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삶에 심오한 장치나 떡밥이 많아서
이해하지 못 한 부분이 많았는데 이거 보고 오..이런 해석이!!!! 했다 ㅎㅎ
리디 리뷰에서 긁어왔는데
문제있으면 둥글게 먈해줘 ~
https://img.theqoo.net/FcCkQt
*한 줄 리뷰 : 불우한 삶의 간이역에 남겨진 이들을 위한 안내서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 완벽하게 제단된 마스터피스를 영접할 마음의 준비가 된 독자
*이런 분은 독서를 삼가주세요 : 심약한 분
*<제롬>과 “제롬”
우리는 이 글을 읽으며 레이몬드가 말하는 <>와 “”의 차이를 정확히 짚어볼 필요가 있다.
<>로 표현되는 세계는 레이몬드가 붙잡힌 불우한 삶 그 자체다. 과거에 발목 잡혀 학습받은 불우한 삶을 맹목적으로 살아가는 세계, 블루벨의 가해자를 응징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뺏긴 세상, 일반적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몰이해의 영역. 깊이를 알 수 없는 늪에 빠진 것처럼 발버둥쳐도 아래로 처박히기만 하는 세계에서 주고 받는 모든 대화와 인물은 <>로 표현된다.
“”로 표현되는 세계는 그 진창에서 빠져 나온 상태를 의미한다. 레이몬드는 <>와 “”세계를 오갈 때 ‘침묵의 절규’를 듣는다. 침묵의 절규라니, 얼마나 모순적인 표현인가. 실제로 글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바로 ‘모순’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그 모순을 설명하는 아주 긴 이야기다.
*침묵의 절규
1)“…깨어나! 깨어나! 깨어나! 깨어나! 깨어나!“
이 글에서 처음으로 <>가 아닌 ”“의 세계가 등장하는 시점은 레이몬드가 래버햄의 통나무집에서 통나무가 되어갈 때이다. 애써 외면해 오던 칼을 최후를 듣고 시몬에게 듣는 순간, 레이몬드는 밀려오는 죄책감에 괴로워한다. 시몬의 그남자, 인형, 블루벨의 망령들의 개, 고깃덩이, 통나무가 되려 모든 것을 놓으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약에 취해 낮잠의 경계도, 아와 피아의 구분도 잃어버렸을 무렵 그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다른 이들의 날카로운 목소리 사이에서 처음으로 “….” 라는 침묵의 외침을 들었다. 블루벨에서 조지와 대화할 때, 칼과 대화할 때 은연중에 튀어나오던 그것. <>의 세계에 갇힌 나를 깨우려는 내 안의 간절한 고함이자 절박한 외침, 침묵이 마침내 절규했다. “…깨어나! 깨어나! 깨어나! 깨어나! 깨어나!“ 침묵은 외친다. 너를 놓지마, 너를 잃지마, 늪 속으로 가라앉지 마, 너로 살아, 살아 남아.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레이몬드는 제롬을 만났다.
2)“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두 번째 침묵의 절규를 들은 것은 스텔라부인의 집에서 제롬을 목졸라 죽였다 다시 살린 때다. 갇혀 있던 <>의 세계에 금이 가고 침묵이 두 번째로 절규했다.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목청 터져라 다급히 외쳐 <>의 세계에서 나를 꺼낸 나의 피맺힌 목소리. 제롬을 죽이는 것이, 나를 살인자로 만드는 폭주가 옳은 길이 아님을 일깨우는 소리가 다시 한 번 레이몬드의 귀청을 찢었다. 허상에 좀먹히려는 그를 깨웠다. 그리고 죽었다 살아난 제롬을 만났다.
도망치라니, 무엇으로부터? <> 세계의 깊은 늪에서 부터 도망치라고. 이 방황의 끝이 제롬을 죽이는 것이 아님을 알라고. 그리고 처음 만난 순간부터 느낀 어떤 예감, 본능적으로 피하고 싶던 그 운명, 제롬으로부터 도망치라는 나의 절규. 처음부터 레이몬드는 알았던 것이다. 말채찍을 휘두르는 오만한 그 소년으로부터 영영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끝내 그를 죽이지 못하고 함께 살아 남는 것이 그의 운명임을. 그 소년들을 없애고 고통을 주는 것이 나의 길이라 생각해 오랜 시간 폭주해 왔는데, 이미 둘이나 죽인 그 늪에서 이젠 도망치라니. 그렇다면 오랜 폭주의 목적이, 내 삶의 방향 자체가 틀렸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긴 혼란 끝에 레이몬드는 새로운 방향을 찾는다. 우리는 함께 살아갈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의 은신처로 찾아가 그를 만났다.
3)<…깨어나! 깨어나! 깨어나! 깨어나! 깨어나!>
레이몬드가 세 번째 침묵의 절규를 들은 것은 미키와 리처드, 찰스와 함께 돌아 온 래버햄 통나무 집에서였다. 처음으로 침묵의 외침을 들었던 바로 그 곳에서. <>의 세계를 잊은 척 외면하고 “”의 세계에서 살아가던 레이몬드에게 <그 남자>가 외친다. 모른 척 방치해둔 <>세계를 외면하지 말라고. 아직 <>세계에서 나갈 때가 아님을, 침묵은 그저 2년 동안 무의미하게 누워있던 레이몬드를 절규하듯 깨운다. 래버햄에서 미키는 다시 그와의 세계로 연결될 휴대폰을 건네 준다. 다시, 그에게로. <>세계로.
4)“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과거를 덮고 셋이서 살아가고만 싶은 레이몬드는 제롬에게 가죽띠로 목을 졸리고 말채찍을 맞는 순간 침묵의 절규를 들었다. 레이몬드는 제롬이 저지른 모든 짓을 잊기로 하고 그를 사랑했다. 모순적이게도 잊고 싶어 하는 그에게 진실을 일깨운 사람은 바로 제롬이었다. 귀먹은 채, 외면한 채 ”“의 세계에서 살아가려는 레이몬드에게 <>의 세계가 외친다. 빈 찻잔 만큼의 공간은 소년들의 과거와 세계을 담기엔 너무 좁았다. 레이몬드는 <>세계를 외면하고 살기엔 이미 늦어버린 것이다. 모든 것은 끝장났고 평범하고 평온한 “”의 세계에 살겠다는 레이몬드는 틀렸다. 그는 목적을 달성해야 했다. 그렇게 레이몬드는 인형의 집을 떠났다.
5)“살려 줘! 살려 줘! 살려 줘! 살려 줘! 살려 줘!”
깨어나와 도망쳐를 반복해 외치던 침묵이 이제야 마지막 절규를 한다. 시몬이 제롬의 총을 맞고 쓰러지자 레이몬드는 래버햄에서 제임스가 죽던 날 칼의 죽음을 들려주던 시몬의 환청을 들었다. 뒤를 돌아보니 칼이 있었다. 칼도 공범이 아닌가 의심하던 순간 칼의 얼굴이 제롬으로 변하고, 그의 목을 조르던 반복된 상황에 기시감이 든 순간. 레이몬드는 자신이 완전히 침묵의 세계 속에 살아왔음을 깨달았다. 여름방학 이후 멈춰 버린 그 세계에서, 그 공백에 갇혀 있던 나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 “살려 줘!”. 홀로 <>세계에 잠식된 시몬과 함께 살아가려는 고집은 오답이었기에. 시몬이 사라진 지금에서야 비로소 레이몬드는 늪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그는 살아 나왔다. 제롬과 함께.
*이제 우리는 <제롬>에 대해 알아야 한다.
제롬은 레이몬드가 이해하기 너무 어려운 인물이다. 왜냐하면 그는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말 한 마디를 해도 두세 번 꼬아 비틀며,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속내를 숨기고 도망갈 틈을 엿보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제롬>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1부, 블루벨 <네가 정말로 마음에 들어>
: 안나는 레이몬드를 제롬의 대체제로 꼭대기층으로 보냈다. 그랬기에 제롬은 레이몬드를 통해 자신을 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켈리에 레이몬드를 빠뜨린 이는 제롬이었지만, 제롬 역시 빠져나올 수 없는 켈리에 몸을 담근 상태였기에 블루벨 시기는 제롬에게도 불우한 때였다. 가족처럼 의지한 유일한 인물 안나와의 일을 겪고 난 직후의 제롬은 켈리의 깊은 무기력과 절망에 빠져 있다. 이와 동시에 제롬은 철저히 복수의 시나리오를 짜야 했다. 깊은 증오는 철저히 감췄다. 때를 기다리며 켈리 속 악어처럼 몸을 숨겼다. 능글거리고 여유 넘치는 모습의 가면을 쓰고 휴의 종마로, 휴와 조지의 애완견 길들이기 놀이의 조련사로 행동했다.
레이몬드는 그들의 온갖 학대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제롬의 채찍질엔 파이프와 주먹질로 맞섰다. 꺾이지 않고 저항하고 복수하는 레이몬드의 모습은 제롬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를 통해 제롬은 복수의 의지를 찾을 수 있었다. 얻어 맞아도 기죽지 않고 덤비는 레이몬드는 학대당해 침묵하고 죽어 가는 제롬을 일깨웠다. 그래서 그를 응원했다. 가해자로 동참하면서도 남몰래 속삭였다. <그들의 개가 되지 말라고>. 이는 제롬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반대로 레이몬드가 휴와 조지에게 굴종하는 모습을 보일 때는 자괴감에 빠진다. 그들의 개 노릇을 하는 레이몬드에게서 돈웰 형제의 종마로 <클럽>에서 쇼를 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으므로.
제롬이 레이몬드에게 느끼는 감정이 정확히 무엇인지 제롬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를 자신과 동일시 하는 연대감. 그들의 놀이에 조련사로 살고 있는 억눌린 자신은 할 수 없는 그것, 저항하는 레이몬드를 통해 느끼는 쾌감. 레이몬드라는 인간 자체에 느끼는 호감. 그와 동시에 레이몬드에게 느끼는 죄의식. 모순적인 감정으로 괴로워하던 제롬은 레이몬드를 마굿간에서 씻겨 가축으로 길들이라는 휴의 명령을 차마 따를 수 없었다. 그는 레이몬드에게 옷과 신발을 주고 두 발로 걷게 하는 소극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혼란 끝에 마침내 결정한다. 휴와 조지의 놀이에서 빠지기로. 떠나기로 한 전날 밤, 레이몬드가 선물한 말 대가리. 그 증표로 제롬은 황홀한 충격과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휴와 조지의 개가 되지 않고 끝내 불질러 죽여버린 레이몬드! 제롬은 혼자서 레이몬드와 <증오의 연대>를 결성했다. 그도 레이몬드처럼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견디다 끝내는 왕실과 돈웰 가문에 칼을 꽂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 역시 레이몬드에 손에 죽기를, 그 빛나는 순간을 레이몬드에게 주기를 그는 바란다. 자신에게 엿을 먹이는 죽은 말대가리를 껴안고 제롬은 환희한다. 다음을 기약하며 그들은 그렇게 헤어졌다.
