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는 생의 훈장이었다. 어제를 버티고, 오늘을 버티며 내일도 버텨낼 수 있는. 당장에라도 자살할 것 같은 권태를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이기도 했다.
조각은 늘 그를 한계로 몰아갔지만, 돌 위로 영혼을 새겨 넣는 순간만큼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다. 가문도, 부친도, 작위도, 신분도, 그 어떤 권리도, 의무도. 그에게 있어 조각은 아편보다 더 지독한 중독이었다.
눈 아래가 퀭하고 피부는 창백했으며 드문드문 상처가 있긴 했으나 남자는 기본적으로 매우 미형인 얼굴이었다. 그저 잘생겼다는 말로는 부족한 아름답고 날카로운 선. 고약한 미소 너머로는 품위마저 느껴졌다. - 75p, 에런 위즈필던(수) 외모 묘사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가 울렸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 곳에도 갈 수 없는 무력감은 부패한 권태가 되어 그의 정신을 좀먹어가고 있었다.
테어도어. 조금도 익숙지 않은 제 이름이, 맥퀀은 그 순간 심장을 파고드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테어도어.
나의 이름.
저를 똑바로 응시하며 부르는 그 이름이 마치 온몸을 휘감는 가시덩굴 같다는 착각이 일었다. 태어나 어미를 처음 만나는 새끼처럼 괴의할 정도의 맹목적인 감정이 피어올랐다.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오두막 내부는 크게 세 공간으로 나뉘어 있었다. 자신이 지금 서 있는 커다란 방과 식당, 그리고 굳게 닫힌 작은 방까지. 대부분의 필수 가구들은 지금 있는 탁 트인 공간에 모두 있었고, 식당에는 최소한의 조리도구가 있었으나 사용 흔적은 거의 없었다.
저 사나운 사내의 손에서 탄생한 작품은 과거 한 시대를 풍미한 대가들의 작품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훌륭하고 경이롭기까지 했다. 물론 몰래 본 대가로 저 야생짐승의 분노 섞인 폭언을 들어야 했으나 그가 받은 감동에 비하면 아무렇지도 않았다.
보기에도 아픈 상처를 달고 다니면서도 주인은 실수라도 앓는 소리 한 번 한 적이 없었다. 치료하는 모습조차 본 적 없었다. 마치 상처 속에 제 몸 하나를 방치하는 느낌이 들어, 그럴 때면 묘하게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 104p
단정하고 세련된 외양 어디에도 돌가루를 뒤집어쓴 가난한 조각가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고상함 마저 풍기는 차림의 거울 속 사내는 다시 화려하고 값비싼 감옥으로 돌아가는 완벽한 죄수였다. - 108p
"뭐가 그렇게 좋은 거지?"
"욕이나 먹을 줄 알았는데 정말로 구해주시겠다고 하니 좋잖아요."
"그게 신나서 꼬리를 흔들 일인가?"
"•••표현 좀 부드럽게 해주십시오. 제발." - 108p
문득, 에런은 그곳을 지키는 개를 떠올렸다. 아주 건방지고, 고약스러운 개. - 119p
에런은 제 목을 죄는 현실을 타개할 마음 따윈 없었다. 또한 지금 누리는 부와 권력을 버릴 마음도 없었다. 수차례 시도했던 반항과 도피가 어떤 끔찍한 방식으로 돌아오는지를 오랜 시간을 들여 학습한 탓이다. 그저 생을 갉아먹는 권태와 증오를 잠시라도 잊을 수 있는 자극을 사랑했다. 술과 아편도 그러했듯 오두막의 개 또한 변덕의 일환이었다.
'버리면 그만이지.'통제할 수 없이 엇나가고 있음을 자각하면서도 에런은 끝까지 이 모든 일탈이 자신의 통제 속에 조절될 수 있으리라 믿었다.- 119p
지금 두 사람이 알고 있는 개의 이름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테어도어. 누구도 아닌 제가 지어준 이름이다.
개.
에런은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마음속으로 읊조렸다.
나의 개.
남자는 개였다.
내가 주워 내가 살린 개.
나만을 기다리는 개.
- 129~130p
느리게 눈꺼풀이 열리고 꽉 잠긴 녹색 입자가 드러났다. 에런은 저 색과 닮은 보석을 잘 알았다.
