없고 마치 지금이 아니면 안 되겠다는 듯 잠시도 쉬지 않는다. 주저앉아 열중하던 그의 손끝에서 나온 것은 웃는 얼굴이다. 환하게 웃는 수진의 얼굴. 명수는 아름드리 나무 아래서 그 얼굴을 한참 바라보았으리라. 사실 언제나 제 마음속에 그 모습 그대로 숨어있었을지 모르는 수진의 얼굴을.
결정적 순간, 망설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단호함 역시 명수의 매력이다. 명수는 돌아와 수진에게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고백하고 대답을 기다리겠다 말한다. 수진은 명수와 지아의 관계 때문에 망설이지만, 그녀를 붙드는 것 역시 명수다. “나 다 알아. (…) 다 봤어. 니 카메라에 있던 지아씨 동영상. 그거 왜 아직 안 지웠어? 진짜 지아씨 못 잊어서 안 지운 거야? (…) 너 아직 지아씨 좋아하는 거지? 그지? (…) 솔직하게 얘기해. 니가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야?” 둘의 사이를 오해하고 우는 수진에게 명수는 아무 말 없이 입을 맞춘다. 몸의 언어는 가끔 말보다 강하다. 수십 마디 말보다 한 번의 입맞춤으로 명수는 자신의 진심을 전달한다. 다음 장면, 나란히 앉은 수진은 명수의 다친 팔을 내려다보다 조심히 다치지 않은 엄지 손가락을 감싸쥔다. 명수의 팔에 감긴 붕대가 지아의 흔적이라면, 그것을 지울 수 없더라도 그의 손을 놓지 않겠다는 표시처럼. 불안해하는 수진을 달래는 장면, 명수는 여전히 다정하고 단호하다. 불안하다는 수진을 안고 명수는 말한다. “나도 불안해. 그래도 좋아하는 마음이 이길 거야.” “우리 해피엔딩이겠지?” “니가 내 엔딩이야….” 명수의 말은 수진을 따뜻하게 울린다.
<구여친클럽>의 잔잔하면서도 독특한 리듬은 상당 부분 이 기상천외한 캐릭터에 바탕을 둔다. 지난 연애를 만천하에 공개하고, 구여친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함께 일을 도모하게 만들면서도 전혀 밉지 않은 이 사랑스러운 캐릭터에게. 사실 이것으로도 충분하다, 볼 만한 가치가 있다. 얼핏 황당하고 어처구니 없는 것처럼 보였던 ‘구여친클럽’이라는 설정도 이 모든 판타지를 지상으로 툭 끌어내리는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운 캐릭터로부터 생명력을 얻어 소담스럽게 피어나지 않았나. 드라마는 엔딩까지 담담하고 즐거운 리듬으로 달릴 것이다, 수진과 구여친과 조건, 그리고 무엇보다 명수의 사랑스러움을 계속 속삭거릴 테니까.
-
명수 이 사약같은 머스마
http://m.ch.yes24.com/Article/View/28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