-2부, 래버햄 <손을 내밀면 잡는거야>
: 제롬은 다시 만난 레이몬드를 잡아다 조지에게 바친다. 그는 여전히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므로. 그럼에도 제롬은 약으로 망가진 레이몬드에게 칫솔질을 가르치고, 숟가락 쥐고 먹는 법을 가르쳤다. 손을 내밀면 잡는 거라고 알려주고, 걷는 법을 가르쳤다. 그는 레이몬드를 인형도 통나무도 고깃덩이도 아닌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 대하며 모든 것을 차근히 가르쳤다. 레이몬드는 침묵의 절규로 다시 태어난 듯 깨어났고, 제롬을 통해 다시 배웠다. 그는 혼자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제롬으로 인해. 레이몬드가 잠들어야 비로소 깨어나는 시몬과 달리 제롬은 그와 함께 깨어 있고 함께 잠들었다. 약의 부작용으로 고통받을 때도 헌식적으로 간호하는 제롬의 격려와 자장가로 이겨냈다. 둘이서 함께 동이 트기 전 새벽을 견뎠다. 제롬은 약으로 망가진 레이몬드를 고쳤다. 과거의 약으로 망가진 자신을 고치듯.
래버햄에서 제롬은 레이몬드에게 블루벨에 비해 적극적인 도움의 손을 내민다. 블루벨에선 레이몬드를 짓밟는 데에 가담했지만 래버햄에선 그러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제롬은 조지의 계획을 도왔고 그가 레이몬드를 짓밟는 것을 방관했다. 제롬에게는 목적이 있었기에, 그는 그 목적으로 가는 다른 모든 과정을 그저 수단으로 활용하며 냉혈한 가면을 계속 써야했다. 제롬은 자신이 취하고 있는 위치를 알고 있기에 캠코더 촬영 전 레이몬드가 제롬에게 도움을 청하자 진심으로 당황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레이몬드에게 직접 말한다. 우리는 <증오의 연대>라고. 어떤 것보다, 누구보다 우리는 강한 연대라고. 제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레이몬드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배신감에 치떨며 제롬을 죽이겠다 외쳤고 제롬은 강조하듯 말한다. <약속이야>, 날 죽이는 걸 절대 잊지말라는 그 말로 자신의 감정을 단두리한다. 레이몬드에게도, 스스로에게도 되뇌인다. 너의 위치를 기억하라고. 그만큼 그는 혼란스러운 것이다. 목적을 이루는 수단일 뿐인 레이몬드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는 자신에게 제롬은 혼란스럽다. 그리고 그는 결정한다. 조지의 계획에 더는 동참하지 않기로. 그래서 그는 사냥의 밤, 레이몬드의 앞에 열쇠를 놓고 떠난다.
블루벨에서 작별할 땐 다음을 기약했지만 이번엔 달랐다. 더이상 레이몬드가 진창에 빠지는 걸 본인이 원치 않음을, 래버햄에서 제롬을 확실히 인지했다. 더이상 자신의 복수에 엮기지 않고 그가 도망치기를. 자신이 모든 목적을 이루는 날, 그때야 비로소 다시 만나기를. 그래서 레이몬드의 목적을 이룰 수 있도록 자신은 기꺼이 또 홀가분하게 죽을 것이다. 제롬은 누구보다 레이몬드의 삶과 심정을 이해했다. 그들은 너무나도 닮았으므로. 집에서 버림받고 돈웰 형제에게, 꼭대기층 소년들의 놀잇감이 된 것도. 그들이 남긴 궤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묶여 있는 삶도 너무나 똑같았기에. 그래서 제롬은 원했다. 레이몬드는 그와 다른 결말을 맞이하기를. 그런 마음으로 제롬은 레이몬드에게 손키스를 날리며, 그들은 또 한 번 그렇게 헤어졌다.
-3부, 클럽 <죽였어야지, 나를 사랑하면 안 되지>
:제롬은 더이상 레이몬드가 죽음의 꿈에 관여하지 않고 삶으로 돌아가길 원했으나, 8년의 세월을 지나 레이몬드는 <클럽> 한 가운데로 걸어 왔다. 레이몬드가 쓰려는 토끼 가면을 버리고 하얀 가면을 주는 소극적 손길에도 레이몬드는 결국 또 당했다. 제롬은 방관할 수 밖에 없었다. 티모시에게서 도주하는 정오의 자동차 질주 속 <걱정할 게 뭐야, 스페셜리스트가 나랑 같이 있는데>라는 제롬의 말은 그들의 미래를 보여 주는 말이기도 하다. 제롬은 자각하지 못한 채 이미 자각하고 있었다. 오래 도록 준비한 그의 복수에 끝내 마침표를 찍지 못한 채 돈웰 형제에게서 도망치라더라도 레이몬드와 함께 한다면, 둘이 같이 있다면 괜찮다는 것을.
그리고 스텔라 부인의 집에서 자신을 죽이지도 못하고 다시 살려낸 레이몬드를 보며 마침내 입 밖으로 그 말을 꺼낸다. <나를 사랑하면 안 되지> 그 순간 제롬을 알았던 것이다. 이 <증오의 연대>가 끝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사랑이라는 삼천포로 빠지고 말 것을. 무엇보다 강력한 연대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증오를 이기는 ‘사랑‘이 그들 사이에 존재함을, 이제 제롬은 더이상 무시할 수 없다. 아, 얼마나 어리석은가. 고작 사랑이, 그깟 사랑이 제롬이 평생 공들여 계획한 목적을 방해하려는데. 그 혼란 속에 레이몬드를 스텔라 부인의 오두막에 두고 제롬은 도망쳤다. 자꾸만 자신을 흔드는 사랑으로부터.
그리고 은신처로 찾아 온 레이몬드가 안나를 쏘았을 때, 제롬은 가면을 벗고 무너졌다. 그가 의지하는 유일한 인물인 안나의 죽음 앞에서. 하지만 제롬은 이내 깨닫는다. 이 모든 게 자신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돌아온 업보임을. 자신은 레이몬드를 원망할 자격이 없다. 자신은 레이몬드를 사랑할 자격이 없는 가해자다. 그러므로 제롬은 다시 마음을 다진다. 그 목적을 향해 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제롬은 두려워졌다. 무엇보다 강한 힘이라 믿었던 <증오의 연대>가 깨졌기에, 자신을 증오하지 않는 레이몬드가, 그들 사이에 흐르는 사랑이 자신의 목적을 망칠까봐 제롬은 그 어느 때보다 두렵다. 그래서 그들은 기차를 탔던 것이다.
거침없이 달려가는 기차처럼 그들의 사랑도 이젠 막을 수 없다. 그래도 두 사람에겐 각자의 목적이 있다. 그 약속을 다지며 기차는 렐리엄으로 갔다. 그리고 제롬은 <클럽>에 전혀 관계 없는 다이아몬드 커프스단추를 레이몬드에게 선물한다. 자신이 선물한 다이아몬드를 착용한 그를 말없이 바라보고 구두끈을 묶어주는 것만이 제롬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표현이다. 그리고 렐리엄 <클럽>에서 제롬은 또 한 번 종마가 되었으며 레이몬드는 바닥을 뒹굴며 제롬의 마음인 다이아몬드 커프스단추를 잃어버렸다.
유리 정원에서 탈출해 스텔라 부인의 오두막에서 테디와 재회한 레이몬드를 보는 제롬의 심정은 복잡했다. 복잡하면서도 분명해졌다. 질투에서 반추하는 사랑의 감정을. 레이몬드와 사랑의 도피를 해야 할 사람이 자신이 아닌 테디라는 것에. 그럼에도 그는 그들의 도피를 도왔다. 레이몬드의 삶을 위해서였다. 모든 것을 잊고 그의 삶을 살길 바라는 마음, 다이아몬드 커프스단추는 그토록 애틋해졌다. 테디와 레이몬드를 보내고 제롬은 담배를 피웠다. 꽁초가 수북히 쌓일 때까지, 오두막이 연기로 가득 찰 때까지 초조하게 그를 기다렸다. 오길 기대하고 기다렸고 올 줄 알았음에도, 또다시 자신들에게로 돌아온 레이몬드에게서 제롬은 도망쳤다. 이건 그의 목표로 가는 방향과 다른 <옳지 않은> 선택이므로.
유리 정원에 갇힌 자신을 구하러 온 레이몬드를 본 제롬은 당황한다. 크리스틴이 팀과 함께 유리 정원을 나가 어떤 짓을 벌일지 제롬은 직감했기에, 일부러 레이몬드를 곤경에 처하게 한다. 마침내 유리 정원은 폭발하고 그는 온몸으로 레이몬드를 보호한다. 그리고 시몬과 레이몬드, 제롬은 랠리엄 저택을 거슬러 내려간다. 그들의 모든 역사의 시작이자 현재인 이곳, 벗어날 수 없는 세계 그 자체인 <클럽>의 모든 공간을 거꾸로 내려가니 그 끝엔 겨울 호수가 기다린다. 폭발음으로 귀가 먹고 등은 유리 조각으로 피투성이다. 넝마의 몸으로 차가운 겨울 호수를 헤엄쳐 수로로 들어가기 직전, 수문이 열리고 어마어마한 물살이 그를 가로막는다. 제롬이 그 굴레에서, 그 궤도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토록 험난하기만 하다.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제롬은 그의 <왕자님>을 소리내어 불렀다. 그리고 물살에 휩쓸렸다. 그들은 그렇게 또 한 번 헤어졌다.