에메랄드, 모친이 가장 사랑하는 보석이었다.
- 133p
상처가 가득한 주인의 얼굴을 보자 다시 심장이 뻐근해졌다. 너무 아파 보이는데, 아프다는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누가 저 사람을 때렸을까. 누가 저 사람을 상처입혔을까. - 133p
에런은 제 위치가 가진 힘을 견고히 다지고 자신보다 낮은 이들을 찍어누르는 데 스스럼이 없는 축에 속했다. - 141p
흐릿해지는 정신 속에서 그는 자신의 오두막을 떠올렸다. 화창한 녹음과 청명한 공기. 그 안에 자리 잡은 절대적인 공간을.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를. - 142p
이마부터 턱까지 이어지는 선이 섬세하고 날카롭다. 왕족이라 해도 손색없을 정도의 기품이 느껴지는 외모였다. 그러나 그 안으로 새카맣게 썩고 곪아버린 몸 또한 노집사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진실을 직시하기 보다 외면하고 포장하는 쪽을 택했다.
- 143p
맥퀀이 관찰한 에런은 몹시 예민하고 폐쇄적인 사내였다. 포악하고 신경질적이나 극도로 조심스러웠고, 그만큼 마음의 빗장이 견고한 이였기에 한 치의 틈도 허락하는 법이 없었다. - 146p
맥퀀은 자신과 주인의 관계가 조심스럽게, 아주 미세한 형태로 바뀌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주인은 가끔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풀어진 모습을 제게 보여주곤 했다. 물론 상대는 절대로 인정하지 않겠지만. - 146p
붉게 물든 머리칼이 오후의 햇볕을 산란했다. 제 손으로 창조한 색이었다. - 150p
"태양을 담고 싶었는데 꽃이 됐구나." - 150p
처음 보는 순간 느꼈던 강렬한 끌림 그리고 동시에 들이닥쳤던 거북스러움은 의식을 차린 후 지금껏 맥퀀의 심장을 지배하는 양가감정이었다. 의식을 차리고 처음 본 사람, 마치 태어나 처음 만난 어미를 따르듯 끌려 오는 강렬한 열망과 맹목. 조절할 수 없는 마음. - 151p
과거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사람도, 사건도, 감정도, 아무것도.
그럼에도 맥퀀은 막연하게ㅡ 지금 느끼는 이 감각이 이전에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종류이리라 확신했다. - 152p
모든 상황이 목을 죄는 순간까지, 에런은 제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어차피 바꿀 수 있는 일은 없었다. -164p
제 모든 것은 아비의 손아귀에 있었으나 단 하나 그 궤를 벗어난 존재가 있었다.
오롯이 저 혼자만이 사는 공간.
나만을 위한,
나의 것.
그리고 그곳을 지키는 근본 없는 개.
- 165p
타인과의 관계가 어색하고, 어색하고, 어색한 사람. 기본적인 감정 교류와 공감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 그것이 받은 적이 없고 경험한 적이 없음에서 나오는 무지임을 맥퀀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 168p
과거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모르면 모르는 만큼 에런과 새로운 기억을 쌓아가면 될 일이었다.
- 174p
돌아가자.
돌아가자. 우리의 오두막으로.
맥퀀은 그 말이 왜 이리도 아프고 좋은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 179p
"주인님."
"다음엔 저도 그려 줄 수 있습니까."
"아니면 제 모습을 조각해주셔도 괜찮습니다."
- 181p
무엇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였나. 기억나지 않는 과거보다는 현재에 집중하는 게 맞았다.
지금 내 앞에 서서 나를 보는 당신에게만 집중하고 당신을 위하고 싶다는, 그런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이 감정이 동정인지 연민인지 혹 가시를 세우고 있으나 상처 가득한 주인에 대한 하인의 어설픈 충정인지는 모르겠지만...
- 183p
개의 눈동자는 진녹색이었다. 에런은 그 색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꾸만 보다 보니 그런 마음도 희석되는 듯했다. - 195p
괴기스럽기까지 한 아비의 분노와 폭주는 새삼스러울 것 없는 일상이었다. 늘 그렇듯 제 영혼을 괴멸하길 기다리고 잠깐의 폭력만 견디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사태를 관망하던 중이었다. - 198p
짧은 되뇜을 끝으로 사랑이라는 이름의 폭력이 무차별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살과 살이 닿고 뼈와 뼈가 닿는 끔찍한 소리가 삭막한 공간을 가득 채워갔다.
