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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한정현 <마고: 미군정기 윤박 교수 살해 사건에 얽힌 세 명의 여성 용의자> - 너무나도 바쁜 책 (약스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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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31 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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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스포라고 한 건 이 책이 트릭이나 범인이 중요한 추리소설은 아니기 때문에. 근데 인물설정 다 말하고 있으니까 민감한 덬은 피해줘

- 퀴어혐오적 맥락에서 쓴 글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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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고 든 감상은 제목에 쓴 그대로였어. '이 책... 너무나도 바쁘다...'

부제에도 나와 있듯이 이 책은 1940년대 미군정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걸 염두에 둬 줘

 

 

일단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부터 살펴볼게

 

- 연가성: 무성애자(로 추정되는) 여성 > 주요인물 1

- 권운서: MTF (비수술) 트랜스젠더 > 주요인물 2

- 에리카: 인터섹스로 태어나 수술을 받은 남성

- (그리고 당연히) 여성 [직업: 카페 사장이자 시인, 잡지 편집장, 기생, 소설가...]

 

 

와... 진짜 벌써 바쁨 내가 다 숨이 찰 정도로 바빠

그리고 저 인물들로부터 가지가 막 뻗어나와

 

 

연가성은 일제 강점기 때,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급하게 결혼을 해. 그러나 성관계에서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연가성이 성관계를 거부하자 남편은 가정폭력을 휘둘렀어. 현재는 이혼 상태. 연가성의 직업은 검안의지만 이름을 드러낼 수는 없어. 왜냐하면 이 소설의 배경은 부제에서도 드러나다시피 1940년대 미군정기거든. 그리고 성별 외에도 연가성을 얽매는 또 다른 요소는 바로 이념이야. 아버지는 연가성이 태어나자마자 북조선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했고, 어머니는 미군정의 좌익 사범 색출이 시작되면서 자살한 재조 일본인이니, 눈에 띄면 안 되는 상황이지. 그리고 이 와중에 연가성은 여성들을 위한 사설 탐정으로도 활동하고 있어.

 

권운서와 연가성이 인연을 맺게 된 건 두 사람이 어릴 때, 권운서의 어머니가 기생집에서 일하던 연가성의 어머니를 도와주면서부터 시작돼. 연가성은 웃지 않는 여자아이라는 이유로, 권운서는 계집애 같은 사내아이라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했어. 권운서는 아버지의 강한 권유(라지만 사실상 강요였겠지)로 결혼했고 다음 해에 이혼해. 권운서는 과거 연가성에게 '우리 같이 멀리 갈래? 나는 여자로 살 거지만, 네가 괜찮다면.'이라고 말한 적 있고, 연가성은 그때 대답하지 못했어. 당황스러워서, 혹은 두려워서가 아니라, 오랫동안 열망해온 것을 이룰 수 있게 되었을 때의 놀라움 때문에. 이전에도 연가성은 자신에게 결혼을 권하는 권운서를 보며 외로움과 배신감을 느낀 적 있어. 그런데 사실 권운서가 연가성에게 결혼을 권한 건, 연가성과 이어져 봤자 자신은 여성의 삶을 살게 될 것인데 그렇게 되면 연가성 또한 변태 성욕자라고 비난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야. 그 당시 레즈비언에 대한 인식은 그 정도였으니까.

 

에리카는 인터섹스, 즉 남성기와 여성기를 모두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야. 부모님이 일제에 끌려간 후 일본인 포주에게 끌려가 신기한 괴물 취급을 받으며 돈벌이로 이용되었어. 수술을 받아 남성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지만 당시 언론에서는 그를 '날로 남성이 되려 하는 여자'라고 비난했지. 호텔 사장인 그는 대외적으로는 비밀에 싸인 여성인데, 그 때문에 남자들은 그를 두고 마녀라고 떠들어. 권운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남자랑 자 주지 않기 때문에.

 

연가성과 권운서의 공통 지인인 송화는 카페 사장이자 시인인데, 어렸을 땐 범죄에 이용되기 위해 키워지고, 조금 커서는 기생집에 팔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양귀비 운반책 역할을 하다 잡혔고, 풀려난 이후 카페를 차리고 시를 쓰고 있어.