-4부, 호텔 보고타 “아무래도 난 수치를 느낄 줄 모르나 봐”
: 레이몬드는 4부에서 처음으로 <>의 세계를 떠나 “”의 세계에 살고 있다. 열 다섯 이후의 기억을 잃은 채, 그런 척하며 여느 누군가처럼 평범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의 세계를 모른 척, 잊은 척 외면하는 그의 삶은 평화롭고 고요해 보이지만 실상은 언제 깨질 지 모르는 겨울 호수 위를 걷는 듯 불안하기만 하다. “그런 식으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요. 문제를 방치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으니 적절한 선에서 행동을 보여야 한다”는 블랑 선생의 말. 블랑은 프랑스 어로 ‘흰 색’, 즉 화이트, 제롬을 연상케 한다. 제롬을 잊은 척 지내는 것은 본질적 해결책이 아닌 것이다. 머리를 다친 후유증인 두통은 모른 척 방치해 둔 제롬, <>의 세계로 인해 발생했다. 키우던 개에게 이름 붙인 제롬, 제롬의 죽음을 듣고 레이몬드의 두통은 심해져만 간다.
제롬과 레이몬드는 15년 동안 <>에 세계에 함께 있었지만, 털보에게 납치당한 토요일 밤에 혼자 외로워 보이는 잘생긴 남자는 “”의 세계에 있다. 그러다 문득 제롬 자신으로 돌아 갈때면 <난 아무 자격도 없어.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마찬가지>라고 <>세계에서 말한다. 지난 15년 동안 제롬은 스스로가 레이몬드에게 다가설 자격이 없다고 여겼다. 그 자신이 바로 레이몬드를 불우한 삶 속으로 빠뜨린 가해자이므로. 그래서 그에게 사랑을 느끼는 순간마다 제롬은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지금 두 사람은 “”의 세계에 있다. 레이몬드는 <>세계의 기억을 잃었다. 그러므로 지금의 제롬은 “수치를 느낄 줄 모르는” 사람인 척 레이몬드와 사랑의 도피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제롬 자신이 아닌 그 무엇으로 위장해서라도 기억를 잃은 레이몬드에게 갈 수 있다면. 그것이 제롬이 벌려 놓은 런던의 복수를 뒤로 하고 당장 미국으로 날아 온 이유의 전부다. 제롬은 그렇게 여전히 <>과 “”세계의 사이에서 자기모순과의 격렬한 싸움 중이었다. 그들은 백설공주와 조지라는 이름으로 호텔 보고타에 머물렀다. 백설공주는 동화 속 인물이기에 제롬의 현실과 달리 사랑의 도피로 영원한 사랑을 이뤄낼 수 있을지 모른다.
말리부 해변에서 맛있는 요리를 먹고 밤바다를 산책한 뒤 그들의 도피처로 함께 돌아 오는 길, 사막의 밤하늘은 별이 빛났다. 레이몬드가 좋아하는 수영을 하게 해주려 보고타 수영장의 물을 채웠다. 둘 만의 시간이 깊어 가는 어느 순간, 제롬은 지난 15년 간 그래왔듯 자신을 다잡는다. <너는 나를 허락하면 안 돼. 내가 무슨 요구를 해도 받아들여선 안 돼>. 하지만 백설공주는 그럴 필요가 없다. 솔직할 수 있다. ”네가 날 볼 때마다 절벽에서 거꾸로 떨어지는 것처럼 오싹하고, 가슴이 미친 듯이 뛰고, 호흡이 빨라지고, 눈앞이 아득해. 널 처음 만나던 그날부터 그랬어“라는 숨겨온 고백을 할 수도 있다. 관 속에 누워 모든 것을 잊고, 오랜 시간 갈아온 복수의 칼도, 목적도 모두 과거에 묻고 싶어지던 어느 날, 제롬은 백설공주의 꿈에서 깨어났다.
레이몬드는 15년을 모두 기억하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 백설공주의 도피는 끝이 나고 그들의 낙원은 신기루가 되어 사라졌다. 이것은 <옳지 않기> 때문에. 그럼에도 제롬은 레이몬드를 따라 시몬과 셋이 하는 생활을 시작한다. 그곳에서 조우한 말 대가리. 블루벨에서 레이몬드에게 받은 말 대가리가 저항의 증표라고 여기며 카타르시스를 느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제롬은 알았다. 말 대가리는 자신이 레이몬드를 학대한 증거였다. 그런 자신에겐 레이몬드를 사랑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레이몬드는 더이상 제롬을 제롬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 시절 자신의 학대는 모두 잊은 듯 백설공주라는 동화적 결말로 굴복하아고 자신을 설득한다. 제롬은 결국 채찍을 들고 레이몬드를 밀어내야 했다. 그는 함께 살아갈 자격이 없으므로. 레이몬드를 망친 자신은 그의 손에 죽어야만 하므로. 그리고 제롬은 또 다시 채찍을 휘두른 스스로에게 경멸과 혐오를 느끼며 인형의 집을 떠난다.
제롬의 은신처에서 다시 만난 레이몬드는 칼을 맞았다. 제롬은 그를 잃을 지 모른다는 두려움, 또 다시 그에게 폭력을 행한 스스로에 대한 경멸로 레이몬드의 곁을 떠날 수도 그를 만질 수도 없다. 그 은신처에 사랑의 도피를 떠나는 소설을 숨겨놓고 읽는 제롬의 진심, 복수고 뭐고 전부 버리고 레이몬드와 떠나고 싶은 달콤한 갈망. 그것만은 레이몬드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지만 이미 은신처에 온 레이몬드에게 제롬은 차라리 솔직해진다. 그랬기에 시몬도 테디도 모두 질투해 왔던 그의 분명한 애정을 고백할 수 있었다.
요크성 탑 안에서 기술자 명당을 넘기고 오는 길, 제롬은 오랜 방황 끝에 마침내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굴복을 한다. “너를 원해.” 제롬이 마침내 <>세상으로 해방된 순간이었다. 추악한 자신을 용서하지 말라고, 증오해달라는 제롬의 고백에 레이몬드는 답한다. 증오는 <괴물>들의 연대라고, 우리는, 너는 <괴물>이 아니라고. 우리는 단지 어리석을 뿐. 어리석은 제롬은 끝내 말하고 만다. 레이몬드 너를 사랑한다고. 제롬은 자신에게 씌워진 오래된 덫을 벗는 순간 총에 맞았다. 공주는 말에서 미끄러졌다. 그들의 시작, <>세계의 입구 블루벨에서 시몬은 레이몬드를 완전히 그 세계로 데려가려 한다. 그래서 시몬을 죽였다. 가까스로 건져낸 레이몬드와 그렇게 또 안녕. 마지막 헤어짐이었다.
이제 제롬은 호텔 보고타에 있다. 그에게 미처 들려주지 못한 대답을 하러. 앞으로 너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블루벨의 추운 여름, 래버햄에서 내민 손, 렐리엄의 불타는 유리 정원, 다시 블루벨. 삶의 무수한 순간을 건너 드디어 너에게 왔다. “나와 함께 떠나줘” 늘 상상했던 그곳, 파도조차 밀려오지 못하는 머나먼 그곳으로. 제롬과 레이몬드는 결말을 아는 소설의 주인공이 되어 마침내 그곳으로 간다.
-5,6부. “네가 호텔 보고타에 있어서 기뻤어”
우리는 이제 제롬을 안다.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말 한 마디를 해도 두세 번 꼬아 비틀던,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속내를 숨기고 도망갈 틈을 엿보던 제롬은 이제 없다. 제롬은 간절히 레이몬드를 원하고 그와 함께 살아 가는 삶을 원한다. 비열하고 졸렬한, 교활하고 비겁한 밤비는 자신이 저지른 과거는 모른채하고 레이몬드 곁에서 마음껏 사랑하고 싶어진 그저 평범한 사람이다. 얼간이와 주정뱅이가 되어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고 때론 눈을 치우고 때론 지난 삶의 궤적에 울적해하기도 하며 그렇게 사랑하고 싶은 한 남자일 뿐이다. 왕자님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싶어하는 제법 귀엽고 수줍음을 타는 낯을 가리는 공주일 뿐이다.
이제 제롬은 안다. 그는 힘껏 내리박은 못처럼 레이몬드의 삶에 박혀 꼼짝도 하지 못할 것임을. 이제 두 사람은 단둘이서 그저 조용히 살아갈 것이다. 그들이 겪었던 지난날과는 완전히 다른 고요하고 평온한 나날들을. 이제 레이몬드는 안다. 제롬의 초록색 눈동자 안에 일렁이는 오로라를. 아름다운 커튼 너머에 무엇이 그들을 기다리는 지를.
우리는 이제 제롬에 대해 결론 내야 한다. 그는 레이몬드 인생의 남주다. 그들이 그리는 저급한 통속 소설 속 유일한 남주다. 이 책의 모든 표지, 말-통나무집-토끼가면-사과-오로라까지. 모두 제롬과 레이몬드의 이야기임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빗소리의 정체
<클럽>에서 정신을 잃던 날, 익숙한 초록 눈과 차가운 손을 느끼기 전 들었던 빗소리
호텔 보고타에서 수도관이 역류하던 날 제롬이 잠에서 깨기 전 들은 빗소리.
말리부 해변 데이트를 마치고 돌아온 보고타에서 마치 빗소리처럼 들려는 제롬의 씻는 소리
제롬의 품에서 잠드는 보고타의 밤마다 잠결에 들리는 빗소리
미스터 존의 자객에게 칼을 맞고 제롬의 은신처에서 맞이하던 어느 아침 느껴지는 물비린내와 빗소리
제롬이 마약 제조 기술자 명단을 말하는 순간 조용해진 탑 안에서 갑작스러운 빗소리
시애틀에서 스파이 업무 중인 제롬의 사랑 고백과 함께 들리는 빗소리
그들이 들은 모든 빗소리는 일종의 전조였던 것이다. 늪에서 나와, 호수를 헤엄쳐, 물살이 들이치는 수로를 지나 운명을 거스른 너와 내가 사막의 밤에 굽이 치는 파도를 따라, 파도에 휩쓸려 닿게 될 그 곳을 예고하는 물소리. 너와 내가 함께 맞이할 무수한 바다가 들려 주던 파도 소리였다.
*유리 정원과 호텔 보고타
티모시의 유리 정원은 현실과 철저히 분리된 세계다. 유리 밖 겨울과 달리 정원 안은 따뜻하고 아름다운 열대 우림으로 감싸여있다. 그 정원에 감금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다. 티모시의 유리 정원은 돈웰 형제가 만든 감옥이다. 그들 소유 감옥에 감금된 <>의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제롬, 레이몬드, 시몬 그리고 크리스틴.