죽여버리고 싶다.
정말 죽여버리고 싶다.
머리를 박살내고 갈가리 찢어 뜨거운 불꽃에 저 늙은 몸뚱이를 태우고 싶다. 자세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쏟아지는 폭력 속에서 에런은 엉망으로 구겨진 그림을 곁눈질했다. 스케치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제 삶처럼. - 199p
너는 이상하다.
너는 내게 언제나 불쾌했던 기억을 조금씩, 그러나 확연히 바꾼다.
너는...
- 201p
늘 나무 고목처럼 뻣뻣하고 고고하기만 하던 이가 한순간에 허물어지는 모습이란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었다. 눈시울은 자꾸만 뜨거워졌다.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나. 도망가라고, 때릴 것 같으면 누구에게라도 도움을 요청하고••• 도망가라고••• -202p
콘웰은 감옥이었다.
그의 날개를 꺾고 발목을 자르고 눈알을 도려내는 감옥.
가장 화려하고 장엄한 감옥.
- 204p
"...제가."
"죽일까요."
다독이듯 하는 말에 에런은 가만히 눈을 떠 오로지 저만을 보는 눈과 마주했다. 투명한 녹음 안에 존재하는 이는 오직 저뿐이었다.
순수한 초록의 숲, 자신의 숲이다.
충직한 개는 오직 주인의 안위만을 살피고 있었다.
"제가 죽여드릴까요."
"왜 울지?"
"당신이 울지 못하니까."
"...당신이 죽이지 못하니까."
"너는 이상해."
"지나치게 감정적이야."
"당신은 더 이상합니다."
"......."
"어딘가 고장난 사람 같아요."
- 204~206p
"그런 눈으로 볼 필요 없어. 이런 건 익숙한 일이야."
"...고통에 익숙한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도 고통에 익숙한 사람은 없어요."
- 206p
너는 위험한 개다.
너는 결국 내 모든 것을 망치고 말 것이다.
"테어도어."남은 것은 그저 어쩔 줄 모르는 자신의 개를 끌어안고 싶다는 그 비루하고 단순한 욕망뿐이었다.
- 206p
"이름•••."
"이름을 알려주세요." -207p
에런은 많은 이름이 있었다.
신분을 감추기 위해 아무렇게나 지어 불렸던 이름. 거래를 위해 사용한 이름, 두 번 세 번 감춰 일을 진행하기 위해 지어 놓은 이름, 그러나 어쩌면 본래 이름보다 더 많이 불렸던 가명들.
에런은 당연한 듯 수많은 이름 중 하나를 말하려 하였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입 밖으로 나온 것은 전혀 다른 이름이었다.
- 208p
'내가 이 사람을 성애의 대상으로 보았던가. 여겼던가. 생각했던가.'
희미한 의문은 곧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아닐리 없었다. 주인에 대한 충성심. 마음속 검은 마귀가 혀를 차며 그를 비웃었다. 충성심일 리가. 처음 본 순간부터 눈을 떼지 못한 주제에. 탐욕 가득한 시선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핥고 범한 주제에. 혹여 그 부패한 흑심이 들킬까 봐 걱정과 동정으로 포장하고 또 포장한 주제에. - 209p
그 와중에도 상처를 쓰다듬는 손길은 너무도 조심스러워, 에런은 제 앞에서 어찌할 줄 몰라 하는 남자를 더는 견딜 수 없었다. 저 어리석은 개는 자신의 목을 죄던 죄악을 죽여주겠노라 말했다. 너무도 선뜻,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 211p
참으로 충성스럽고 충실한 개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저 대신 울어주는 눈물이, 너무나 어이없게도 사랑스럽다고 느꼈다. - 211p
웃음소리가 나지막이 울렸다. 힘없고 무기력한 주인의 웃음소리가 아파, 맥퀀은 저도 모르게 콧잔등을 찡그렸다. 처음에는 그저 저를 비웃는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웃음 속에 섞인 쓸쓸함을 알아차린다. 이유를 알 수 없어 안타깝고, 애틋하고, 그만큼 더 사랑스러웠다. 웃게만 해주고 싶었다. 주인을 괴롭히는 모든 사람을 없애고 싶었다. - 218p
"이상합니다."
