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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도서 4월 3일에는 제주를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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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03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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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물거리는 촛불의 음영 때문에, 인선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인지 빛과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뿐인지 구별할 수 없다.

그럼, 군이 데려간 사람들은? 

P읍에 있는 국민학교에 한 달간 수용돼 있다가, 지금 해수욕장이 된 백사장에서 12월에 모두 총살됐어. 

모두? 

군경 직계가족을 제외한 모두. 



젖먹이 아기도? 


절멸이 목적이었으니까. 


무엇을 절멸해? 


빨갱이들을.



<2부 밤, 3 바람 中>





십 리 길이라 스무 살 외삼촌이 짐을 들어주고 싶어했는데, 젊은 남자는 위험하니 집에 있으라고 외할아버지가 만류했대. 여덟 살 막내 이모도 같이 가겠다고 혼자 세수를 하고 옷을 차려입고 나왔는데 외할머니가 안 된다고 했대. 오 리도 못 가서 언니들이 업어줬으면 하고 비뚤비뚤 걸을 거 아니냐고.


(중략)


거기 있었어, 그 아이는.


처음에 엄마는 빨간 헝겊 더미가 떨어져 있는 줄 알았대. 피에 젖은 윗옷 속을 이모가 더듬어 배에 난 총알구멍을 찾아냈대. 빳빳하게 피로 뭉쳐진 머리카락이 얼굴에 달라붙은 걸 엄마가 떼어내보니 턱 아래쪽에도 구멍이 있었대. 총알이 턱뼈의 일부를 깨고 날아간 거야. 뭉쳐진 머리카락이 지혈을 하고 있었는지 새로 선혈이 쏟아졌대. 

윗옷을 벗은 이모가 양쪽 소매를 이빨로 찢어서 두 군데 상처를 지혈했어. 의식 없는 동생을 두 언니가 교대로 업고 당숙네까지 걸어갔어. 팥죽에 담근 것같이 피에 젖은 한덩어리가 되어서 세 자매가 집에 들어서니까 놀란 어른들이 입을 열지 못했대. 

통금 때문에 병원에 가지도, 의원을 부르지도 못하고 캄캄한 문간방에서 하룻밤을 보냈대. 당숙네에서 내준 옷으로 갈아입힌 동생이 앓는 소리 없이 숨만 쉬고 있는데, 바로 곁에 누워서 엄마는 자기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냈대. 피를 많이 흘렸으니까 그걸 마셔야 동생이 살 거란 생각에. 얼마 전 앞니가 빠지고 새 이가 조금 돋은 자리에 꼭 맞게 집게손가락이 들어갔대. 그 속으로 피가 흘러들어가는 게 좋았대. 한순간 동생이 아기처럼 손가락을 빨았는데, 숨을 못 쉴 만큼 행복했대.



<2부 밤, 4 정적 中>





세상에서 가장 나약한 사람이 엄마라고 생각했어.


갈라진 인선의 목소리가 정적을 그으며 건너온다.


허깨비. 

살아서 이미 유령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방금 펼쳐둔 대로 입을 벌린 책을 지나쳐 나는 캄캄한 창을 향해 다가간다. 초를 모아쥔 채 창을 등지고 인선을 향해 선다.


그 삼 년 동안 대구 실종 재소자 제주 유족회가 정기적으로 그 광산을 방문했다는 걸 나는 몰랐어.

엄마가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는 것도.

그때 엄마 나이가 일흔둘에서 일흔넷, 무릎 관절염이 악화되던 때야.


내가 걸음을 뗄 때마다 촛불의 음영이 방의 모든 것을 흔든다. 인선의 앞으로 돌아가 앉은 뒤에도 그 술렁임이 멈추지 않은 것은 내 숨이 아직 한기에 떨고 있기 때문이다.