유리 정원에서 제롬은 말끔한 차림으로 무언가 끄적이고 있다. 그는 계획하고 있는 것이 있는 상태로 이 곳에 머무르며 티모시에게 협상을 하고자 한다. 어쩔 땐 레이몬드를 잡아 티모시에게 넘기기도 한다. 그것이 바로 제롬이 <>의 세계를 살아가는 모습이다.
레이몬드는 티모시에 의해 유리 정원에 감금당했다. 함께 감금당한 크리스틴의 방을 오가며 그를 살피고 토닥이기도 한다. 시몬과 제롬의 도움으로 유리 정원을 탈출한 적도 있으며, 티모시를 겁박해 유리 정원으로 끌고 오지만 그에게 얻어 터지기도 한다.
그리고 시몬. 시몬은 티모시의 지시로 유리 정원에 감금된 레이몬드를 감시하며 돌본다. 그는 레이몬드에게 <당신을 구해 줄게>라는 약속을 하기도 한다. 막상 시몬이 정원에 갇혔을 때 시몬은 줄로 손이 묶여 있으나 실상은 묶이지 않은 줄이다.
그리고 크리스틴. 그는 정신이 이미 나간 채 그곳에 감금되어 있다. 그는 오래 동안 복수를 계획했지만 유리 정원에 자발적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끝내 티모시와 함께 죽으며 그의 유리 정원을 산산조각낸다.
이렇듯 네 사람이 유리 정원에서 지낸 모습과 최후는 <>세계 속 그들의 삶과 동일하다.
호텔 보고타는 어떠한가. 그곳은 제롬이 택한 사랑의 도피처다. 레이몬드는 제롬에게 납치 당해 그곳에 감금되었지만 언제든 자유로이 오갈 수 있다. 호텔 보고타에서 두 사람은 <>의 세계를 잊고 “”의 세계를 누린다. 함께 바닷가로 데이트를 나가고 단 칵테일을 마시고 수영장에 물을 받는다. 자격 없는 자격은 잊고 오래 된 마음을 고백한다. 통속 소설처럼 동화처럼 행복한 엔딩을 꿈꾼다. 그들이 서로를 가두고 싶던 도피처는 사막의 신기루처럼 아스라이 사라질 듯 하여도 그곳은 실재한다. 다시 돌아오고, 약속이라도 한 듯 이곳에서 너를 기다리는 이 곳. “”세계를 여는 비밀의 문이다. 정오의 자동차 질주에서 통속 소설을 읽던 기차 여행, 그리고 호텔 보고타를 통해 두 사람은 숲 속의 오두막으로 간다. 이들의 이야기도 여느 소설과 동화처럼 행복한 결말을 향하고 있기에.
*같은 장소, 다른 상황 & 같은 문장, 다른 세계
이 긴 이야기에서 다른 상황임에도 같은 문장이 반복되어 쓰이는 경우가 꽤 있는데, 처음과 달라진 상황에 전율이 느껴지기도 한다.
-블루벨의 낡은 펍 앞에서 : 몹시 추운 4월 어느 날 한 시간 쯤 기다리자 캐딜락이 왔고 푹신한 크림색 시트에 몸을 파묻자 얼어붙는 몸이 녹았다. 한 번은 불우한 삶으로 들어가는 캐딜락이었으나, 다른 한 번은 불우한 삶으로부터 세상으로 나가는 캐딜락이었다. 미키가 레이몬드를 데리러 왔다. 고로 불우한 삶을 벗어나 제롬을 향해 가는 여정인 셈이다.
-이제 우리는 <제롬>에 대해 알아야 한다 : 기숙사 꼭대기층 소년들에게 대해 설명하던 처음의 순간, 그리고 물살에 쓸려간 제롬과 헤어진 지 2년 후 미키에게사 그의 소식을 들을 때. 처음의 문장과는 다르게 인생의 모든 것이 되어 버린 제롬의 무게를 느낄 수 있다.
-버릇없는 개아가는 매로 길들여야지 : 이 문장은 총 네 번 등장한다. 블루벨에서 조지가 레이몬드를 개로 길들이려 할 때, <클럽>에서 티모시가 레이몬드의 가면을 벗겨내며, 그리고 레이몬드가 랠리엄 자택에서 티모시를 폭행할 때. 레이몬드는 휴와 티모시에게 받은 굴욕을 고스란히 되돌려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호텔 보고타의 도피를 끝내고 시몬의 집으로 온 제롬이 말채찍으로 레이몬드를 후려칠 때. 애써 목적을 상기시키려는 제롬의 복잡한 심정이 느껴진다.
-초코, 바닐라 아이스크림 : 칼이 레이몬드에게 둘 중 무엇을 좋아하는지 물었던 질문, 앨런을 따라 마약상담센터를 들린 후 함께 먹은 것. 두 사람 모두 벼랑 끝에 서 있는 레이몬드에게 조건 없는 손길을 내민 선량한 친구였다.
-안나: 안나는 레이몬드가 학교에 도착해 처음으로 이름을 알게 된 사람이자 레이몬드가 마지막으로 죽인 사람. 그녀가 처음 건넨 초록 목도리부터 입고 있던 초록 블라우스까지, 제롬의 사람임을 온 몸으로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작열하는 뜨거운 태양 속을 뚫고 뻥 뚫린 도로를 제멋대로 질주할 수 있었다. 신호등도 없는 길에서는 차선조차 의미가 없었다. 얼굴을 태우는 햇빛과 미적지근해진 맥주와 바람결에 담뱃재를 털어 내며, 달리고 싶은 만큼 달렸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는 머나먼 행성의 노래 같았고 우리는 멜로디에 제멋대로 가사를 붙여 노래했다. : 제임스가 모텔에서 타 죽고 다시 붙잡혀 돌아오는 고속 도로에서. 그 때는 ‘무릎 위의 지도는 열린 차창 너머로 날려 보내고 그저 무턱대고 나아갔다.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는지, 어디에 닿고 싶은지, 뭘 이루고 싶은 건지 그런 걱정들은 전부 잊어버린 채, 우리는, 나는, 래버햄에 도착했다.’ 였고 미키와 리처드, 찰스와 함께 휴가를 떠날 때는 ‘무릎 위에 지도는 어느샌가 사라졌다. 무엇을 외면하는지, 어디로 향하는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그런 걱정들로부터 도피하며, 나는, 래버햄에 도착했다’. 로 조금 달라졌다.
-좀 더 자. 긴 하루였잖아 : 처음 가 본 물스비 <클럽>에서 정신을 잃은 레이몬드에게 제롬이. 이때는 <좀 더 자. 긴 하루였잖아>지만 보고타 호텔 이후 시몬의 집에서 셋이 함께 한 새벽, 떠나려는 제롬을 붙잡은 레이몬드는 “좀 더 자. 긴 하루였잖아”였다.
-타당해 : <켈리>에 자신을 빠뜨린 시몬에게 배신감을 느껴 달려든 레이몬드가 <사람을 늪에 처넣었으면 그 대가는 치러야지>라고 말했을 때 시몬의 대답. 요크성에서 제롬을 쏘고 함께 블루벨로 모두를 데려온 시몬이 레이몬드에게 총을 겨누며 한 말. 시몬은 결국 혼자서 <>의 세계에 갇혔다.
*<불우한 삶>이 “신의 세계를 여는 커튼”에 이르기까지
15년의 세월의 이야기 속에서 레이몬드는 정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
그의 불우한 삶의 시작이 401호에 배정된 것인 줄 알았으나 그 내막엔 미스터 존이 있었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실상 그는 탄생 부터가 불우한 삶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는 상황에 굴복하지 않았다. 꼭대기층 소년들이 레이몬드라는 인간과 옷을 불태웠으니 그 역시 그 소년들을 불태워 죽였다. 그들의 사냥놀이와 게임판에서 레이몬드는 얌전히 사냥당하지 않았다. 블루벨에서 당한 참상이 그저 예고편이라 여겨질 정도로 래버햄에선 지옥 보다 처참한 지옥이 그를 기다렸다. 블루벨에서 저지른 죄가 있기에, 애써 잊은 칼에 대한 참담함이 레이몬드를 바닥으로 끌어들였다. 더 많은 군중에게, 더 참혹한 행위로 그는 학대당했다. 블루벨의 화재가 올가미가 되어 래버햄의 레이몬드의 목을 옥죄었다. 그럼에도 그는 굴복하지 않았다. 도주하려던 레이몬드가 올가미에 걸려 붙들렸기에 조지를 올가미에 메달아 죽였다. 짐승이 가장 짐승다울 때 덫에 걸리는 거라던 <올가미>씨도 올가미로 죽였다. 그들의 토끼몰이에도 레이몬드는 얌전히 몰이당하지 않았다. 꼭대기층 소년들이 그의 삶을 주무르도록 두지 않았다. 그는 죽지 않았다. 그런 진창 속에서, 그 늪에서, 그 수로에서 레이몬드는 결국 스스로 살아 남았다. 강인한 육체와 그보다 강인한 정신으로. 과거의 불우한 삶에 좀먹혀 자신의 인생을 살지 못하고 복수만을 쫓아 산 시간도 있었다. 어리석기에 헤맨 시간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모든 불우한 삶의 종착지는 그들의 불우한 삶이란 진리를 깨달았다. 그는 증오에 잠식되지 않았다. 괴물이 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한 번쯤은, 자의든 타의든 어떤 연유에서든 <불우한 삶>에 발을 디디는 순간이 있다. 운이 나쁘다면 레이몬드처럼 15년을, <그 곳>에 갇혀 사는 이도 존재한다. <어쩔 수 없잖아, 레이몬드. 엎질러진 물인걸.>이란 칼의 말처럼 과거는 돌이킬 수 없다. 흉터는 지워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늘을 살아야 한다. 어리석은 어제의 나를 용서하고 배워야 한다. 완벽한 삶이 아닐지라도, 때로는 어리석을 지라도, 빈 찻잔 만큼의 공간을 찾아낸다면 그 자체로 의미있는 삶인 것이다. 사랑하는 이의 곁에서 나를 위한 달콤한 차를 즐기는, 그 만큼의 여유가 있는 삶을 위해 우리는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다. 온 몸을 던져 이를 알리는 레이몬드의 긴 이야기, 바로 이 글 <불우한 삶>이다.
lol***구매자
이해하지 못 한 부분이 많았는데 이거 보고 오..이런 해석이!!!! 했다 ㅎㅎ
리디 리뷰에서 긁어왔는데
문제있으면 둥글게 먈해줘 ~
https://img.theqoo.net/FcCkQt
*한 줄 리뷰 : 불우한 삶의 간이역에 남겨진 이들을 위한 안내서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 완벽하게 제단된 마스터피스를 영접할 마음의 준비가 된 독자
*이런 분은 독서를 삼가주세요 : 심약한 분
*<제롬>과 “제롬”
우리는 이 글을 읽으며 레이몬드가 말하는 <>와 “”의 차이를 정확히 짚어볼 필요가 있다.