"•••뭐가."
"모든 게요. 당신과 이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본 적 없어서요."
"••••••."
"감히 품어서는 안 될 마음이라고만 여겼습니다•••."
"하지만 당신과 입을 맞추고 나니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어요."
"••••••."
"돌이켜보면."
"처음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신경 쓰였습니다."
"••••••."
"같은 남자였지만 눈을 뗄 수 없었어요."
"••••••."
"보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시선이 갔습니다. 그런 제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통제할 수 없었어요."
- 224p
"되도록..."
"되도록 오랫동안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
- 227p
맥퀀은 누가 그랬는지, 왜 그랬는지를 묻기보다는 미래를 생각하기로 했다. 이제껏 자신의 주인을 무차별한 폭행 앞에 홀로 두었다면 이 밤이 지난 순간부터 제가 옆에서 지켜주고 그 매질을 막아주면 될 일이었다.
제가 대신 맞거나 혹은 상대를 죽이거나.
어떤 식으로든 지키고 말 것이다.
- 225p
진심으로 부딪치는 다정함이 어색했다. - 227p
상대가 원하지 않기에 그저 알면서도 모르는 척 연기할 뿐이다. 저 교만하고 예민한, 그러나 누구보다 불안정하고 마음 기댈 곳 하나 없는 이의 안정을 위해서라면 자신은 기꺼이 머저리가 되어도 좋았다. 그만큼 함께 있어 주고 싶었다. - 241p
자신의 주인은 상대에게 상처와 모욕을 주는 데에는 익숙하나 진심 어린 호의와 감정을 받는 데는 너무도 무지했다. 알지 못해 더 모나게 해석하고, 더 왜곡해 받아들였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이처럼.
- 250p
잃어버린 과거는 아무 미련 없었다. 숨 쉬고 있는 현재와 앞으로 살아갈 미래가 더 중요했다. 지금 함께하는 사람과 더 오래, 더 정밀하고 깊은 관계를 이어가고 싶었다. - 251p
"과거는 과거일 뿐입니다. 중요한 건 현재고 미래라고 생각해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네. 그래서 저는 계속 당신 곁에 있을 겁니다. 언젠가 당신이 내게 말한...되도록 오래가 아니라 영원히."
- 251p
인생이 늘 그렇듯, 비극의 순간은 일상에서 무수히 일어나는 사고처럼 급작스레 찾아왔다. - 251p
숨겨둔 비밀을 공유하고 시간과 장소를 공유했다.
기억을 나눴다.
- 254p
나의 비열함은 필시 당신을 닮은 것이리라. - 262p
오랫동안 숨겨왔던 제 공간과 시간의 종말이었다. -263p
나는 왜 너의 그 실없는 말들을 떠올리는 것인가.
아무런 무게도,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런 말 따위를...
- 264p
"가지마. 저 괴물이 널 죽일 거야." -268p
네가 죄악이다.
가장 높은 곳에서 놓아둔 흉상이 자신의 죄를 낱낱이 훑어보고 있었다. 사악하고 앙상한 영혼이 그의 잔인함을 비웃었다. 자신은 악마였다. 악귀이자 마귀였다.
- 274p
테어도어.
진실이라곤 조금도 담기지 않은, 하찮을 정도로 가볍고 더러운 기만의 이름이었다.
테어도어.
테어도어.
나의 개.
이곳은 여전히 지옥이다.
- 276p
"기억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고 들었는데."
"네. 하지만 찾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고작해야 몇 개월 남짓이고, 그 사이의 기억을 되찾지 못한다 한들 제 삶엔 아무런 변화가 없으니까요. 지금도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 의미가 없다고?"
'...왜 저러지?'
"잠을 잤다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날보다는 현재와 미래가 더 중요하니까요."
- 283p
"준남작."
짧은 부름에 담긴 감정은 필요 이상으로 무거웠다. 맥퀀은 말없이 그런 에런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네."
"쾌유를 비네."
- 285p
불행은 늘 그를 뒤따랐다.
그는 가장 높은 곳에서 모든 것을 가진 이였다.
또한, 그는 아무것도 갖지 못한 이였다.