 

그리고 세 명의 여성 용의자. 잡지 편집장인 선주혜는 여성을 위한 잡지를 만들고 싶어해. 서북청년회의 제주도 여성 성폭행 사건(제주 4.3 사건)을 취재하기도 했고.

과거에 기생 요릿집에서 일했던 윤선자는 그 때문에 윤박 교수로부터 협박을 당했어.

소설가인 현초의는 윤박 교수에게 작품을 빼앗기고 끝내 자살해.

 

 

할 말이 엄청 많지? 근데 여기서 끝이 아냐

앞서 말했듯 배경이 1940년대 미군정기이기 때문에 앞서 행해진 일제의 만행도 얘기해야 하고, 조선을 자신들의 영향하에 두려 하며 조선인을 낮잡아본다는 점에서는 별반 다를 거 없어 보이는 미군들의 인식도 얘기해야 하고, 연가성을 설명하면서도 나왔지만 좌·우익 이데올로기 갈등도 얘기해야 해.

 

심지어 에필로그는 6.25 전쟁 시기야... 이때 연가성은 미군과 결혼해서 미국에 넘어가 있기 때문에 미국에서 가정주부로 살아가는 연가성의 삶과 전쟁이 교차되어 서술돼. 결코 여성의 파라다이스라고는 할 수 없는 미국 사회도 고발해야 하고, 전쟁의 참상도 묘사해야 하고, 연가성이 남한으로 넘어온 이후에는 또다시 이데올로기 갈등이 인물들의 삶에 영향을 미쳐. 이러면서 결말은 또 희망적으로 내야 해.

 

 

진짜 책이 너무 너무 너ㅓㅓㅓㅓㅓㅓㅓ무 바빠

이 모든 내용을 약 a6 사이즈의 책 187페이지에 집어넣어야 해

 

내가 '아 여기까지 얘기한다고?'라고 하고 있으면 책이 '아니? 나 저기까지 얘기할 건데?'하고 달려나가고 있어

이걸 느낀 게 언제냐면ㅋㅋㅋㅋ 책의 후반부.. 정확히는 167페이지에서 연가성의 회상을 통해 연가성의 어머니가 사실 권운서의 아버지와 내연 관계였다는 게 드러나거든....ㅋㅋㅋㅋㅋㅋㅋㅋ 여기서요...? 우리 20페이지밖에 안 남았는데....?

이건 연가성이 권운서의 마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지만 여하튼 그건 일단 제쳐두고 이걸로도 할 말이 많아

 

1) 연가성의 어머니는 스스로가 현지처이기 때문에 신세를 망쳤다고 생각하고

2) 미군정이 들어오자 연가성에게 함께 자살하자고 하는 등 자식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는 태도를 보였으며

3) 연가성이 사실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고 비난하자 너도 결국 (남자가 아니라) 만만한 나를 비난하는 것 아니냐고 해

 

이게 단 3페이지만에 일어난 일.......

 

 

내가 이 책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건, 책이 독자인 나를 살펴줄 수 없을 만큼 너무 바빠서였던 것 같아

여성문학/퀴어문학 좋지... 연가성과 권운서의 관계도 흥미롭지... 근데 책이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아. 농담 아니고 책의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무언가를 고발하고 있어

(현재는 없는) 일본인 상사의 태도를 내재화한 조선 남성도 고발해야 하고 공창제 폐지를 외치면서 기생들을 대하는 태도는 일제와 다르지 않은 미군정도 고발해야 하고 통금이 있지만 남성 정치인들이 찾는 요릿집은 통금 시간 이후에도 영업하는 현실도 고발해야 하고 지식인과 노동자의 계급차에 따른 대우 차이도 고발해야 하고 맘에 안 들면 빨갱이나 스파이로 몰아 잡아가는 상황도 고발해야 하고...

다 읽고 나니까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나보다 싶은데... 그게 다야. 하도 많은 얘기를 하다 보니 정작 나한테는 얕게만 와닿은 것 같아서 아쉽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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