<>로 표현되는 세계는 레이몬드가 붙잡힌 불우한 삶 그 자체다. 과거에 발목 잡혀 학습받은 불우한 삶을 맹목적으로 살아가는 세계, 블루벨의 가해자를 응징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뺏긴 세상, 일반적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몰이해의 영역. 깊이를 알 수 없는 늪에 빠진 것처럼 발버둥쳐도 아래로 처박히기만 하는 세계에서 주고 받는 모든 대화와 인물은 <>로 표현된다.
“”로 표현되는 세계는 그 진창에서 빠져 나온 상태를 의미한다. 레이몬드는 <>와 “”세계를 오갈 때 ‘침묵의 절규’를 듣는다. 침묵의 절규라니, 얼마나 모순적인 표현인가. 실제로 글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바로 ‘모순’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그 모순을 설명하는 아주 긴 이야기다.
*침묵의 절규
1)“…깨어나! 깨어나! 깨어나! 깨어나! 깨어나!“
이 글에서 처음으로 <>가 아닌 ”“의 세계가 등장하는 시점은 레이몬드가 래버햄의 통나무집에서 통나무가 되어갈 때이다. 애써 외면해 오던 칼을 최후를 듣고 시몬에게 듣는 순간, 레이몬드는 밀려오는 죄책감에 괴로워한다. 시몬의 그남자, 인형, 블루벨의 망령들의 개, 고깃덩이, 통나무가 되려 모든 것을 놓으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약에 취해 낮잠의 경계도, 아와 피아의 구분도 잃어버렸을 무렵 그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다른 이들의 날카로운 목소리 사이에서 처음으로 “….” 라는 침묵의 외침을 들었다. 블루벨에서 조지와 대화할 때, 칼과 대화할 때 은연중에 튀어나오던 그것. <>의 세계에 갇힌 나를 깨우려는 내 안의 간절한 고함이자 절박한 외침, 침묵이 마침내 절규했다. “…깨어나! 깨어나! 깨어나! 깨어나! 깨어나!“ 침묵은 외친다. 너를 놓지마, 너를 잃지마, 늪 속으로 가라앉지 마, 너로 살아, 살아 남아.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레이몬드는 제롬을 만났다.
2)“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두 번째 침묵의 절규를 들은 것은 스텔라부인의 집에서 제롬을 목졸라 죽였다 다시 살린 때다. 갇혀 있던 <>의 세계에 금이 가고 침묵이 두 번째로 절규했다.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목청 터져라 다급히 외쳐 <>의 세계에서 나를 꺼낸 나의 피맺힌 목소리. 제롬을 죽이는 것이, 나를 살인자로 만드는 폭주가 옳은 길이 아님을 일깨우는 소리가 다시 한 번 레이몬드의 귀청을 찢었다. 허상에 좀먹히려는 그를 깨웠다. 그리고 죽었다 살아난 제롬을 만났다.
도망치라니, 무엇으로부터? <> 세계의 깊은 늪에서 부터 도망치라고. 이 방황의 끝이 제롬을 죽이는 것이 아님을 알라고. 그리고 처음 만난 순간부터 느낀 어떤 예감, 본능적으로 피하고 싶던 그 운명, 제롬으로부터 도망치라는 나의 절규. 처음부터 레이몬드는 알았던 것이다. 말채찍을 휘두르는 오만한 그 소년으로부터 영영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끝내 그를 죽이지 못하고 함께 살아 남는 것이 그의 운명임을. 그 소년들을 없애고 고통을 주는 것이 나의 길이라 생각해 오랜 시간 폭주해 왔는데, 이미 둘이나 죽인 그 늪에서 이젠 도망치라니. 그렇다면 오랜 폭주의 목적이, 내 삶의 방향 자체가 틀렸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긴 혼란 끝에 레이몬드는 새로운 방향을 찾는다. 우리는 함께 살아갈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의 은신처로 찾아가 그를 만났다.
3)<…깨어나! 깨어나! 깨어나! 깨어나! 깨어나!>
레이몬드가 세 번째 침묵의 절규를 들은 것은 미키와 리처드, 찰스와 함께 돌아 온 래버햄 통나무 집에서였다. 처음으로 침묵의 외침을 들었던 바로 그 곳에서. <>의 세계를 잊은 척 외면하고 “”의 세계에서 살아가던 레이몬드에게 <그 남자>가 외친다. 모른 척 방치해둔 <>세계를 외면하지 말라고. 아직 <>세계에서 나갈 때가 아님을, 침묵은 그저 2년 동안 무의미하게 누워있던 레이몬드를 절규하듯 깨운다. 래버햄에서 미키는 다시 그와의 세계로 연결될 휴대폰을 건네 준다. 다시, 그에게로. <>세계로.
4)“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과거를 덮고 셋이서 살아가고만 싶은 레이몬드는 제롬에게 가죽띠로 목을 졸리고 말채찍을 맞는 순간 침묵의 절규를 들었다. 레이몬드는 제롬이 저지른 모든 짓을 잊기로 하고 그를 사랑했다. 모순적이게도 잊고 싶어 하는 그에게 진실을 일깨운 사람은 바로 제롬이었다. 귀먹은 채, 외면한 채 ”“의 세계에서 살아가려는 레이몬드에게 <>의 세계가 외친다. 빈 찻잔 만큼의 공간은 소년들의 과거와 세계을 담기엔 너무 좁았다. 레이몬드는 <>세계를 외면하고 살기엔 이미 늦어버린 것이다. 모든 것은 끝장났고 평범하고 평온한 “”의 세계에 살겠다는 레이몬드는 틀렸다. 그는 목적을 달성해야 했다. 그렇게 레이몬드는 인형의 집을 떠났다.
5)“살려 줘! 살려 줘! 살려 줘! 살려 줘! 살려 줘!”
깨어나와 도망쳐를 반복해 외치던 침묵이 이제야 마지막 절규를 한다. 시몬이 제롬의 총을 맞고 쓰러지자 레이몬드는 래버햄에서 제임스가 죽던 날 칼의 죽음을 들려주던 시몬의 환청을 들었다. 뒤를 돌아보니 칼이 있었다. 칼도 공범이 아닌가 의심하던 순간 칼의 얼굴이 제롬으로 변하고, 그의 목을 조르던 반복된 상황에 기시감이 든 순간. 레이몬드는 자신이 완전히 침묵의 세계 속에 살아왔음을 깨달았다. 여름방학 이후 멈춰 버린 그 세계에서, 그 공백에 갇혀 있던 나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 “살려 줘!”. 홀로 <>세계에 잠식된 시몬과 함께 살아가려는 고집은 오답이었기에. 시몬이 사라진 지금에서야 비로소 레이몬드는 늪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그는 살아 나왔다. 제롬과 함께.
*이제 우리는 <제롬>에 대해 알아야 한다.
제롬은 레이몬드가 이해하기 너무 어려운 인물이다. 왜냐하면 그는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말 한 마디를 해도 두세 번 꼬아 비틀며,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속내를 숨기고 도망갈 틈을 엿보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제롬>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1부, 블루벨 <네가 정말로 마음에 들어>
: 안나는 레이몬드를 제롬의 대체제로 꼭대기층으로 보냈다. 그랬기에 제롬은 레이몬드를 통해 자신을 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켈리에 레이몬드를 빠뜨린 이는 제롬이었지만, 제롬 역시 빠져나올 수 없는 켈리에 몸을 담근 상태였기에 블루벨 시기는 제롬에게도 불우한 때였다. 가족처럼 의지한 유일한 인물 안나와의 일을 겪고 난 직후의 제롬은 켈리의 깊은 무기력과 절망에 빠져 있다. 이와 동시에 제롬은 철저히 복수의 시나리오를 짜야 했다. 깊은 증오는 철저히 감췄다. 때를 기다리며 켈리 속 악어처럼 몸을 숨겼다. 능글거리고 여유 넘치는 모습의 가면을 쓰고 휴의 종마로, 휴와 조지의 애완견 길들이기 놀이의 조련사로 행동했다.
레이몬드는 그들의 온갖 학대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제롬의 채찍질엔 파이프와 주먹질로 맞섰다. 꺾이지 않고 저항하고 복수하는 레이몬드의 모습은 제롬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를 통해 제롬은 복수의 의지를 찾을 수 있었다. 얻어 맞아도 기죽지 않고 덤비는 레이몬드는 학대당해 침묵하고 죽어 가는 제롬을 일깨웠다. 그래서 그를 응원했다. 가해자로 동참하면서도 남몰래 속삭였다. <그들의 개가 되지 말라고>. 이는 제롬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반대로 레이몬드가 휴와 조지에게 굴종하는 모습을 보일 때는 자괴감에 빠진다. 그들의 개 노릇을 하는 레이몬드에게서 돈웰 형제의 종마로 <클럽>에서 쇼를 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으므로.
제롬이 레이몬드에게 느끼는 감정이 정확히 무엇인지 제롬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를 자신과 동일시 하는 연대감. 그들의 놀이에 조련사로 살고 있는 억눌린 자신은 할 수 없는 그것, 저항하는 레이몬드를 통해 느끼는 쾌감. 레이몬드라는 인간 자체에 느끼는 호감. 그와 동시에 레이몬드에게 느끼는 죄의식. 모순적인 감정으로 괴로워하던 제롬은 레이몬드를 마굿간에서 씻겨 가축으로 길들이라는 휴의 명령을 차마 따를 수 없었다. 그는 레이몬드에게 옷과 신발을 주고 두 발로 걷게 하는 소극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혼란 끝에 마침내 결정한다. 휴와 조지의 놀이에서 빠지기로. 떠나기로 한 전날 밤, 레이몬드가 선물한 말 대가리. 그 증표로 제롬은 황홀한 충격과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휴와 조지의 개가 되지 않고 끝내 불질러 죽여버린 레이몬드! 제롬은 혼자서 레이몬드와 <증오의 연대>를 결성했다. 그도 레이몬드처럼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견디다 끝내는 왕실과 돈웰 가문에 칼을 꽂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 역시 레이몬드에 손에 죽기를, 그 빛나는 순간을 레이몬드에게 주기를 그는 바란다. 자신에게 엿을 먹이는 죽은 말대가리를 껴안고 제롬은 환희한다. 다음을 기약하며 그들은 그렇게 헤어졌다.