<2부 밤, 6 바다 아래 中>





내 인생이 원래 무엇이었는지 더이상 알 수 없게 되었어. 오랫동안 애써야 가까스로 기억할 수 있었어. 그때마다 물었어. 어디로 떠내려가고 있는지. 이제 내가 누군지.
그 겨울 삼만 명의 사람들이 이 섬에서 살해되고, 이듬해 여름 육지에서 이십만 명이 살해된 건 우연의 연속이 아니야. 이 섬에 사는 삼십만 명을 다 죽여서라도 공산화를 막으라는 미군정의 명령이 있었고, 그걸 실현할 의지와 원한이 장전된 이북 출신 극우 청년단원들이 이 주간의 훈련을 마친 뒤 경찰복과 군복을 입고 섬으로 들어왔고, 해안이 봉쇄되었고, 언론이 통제되었고, 갓난아기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광기가 허락되었고 오히려 포상되었고, 그렇게 죽은 열 살 미만 아이들이 천오백 명이었고, 그 전례에 피가 마르기 전에 전쟁이 터졌고, 이 섬에서 했던 그대로 모든 도시와 마을에서 추려낸 이십만 명이 트럭으로 운반되었고, 수용되고 총살돼 암매장되었고, 누구도 유해를 수습하는 게 허락되지 않았어. 전쟁은 끝난 게 아니라 휴전된 것뿐이었으니까. 휴전선 너머에 여전히 적이 있었으니까. 낙인찍힌 유족들도, 입을 떼는 순간 적의 편으로 낙인찍힐 다른 모든 사람들도 침묵했으니까. 골짜기와 광산과 활주로 아래에서 구슬 무더기와 구멍 뚫린 조그만 두개골들이 발굴될 때까지 그렇게 수십 년이 흘렀고, 아직도 뼈와 뼈들이 뒤섞인 채 묻혀 있어.
그 아이들.
절멸을 위해 죽인 아이들.
그 아이들을 생각하다 집을 나선 밤이었어. 태풍이 올 리 없는 10월이었는데 돌풍이 숲을 지나가고 있었어. 달을 삼켰다 뱉으며 구름들이 달리고, 별들이 쏟아질 듯 무더기로 빛나고, 모든 나무들이 뽑힐 듯 몸부림쳤어. 가지들이 불같이 일어서 날리고, 점퍼 속으로 풍선처럼 부푸는 바람이 거의 내 몸을 들어올리려고 했어. 한 발씩 힘껏 땅을 디디고 그 바람을 가르며 걷던 한순간 생각했어. 그들이 왔구나.
무섭지 않았어. 아니,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행복했어. 고통인지 황홀인지 모를 이상한 격정 속에서 그 차가운 바람을, 바람의 몸을 입은 사람들을 가르며 걸었어. 수천 개 투명한 바늘이 온몸에 꽂힌 것처럼, 그걸 타고 수혈처럼 생명이 흘러들어오는 걸 느끼면서. 나는 미친 사람처럼 보였거나 실제로 미쳤을 거야. 심장이 쪼개질 것같이 격렬하고 기이한 기쁨 속에서 생각했어. 너와 하기로 한 일을 이제 시작할 수 있겠다고.


     *     


눈 속에서 나는 기다렸다.

인선이 다음 말을 잇기를. 

아니, 잇지 않기를.



<3부 불꽃 中>






몇 년 전 누군가 ‘다음에 무엇을 쓸 것이냐’고 물었을 때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바란다고 대답했던 것을 기억한다. 지금의 내 마음도 같다.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



<작가의 말 中>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아름다운 면모가 없는 책은 아니지만 의도적으로 과거를 재현한 부분 위주로 발췌했어.

이런 구성이 누군가에겐 이 책을 더 꺼리게 만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긴 했어.

하지만 오늘은 이래야 할 것 같아서.

보다시피 통렬한 소설이야. 이 책이 너무 힘들다면 지상의 숟가락 하나, 순이 삼촌 같은 책들이 훨씬 부드럽게 읽힐 거야.

꼭 오늘 4·3에 대한 책을 읽어야 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적어도 4월 3일의 제주를 기억해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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