-2부, 래버햄 <손을 내밀면 잡는거야>
: 제롬은 다시 만난 레이몬드를 잡아다 조지에게 바친다. 그는 여전히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므로. 그럼에도 제롬은 약으로 망가진 레이몬드에게 칫솔질을 가르치고, 숟가락 쥐고 먹는 법을 가르쳤다. 손을 내밀면 잡는 거라고 알려주고, 걷는 법을 가르쳤다. 그는 레이몬드를 인형도 통나무도 고깃덩이도 아닌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 대하며 모든 것을 차근히 가르쳤다. 레이몬드는 침묵의 절규로 다시 태어난 듯 깨어났고, 제롬을 통해 다시 배웠다. 그는 혼자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제롬으로 인해. 레이몬드가 잠들어야 비로소 깨어나는 시몬과 달리 제롬은 그와 함께 깨어 있고 함께 잠들었다. 약의 부작용으로 고통받을 때도 헌식적으로 간호하는 제롬의 격려와 자장가로 이겨냈다. 둘이서 함께 동이 트기 전 새벽을 견뎠다. 제롬은 약으로 망가진 레이몬드를 고쳤다. 과거의 약으로 망가진 자신을 고치듯.
래버햄에서 제롬은 레이몬드에게 블루벨에 비해 적극적인 도움의 손을 내민다. 블루벨에선 레이몬드를 짓밟는 데에 가담했지만 래버햄에선 그러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제롬은 조지의 계획을 도왔고 그가 레이몬드를 짓밟는 것을 방관했다. 제롬에게는 목적이 있었기에, 그는 그 목적으로 가는 다른 모든 과정을 그저 수단으로 활용하며 냉혈한 가면을 계속 써야했다. 제롬은 자신이 취하고 있는 위치를 알고 있기에 캠코더 촬영 전 레이몬드가 제롬에게 도움을 청하자 진심으로 당황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레이몬드에게 직접 말한다. 우리는 <증오의 연대>라고. 어떤 것보다, 누구보다 우리는 강한 연대라고. 제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레이몬드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배신감에 치떨며 제롬을 죽이겠다 외쳤고 제롬은 강조하듯 말한다. <약속이야>, 날 죽이는 걸 절대 잊지말라는 그 말로 자신의 감정을 단두리한다. 레이몬드에게도, 스스로에게도 되뇌인다. 너의 위치를 기억하라고. 그만큼 그는 혼란스러운 것이다. 목적을 이루는 수단일 뿐인 레이몬드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는 자신에게 제롬은 혼란스럽다. 그리고 그는 결정한다. 조지의 계획에 더는 동참하지 않기로. 그래서 그는 사냥의 밤, 레이몬드의 앞에 열쇠를 놓고 떠난다.
블루벨에서 작별할 땐 다음을 기약했지만 이번엔 달랐다. 더이상 레이몬드가 진창에 빠지는 걸 본인이 원치 않음을, 래버햄에서 제롬을 확실히 인지했다. 더이상 자신의 복수에 엮기지 않고 그가 도망치기를. 자신이 모든 목적을 이루는 날, 그때야 비로소 다시 만나기를. 그래서 레이몬드의 목적을 이룰 수 있도록 자신은 기꺼이 또 홀가분하게 죽을 것이다. 제롬은 누구보다 레이몬드의 삶과 심정을 이해했다. 그들은 너무나도 닮았으므로. 집에서 버림받고 돈웰 형제에게, 꼭대기층 소년들의 놀잇감이 된 것도. 그들이 남긴 궤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묶여 있는 삶도 너무나 똑같았기에. 그래서 제롬은 원했다. 레이몬드는 그와 다른 결말을 맞이하기를. 그런 마음으로 제롬은 레이몬드에게 손키스를 날리며, 그들은 또 한 번 그렇게 헤어졌다.
-3부, 클럽 <죽였어야지, 나를 사랑하면 안 되지>
:제롬은 더이상 레이몬드가 죽음의 꿈에 관여하지 않고 삶으로 돌아가길 원했으나, 8년의 세월을 지나 레이몬드는 <클럽> 한 가운데로 걸어 왔다. 레이몬드가 쓰려는 토끼 가면을 버리고 하얀 가면을 주는 소극적 손길에도 레이몬드는 결국 또 당했다. 제롬은 방관할 수 밖에 없었다. 티모시에게서 도주하는 정오의 자동차 질주 속 <걱정할 게 뭐야, 스페셜리스트가 나랑 같이 있는데>라는 제롬의 말은 그들의 미래를 보여 주는 말이기도 하다. 제롬은 자각하지 못한 채 이미 자각하고 있었다. 오래 도록 준비한 그의 복수에 끝내 마침표를 찍지 못한 채 돈웰 형제에게서 도망치라더라도 레이몬드와 함께 한다면, 둘이 같이 있다면 괜찮다는 것을.
그리고 스텔라 부인의 집에서 자신을 죽이지도 못하고 다시 살려낸 레이몬드를 보며 마침내 입 밖으로 그 말을 꺼낸다. <나를 사랑하면 안 되지> 그 순간 제롬을 알았던 것이다. 이 <증오의 연대>가 끝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사랑이라는 삼천포로 빠지고 말 것을. 무엇보다 강력한 연대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증오를 이기는 ‘사랑‘이 그들 사이에 존재함을, 이제 제롬은 더이상 무시할 수 없다. 아, 얼마나 어리석은가. 고작 사랑이, 그깟 사랑이 제롬이 평생 공들여 계획한 목적을 방해하려는데. 그 혼란 속에 레이몬드를 스텔라 부인의 오두막에 두고 제롬은 도망쳤다. 자꾸만 자신을 흔드는 사랑으로부터.
그리고 은신처로 찾아 온 레이몬드가 안나를 쏘았을 때, 제롬은 가면을 벗고 무너졌다. 그가 의지하는 유일한 인물인 안나의 죽음 앞에서. 하지만 제롬은 이내 깨닫는다. 이 모든 게 자신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돌아온 업보임을. 자신은 레이몬드를 원망할 자격이 없다. 자신은 레이몬드를 사랑할 자격이 없는 가해자다. 그러므로 제롬은 다시 마음을 다진다. 그 목적을 향해 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제롬은 두려워졌다. 무엇보다 강한 힘이라 믿었던 <증오의 연대>가 깨졌기에, 자신을 증오하지 않는 레이몬드가, 그들 사이에 흐르는 사랑이 자신의 목적을 망칠까봐 제롬은 그 어느 때보다 두렵다. 그래서 그들은 기차를 탔던 것이다.
거침없이 달려가는 기차처럼 그들의 사랑도 이젠 막을 수 없다. 그래도 두 사람에겐 각자의 목적이 있다. 그 약속을 다지며 기차는 렐리엄으로 갔다. 그리고 제롬은 <클럽>에 전혀 관계 없는 다이아몬드 커프스단추를 레이몬드에게 선물한다. 자신이 선물한 다이아몬드를 착용한 그를 말없이 바라보고 구두끈을 묶어주는 것만이 제롬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표현이다. 그리고 렐리엄 <클럽>에서 제롬은 또 한 번 종마가 되었으며 레이몬드는 바닥을 뒹굴며 제롬의 마음인 다이아몬드 커프스단추를 잃어버렸다.
유리 정원에서 탈출해 스텔라 부인의 오두막에서 테디와 재회한 레이몬드를 보는 제롬의 심정은 복잡했다. 복잡하면서도 분명해졌다. 질투에서 반추하는 사랑의 감정을. 레이몬드와 사랑의 도피를 해야 할 사람이 자신이 아닌 테디라는 것에. 그럼에도 그는 그들의 도피를 도왔다. 레이몬드의 삶을 위해서였다. 모든 것을 잊고 그의 삶을 살길 바라는 마음, 다이아몬드 커프스단추는 그토록 애틋해졌다. 테디와 레이몬드를 보내고 제롬은 담배를 피웠다. 꽁초가 수북히 쌓일 때까지, 오두막이 연기로 가득 찰 때까지 초조하게 그를 기다렸다. 오길 기대하고 기다렸고 올 줄 알았음에도, 또다시 자신들에게로 돌아온 레이몬드에게서 제롬은 도망쳤다. 이건 그의 목표로 가는 방향과 다른 <옳지 않은> 선택이므로.
유리 정원에 갇힌 자신을 구하러 온 레이몬드를 본 제롬은 당황한다. 크리스틴이 팀과 함께 유리 정원을 나가 어떤 짓을 벌일지 제롬은 직감했기에, 일부러 레이몬드를 곤경에 처하게 한다. 마침내 유리 정원은 폭발하고 그는 온몸으로 레이몬드를 보호한다. 그리고 시몬과 레이몬드, 제롬은 랠리엄 저택을 거슬러 내려간다. 그들의 모든 역사의 시작이자 현재인 이곳, 벗어날 수 없는 세계 그 자체인 <클럽>의 모든 공간을 거꾸로 내려가니 그 끝엔 겨울 호수가 기다린다. 폭발음으로 귀가 먹고 등은 유리 조각으로 피투성이다. 넝마의 몸으로 차가운 겨울 호수를 헤엄쳐 수로로 들어가기 직전, 수문이 열리고 어마어마한 물살이 그를 가로막는다. 제롬이 그 굴레에서, 그 궤도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토록 험난하기만 하다.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제롬은 그의 <왕자님>을 소리내어 불렀다. 그리고 물살에 휩쓸렸다. 그들은 그렇게 또 한 번 헤어졌다.
-4부, 호텔 보고타 “아무래도 난 수치를 느낄 줄 모르나 봐”
: 레이몬드는 4부에서 처음으로 <>의 세계를 떠나 “”의 세계에 살고 있다. 열 다섯 이후의 기억을 잃은 채, 그런 척하며 여느 누군가처럼 평범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의 세계를 모른 척, 잊은 척 외면하는 그의 삶은 평화롭고 고요해 보이지만 실상은 언제 깨질 지 모르는 겨울 호수 위를 걷는 듯 불안하기만 하다. “그런 식으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요. 문제를 방치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으니 적절한 선에서 행동을 보여야 한다”는 블랑 선생의 말. 블랑은 프랑스 어로 ‘흰 색’, 즉 화이트, 제롬을 연상케 한다. 제롬을 잊은 척 지내는 것은 본질적 해결책이 아닌 것이다. 머리를 다친 후유증인 두통은 모른 척 방치해 둔 제롬, <>의 세계로 인해 발생했다. 키우던 개에게 이름 붙인 제롬, 제롬의 죽음을 듣고 레이몬드의 두통은 심해져만 간다.
제롬과 레이몬드는 15년 동안 <>에 세계에 함께 있었지만, 털보에게 납치당한 토요일 밤에 혼자 외로워 보이는 잘생긴 남자는 “”의 세계에 있다. 그러다 문득 제롬 자신으로 돌아 갈때면 <난 아무 자격도 없어.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마찬가지>라고 <>세계에서 말한다. 지난 15년 동안 제롬은 스스로가 레이몬드에게 다가설 자격이 없다고 여겼다. 그 자신이 바로 레이몬드를 불우한 삶 속으로 빠뜨린 가해자이므로. 그래서 그에게 사랑을 느끼는 순간마다 제롬은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지금 두 사람은 “”의 세계에 있다. 레이몬드는 <>세계의 기억을 잃었다. 그러므로 지금의 제롬은 “수치를 느낄 줄 모르는” 사람인 척 레이몬드와 사랑의 도피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제롬 자신이 아닌 그 무엇으로 위장해서라도 기억를 잃은 레이몬드에게 갈 수 있다면. 그것이 제롬이 벌려 놓은 런던의 복수를 뒤로 하고 당장 미국으로 날아 온 이유의 전부다. 제롬은 그렇게 여전히 <>과 “”세계의 사이에서 자기모순과의 격렬한 싸움 중이었다. 그들은 백설공주와 조지라는 이름으로 호텔 보고타에 머물렀다. 백설공주는 동화 속 인물이기에 제롬의 현실과 달리 사랑의 도피로 영원한 사랑을 이뤄낼 수 있을지 모른다.
말리부 해변에서 맛있는 요리를 먹고 밤바다를 산책한 뒤 그들의 도피처로 함께 돌아 오는 길, 사막의 밤하늘은 별이 빛났다. 레이몬드가 좋아하는 수영을 하게 해주려 보고타 수영장의 물을 채웠다. 둘 만의 시간이 깊어 가는 어느 순간, 제롬은 지난 15년 간 그래왔듯 자신을 다잡는다. <너는 나를 허락하면 안 돼. 내가 무슨 요구를 해도 받아들여선 안 돼>. 하지만 백설공주는 그럴 필요가 없다. 솔직할 수 있다. ”네가 날 볼 때마다 절벽에서 거꾸로 떨어지는 것처럼 오싹하고, 가슴이 미친 듯이 뛰고, 호흡이 빨라지고, 눈앞이 아득해. 널 처음 만나던 그날부터 그랬어“라는 숨겨온 고백을 할 수도 있다. 관 속에 누워 모든 것을 잊고, 오랜 시간 갈아온 복수의 칼도, 목적도 모두 과거에 묻고 싶어지던 어느 날, 제롬은 백설공주의 꿈에서 깨어났다.
레이몬드는 15년을 모두 기억하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 백설공주의 도피는 끝이 나고 그들의 낙원은 신기루가 되어 사라졌다. 이것은 <옳지 않기> 때문에. 그럼에도 제롬은 레이몬드를 따라 시몬과 셋이 하는 생활을 시작한다. 그곳에서 조우한 말 대가리. 블루벨에서 레이몬드에게 받은 말 대가리가 저항의 증표라고 여기며 카타르시스를 느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제롬은 알았다. 말 대가리는 자신이 레이몬드를 학대한 증거였다. 그런 자신에겐 레이몬드를 사랑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레이몬드는 더이상 제롬을 제롬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 시절 자신의 학대는 모두 잊은 듯 백설공주라는 동화적 결말로 굴복하아고 자신을 설득한다. 제롬은 결국 채찍을 들고 레이몬드를 밀어내야 했다. 그는 함께 살아갈 자격이 없으므로. 레이몬드를 망친 자신은 그의 손에 죽어야만 하므로. 그리고 제롬은 또 다시 채찍을 휘두른 스스로에게 경멸과 혐오를 느끼며 인형의 집을 떠난다.
제롬의 은신처에서 다시 만난 레이몬드는 칼을 맞았다. 제롬은 그를 잃을 지 모른다는 두려움, 또 다시 그에게 폭력을 행한 스스로에 대한 경멸로 레이몬드의 곁을 떠날 수도 그를 만질 수도 없다. 그 은신처에 사랑의 도피를 떠나는 소설을 숨겨놓고 읽는 제롬의 진심, 복수고 뭐고 전부 버리고 레이몬드와 떠나고 싶은 달콤한 갈망. 그것만은 레이몬드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지만 이미 은신처에 온 레이몬드에게 제롬은 차라리 솔직해진다. 그랬기에 시몬도 테디도 모두 질투해 왔던 그의 분명한 애정을 고백할 수 있었다.
요크성 탑 안에서 기술자 명당을 넘기고 오는 길, 제롬은 오랜 방황 끝에 마침내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굴복을 한다. “너를 원해.” 제롬이 마침내 <>세상으로 해방된 순간이었다. 추악한 자신을 용서하지 말라고, 증오해달라는 제롬의 고백에 레이몬드는 답한다. 증오는 <괴물>들의 연대라고, 우리는, 너는 <괴물>이 아니라고. 우리는 단지 어리석을 뿐. 어리석은 제롬은 끝내 말하고 만다. 레이몬드 너를 사랑한다고. 제롬은 자신에게 씌워진 오래된 덫을 벗는 순간 총에 맞았다. 공주는 말에서 미끄러졌다. 그들의 시작, <>세계의 입구 블루벨에서 시몬은 레이몬드를 완전히 그 세계로 데려가려 한다. 그래서 시몬을 죽였다. 가까스로 건져낸 레이몬드와 그렇게 또 안녕. 마지막 헤어짐이었다.
이제 제롬은 호텔 보고타에 있다. 그에게 미처 들려주지 못한 대답을 하러. 앞으로 너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블루벨의 추운 여름, 래버햄에서 내민 손, 렐리엄의 불타는 유리 정원, 다시 블루벨. 삶의 무수한 순간을 건너 드디어 너에게 왔다. “나와 함께 떠나줘” 늘 상상했던 그곳, 파도조차 밀려오지 못하는 머나먼 그곳으로. 제롬과 레이몬드는 결말을 아는 소설의 주인공이 되어 마침내 그곳으로 간다.
-5,6부. “네가 호텔 보고타에 있어서 기뻤어”
우리는 이제 제롬을 안다.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말 한 마디를 해도 두세 번 꼬아 비틀던,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속내를 숨기고 도망갈 틈을 엿보던 제롬은 이제 없다. 제롬은 간절히 레이몬드를 원하고 그와 함께 살아 가는 삶을 원한다. 비열하고 졸렬한, 교활하고 비겁한 밤비는 자신이 저지른 과거는 모른채하고 레이몬드 곁에서 마음껏 사랑하고 싶어진 그저 평범한 사람이다. 얼간이와 주정뱅이가 되어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고 때론 눈을 치우고 때론 지난 삶의 궤적에 울적해하기도 하며 그렇게 사랑하고 싶은 한 남자일 뿐이다. 왕자님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싶어하는 제법 귀엽고 수줍음을 타는 낯을 가리는 공주일 뿐이다.
이제 제롬은 안다. 그는 힘껏 내리박은 못처럼 레이몬드의 삶에 박혀 꼼짝도 하지 못할 것임을. 이제 두 사람은 단둘이서 그저 조용히 살아갈 것이다. 그들이 겪었던 지난날과는 완전히 다른 고요하고 평온한 나날들을. 이제 레이몬드는 안다. 제롬의 초록색 눈동자 안에 일렁이는 오로라를. 아름다운 커튼 너머에 무엇이 그들을 기다리는 지를.
우리는 이제 제롬에 대해 결론 내야 한다. 그는 레이몬드 인생의 남주다. 그들이 그리는 저급한 통속 소설 속 유일한 남주다. 이 책의 모든 표지, 말-통나무집-토끼가면-사과-오로라까지. 모두 제롬과 레이몬드의 이야기임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빗소리의 정체
<클럽>에서 정신을 잃던 날, 익숙한 초록 눈과 차가운 손을 느끼기 전 들었던 빗소리
호텔 보고타에서 수도관이 역류하던 날 제롬이 잠에서 깨기 전 들은 빗소리.
말리부 해변 데이트를 마치고 돌아온 보고타에서 마치 빗소리처럼 들려는 제롬의 씻는 소리
제롬의 품에서 잠드는 보고타의 밤마다 잠결에 들리는 빗소리
미스터 존의 자객에게 칼을 맞고 제롬의 은신처에서 맞이하던 어느 아침 느껴지는 물비린내와 빗소리
제롬이 마약 제조 기술자 명단을 말하는 순간 조용해진 탑 안에서 갑작스러운 빗소리
시애틀에서 스파이 업무 중인 제롬의 사랑 고백과 함께 들리는 빗소리
그들이 들은 모든 빗소리는 일종의 전조였던 것이다. 늪에서 나와, 호수를 헤엄쳐, 물살이 들이치는 수로를 지나 운명을 거스른 너와 내가 사막의 밤에 굽이 치는 파도를 따라, 파도에 휩쓸려 닿게 될 그 곳을 예고하는 물소리. 너와 내가 함께 맞이할 무수한 바다가 들려 주던 파도 소리였다.
*유리 정원과 호텔 보고타
티모시의 유리 정원은 현실과 철저히 분리된 세계다. 유리 밖 겨울과 달리 정원 안은 따뜻하고 아름다운 열대 우림으로 감싸여있다. 그 정원에 감금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다. 티모시의 유리 정원은 돈웰 형제가 만든 감옥이다. 그들 소유 감옥에 감금된 <>의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제롬, 레이몬드, 시몬 그리고 크리스틴.
유리 정원에서 제롬은 말끔한 차림으로 무언가 끄적이고 있다. 그는 계획하고 있는 것이 있는 상태로 이 곳에 머무르며 티모시에게 협상을 하고자 한다. 어쩔 땐 레이몬드를 잡아 티모시에게 넘기기도 한다. 그것이 바로 제롬이 <>의 세계를 살아가는 모습이다.
레이몬드는 티모시에 의해 유리 정원에 감금당했다. 함께 감금당한 크리스틴의 방을 오가며 그를 살피고 토닥이기도 한다. 시몬과 제롬의 도움으로 유리 정원을 탈출한 적도 있으며, 티모시를 겁박해 유리 정원으로 끌고 오지만 그에게 얻어 터지기도 한다.
그리고 시몬. 시몬은 티모시의 지시로 유리 정원에 감금된 레이몬드를 감시하며 돌본다. 그는 레이몬드에게 <당신을 구해 줄게>라는 약속을 하기도 한다. 막상 시몬이 정원에 갇혔을 때 시몬은 줄로 손이 묶여 있으나 실상은 묶이지 않은 줄이다.
그리고 크리스틴. 그는 정신이 이미 나간 채 그곳에 감금되어 있다. 그는 오래 동안 복수를 계획했지만 유리 정원에 자발적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끝내 티모시와 함께 죽으며 그의 유리 정원을 산산조각낸다.
이렇듯 네 사람이 유리 정원에서 지낸 모습과 최후는 <>세계 속 그들의 삶과 동일하다.
호텔 보고타는 어떠한가. 그곳은 제롬이 택한 사랑의 도피처다. 레이몬드는 제롬에게 납치 당해 그곳에 감금되었지만 언제든 자유로이 오갈 수 있다. 호텔 보고타에서 두 사람은 <>의 세계를 잊고 “”의 세계를 누린다. 함께 바닷가로 데이트를 나가고 단 칵테일을 마시고 수영장에 물을 받는다. 자격 없는 자격은 잊고 오래 된 마음을 고백한다. 통속 소설처럼 동화처럼 행복한 엔딩을 꿈꾼다. 그들이 서로를 가두고 싶던 도피처는 사막의 신기루처럼 아스라이 사라질 듯 하여도 그곳은 실재한다. 다시 돌아오고, 약속이라도 한 듯 이곳에서 너를 기다리는 이 곳. “”세계를 여는 비밀의 문이다. 정오의 자동차 질주에서 통속 소설을 읽던 기차 여행, 그리고 호텔 보고타를 통해 두 사람은 숲 속의 오두막으로 간다. 이들의 이야기도 여느 소설과 동화처럼 행복한 결말을 향하고 있기에.
*같은 장소, 다른 상황 & 같은 문장, 다른 세계
이 긴 이야기에서 다른 상황임에도 같은 문장이 반복되어 쓰이는 경우가 꽤 있는데, 처음과 달라진 상황에 전율이 느껴지기도 한다.
-블루벨의 낡은 펍 앞에서 : 몹시 추운 4월 어느 날 한 시간 쯤 기다리자 캐딜락이 왔고 푹신한 크림색 시트에 몸을 파묻자 얼어붙는 몸이 녹았다. 한 번은 불우한 삶으로 들어가는 캐딜락이었으나, 다른 한 번은 불우한 삶으로부터 세상으로 나가는 캐딜락이었다. 미키가 레이몬드를 데리러 왔다. 고로 불우한 삶을 벗어나 제롬을 향해 가는 여정인 셈이다.
-이제 우리는 <제롬>에 대해 알아야 한다 : 기숙사 꼭대기층 소년들에게 대해 설명하던 처음의 순간, 그리고 물살에 쓸려간 제롬과 헤어진 지 2년 후 미키에게사 그의 소식을 들을 때. 처음의 문장과는 다르게 인생의 모든 것이 되어 버린 제롬의 무게를 느낄 수 있다.
-버릇없는 개아가는 매로 길들여야지 : 이 문장은 총 네 번 등장한다. 블루벨에서 조지가 레이몬드를 개로 길들이려 할 때, <클럽>에서 티모시가 레이몬드의 가면을 벗겨내며, 그리고 레이몬드가 랠리엄 자택에서 티모시를 폭행할 때. 레이몬드는 휴와 티모시에게 받은 굴욕을 고스란히 되돌려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호텔 보고타의 도피를 끝내고 시몬의 집으로 온 제롬이 말채찍으로 레이몬드를 후려칠 때. 애써 목적을 상기시키려는 제롬의 복잡한 심정이 느껴진다.
-초코, 바닐라 아이스크림 : 칼이 레이몬드에게 둘 중 무엇을 좋아하는지 물었던 질문, 앨런을 따라 마약상담센터를 들린 후 함께 먹은 것. 두 사람 모두 벼랑 끝에 서 있는 레이몬드에게 조건 없는 손길을 내민 선량한 친구였다.
-안나: 안나는 레이몬드가 학교에 도착해 처음으로 이름을 알게 된 사람이자 레이몬드가 마지막으로 죽인 사람. 그녀가 처음 건넨 초록 목도리부터 입고 있던 초록 블라우스까지, 제롬의 사람임을 온 몸으로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작열하는 뜨거운 태양 속을 뚫고 뻥 뚫린 도로를 제멋대로 질주할 수 있었다. 신호등도 없는 길에서는 차선조차 의미가 없었다. 얼굴을 태우는 햇빛과 미적지근해진 맥주와 바람결에 담뱃재를 털어 내며, 달리고 싶은 만큼 달렸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는 머나먼 행성의 노래 같았고 우리는 멜로디에 제멋대로 가사를 붙여 노래했다. : 제임스가 모텔에서 타 죽고 다시 붙잡혀 돌아오는 고속 도로에서. 그 때는 ‘무릎 위의 지도는 열린 차창 너머로 날려 보내고 그저 무턱대고 나아갔다.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는지, 어디에 닿고 싶은지, 뭘 이루고 싶은 건지 그런 걱정들은 전부 잊어버린 채, 우리는, 나는, 래버햄에 도착했다.’ 였고 미키와 리처드, 찰스와 함께 휴가를 떠날 때는 ‘무릎 위에 지도는 어느샌가 사라졌다. 무엇을 외면하는지, 어디로 향하는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그런 걱정들로부터 도피하며, 나는, 래버햄에 도착했다’. 로 조금 달라졌다.
-좀 더 자. 긴 하루였잖아 : 처음 가 본 물스비 <클럽>에서 정신을 잃은 레이몬드에게 제롬이. 이때는 <좀 더 자. 긴 하루였잖아>지만 보고타 호텔 이후 시몬의 집에서 셋이 함께 한 새벽, 떠나려는 제롬을 붙잡은 레이몬드는 “좀 더 자. 긴 하루였잖아”였다.
-타당해 : <켈리>에 자신을 빠뜨린 시몬에게 배신감을 느껴 달려든 레이몬드가 <사람을 늪에 처넣었으면 그 대가는 치러야지>라고 말했을 때 시몬의 대답. 요크성에서 제롬을 쏘고 함께 블루벨로 모두를 데려온 시몬이 레이몬드에게 총을 겨누며 한 말. 시몬은 결국 혼자서 <>의 세계에 갇혔다.
*<불우한 삶>이 “신의 세계를 여는 커튼”에 이르기까지
15년의 세월의 이야기 속에서 레이몬드는 정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
그의 불우한 삶의 시작이 401호에 배정된 것인 줄 알았으나 그 내막엔 미스터 존이 있었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실상 그는 탄생 부터가 불우한 삶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는 상황에 굴복하지 않았다. 꼭대기층 소년들이 레이몬드라는 인간과 옷을 불태웠으니 그 역시 그 소년들을 불태워 죽였다. 그들의 사냥놀이와 게임판에서 레이몬드는 얌전히 사냥당하지 않았다. 블루벨에서 당한 참상이 그저 예고편이라 여겨질 정도로 래버햄에선 지옥 보다 처참한 지옥이 그를 기다렸다. 블루벨에서 저지른 죄가 있기에, 애써 잊은 칼에 대한 참담함이 레이몬드를 바닥으로 끌어들였다. 더 많은 군중에게, 더 참혹한 행위로 그는 학대당했다. 블루벨의 화재가 올가미가 되어 래버햄의 레이몬드의 목을 옥죄었다. 그럼에도 그는 굴복하지 않았다. 도주하려던 레이몬드가 올가미에 걸려 붙들렸기에 조지를 올가미에 메달아 죽였다. 짐승이 가장 짐승다울 때 덫에 걸리는 거라던 <올가미>씨도 올가미로 죽였다. 그들의 토끼몰이에도 레이몬드는 얌전히 몰이당하지 않았다. 꼭대기층 소년들이 그의 삶을 주무르도록 두지 않았다. 그는 죽지 않았다. 그런 진창 속에서, 그 늪에서, 그 수로에서 레이몬드는 결국 스스로 살아 남았다. 강인한 육체와 그보다 강인한 정신으로. 과거의 불우한 삶에 좀먹혀 자신의 인생을 살지 못하고 복수만을 쫓아 산 시간도 있었다. 어리석기에 헤맨 시간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모든 불우한 삶의 종착지는 그들의 불우한 삶이란 진리를 깨달았다. 그는 증오에 잠식되지 않았다. 괴물이 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한 번쯤은, 자의든 타의든 어떤 연유에서든 <불우한 삶>에 발을 디디는 순간이 있다. 운이 나쁘다면 레이몬드처럼 15년을, <그 곳>에 갇혀 사는 이도 존재한다. <어쩔 수 없잖아, 레이몬드. 엎질러진 물인걸.>이란 칼의 말처럼 과거는 돌이킬 수 없다. 흉터는 지워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늘을 살아야 한다. 어리석은 어제의 나를 용서하고 배워야 한다. 완벽한 삶이 아닐지라도, 때로는 어리석을 지라도, 빈 찻잔 만큼의 공간을 찾아낸다면 그 자체로 의미있는 삶인 것이다. 사랑하는 이의 곁에서 나를 위한 달콤한 차를 즐기는, 그 만큼의 여유가 있는 삶을 위해 우리는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다. 온 몸을 던져 이를 알리는 레이몬드의 긴 이야기, 바로 이 글 <불우한 삶>이다.
lol***구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