- 286p
약혼식이 끝나고 며칠 뒤, 실각한 내각의 전 수상의 후계자인 에런 위즈필던 백작이 아편 과다 흡입으로 인한 급성 쇼크 증세로 중태에 빠지는 사건이 터졌다. 최초로 기사를 낸 크로니클 측에 그의 정보를 넘긴 이의 정체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 287p
2막
제가 실성한 까닭은 그 기억이 모두 허상이 되어버린 탓이다. 분명히 존재했던 시간을 기억하는 이가 이제는 오로지 저 혼자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분명 존재했으나 남은 감정은 아무것도 없다.
- 309p
개의 탈을 쓴 사내였으나 제가 모르는 이였다. 그는 그토록 저를 경멸의 눈으로 보는 개를 키운 기억이 없었다. -324p
푸르던 그 숲에서 오로지 저를 기다리고 저만을 알던 개. 다시는 아편을 하지 말아 달라 울고 내 목을 죄는 모든 것을 죽여준다고 약속했던 그 개는 그 밤 완전히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참으로 하찮은, 싸구려 죽음이 아닐 수 없다. -325p
미친 게 분명했다. 저런 그림 따위에•••. -333p
"누구도 백작님께 아편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약을 취하고 즐긴 것은 오롯이 위즈필던 경의 선택 아니었습니까." -343p
"경이 주장하는 전쟁은 잉글랜드를 위해서요, 왕실을 위해서요, 아니면 클라우스 디우전을 위해서요."
"당연히 잉글랜드와 왕실을 위한 일입니다. 백작님, 모욕적인 발언을 멈추시지요."
"고집이 계속된다면 언제고 그 저의를 의심받기 마련이라오."
- 338p
에런은 문득 몇 년 전 불타버린 웨스트민스터 궁을 떠올렸다. 건축물과 함께 사라져버린 화려하고 장대했던 역사 또한. 빠르게 세운 가건물은 결코 그 유구한 시간을 대변할 수 없었다. 하물며 사람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다. - 343p
언젠가는 당신을...
죽일 수 있을까.
어차피 인생은 단 한 번도 제 것이었던 적이 없었다.
- 352p
곳곳에 오래된 상처가 있긴 했으나 그야말로 오랜 흔적일 뿐, 못해도 몇 년간 도구를 잡지 않은 손이었다. 그것은 조각을 놓았다는 의미와 이어졌다. - 355p
떠오르는 기억은 하나같이 괴롭기 짝이 없다. 생각으로도, 말로도 표현하고 싶지 않다고 여길 정도로. - 362p
좋아한다.
에런은 그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것은 그의 삶에서 거세된 여러 감정 중 하나였다. 어설프게 제게 가르쳐 주려 했던 이도 있었으나 그뿐이었다.
- 371p
짧게 숨을 들이켠 에런은 답답한 표정으로 접이식 테이블 위에 있는 작은 상자를 열었다. 그 모습에 그제까지 여유롭던 눈매가 일순 날카로워졌다. 무거운 적요 속에서 맥퀀은 상대가 꺼내는 물건이 무엇인지 유심히 시켜 보았다. 메릴렌드 산 여송연이다. 아편이 아님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무의식적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순간적으로 지나간지라 두 사람 중 누구도 그 반응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 376p
아아, 어떻게 이용하면 좋을까.
저 애절한 마음을.
- 382p
똑바로 직시하는 눈은 거짓을 말하는 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진실했다. 상대를 속이기 위해 자신을 스스로 속이는 자의 눈빛이었다. - 386p
"에런."
익숙한 부름에 에런은 잠시 숨을 멈추고 눈을 크게 떴다. 남자가 부르는 이름은 제 것임에도 낯설었다.
똑같은 어휘, 똑같은 발음이었음에도.
왜 이리도 다르단 말인가.
- 402p
참으로 가당찮은 연기고 거짓이지.
그러나...
그러나 결국 너는 내 개가 아니던가.
- 405p
2권
평생 모든 욕망이 거세된 삶. - 9p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완전히 길을 잃은 방종하고 실패한 삶.
그보다 더 제 삶을 잘 표현하는 말은 없을 것이다.
- 10p
"내 이름과 내 인생을 걸고 맹세합니다. 나의 마음은 오롯이 마음으로써 당신에게 전달 될 것 입니다." - 16p
"도무지 자네의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어..."
과거도, 현재도.
- 47p
"제가 도망갈 곳이 어딨습니까."
"다 부수고 불태우지 않으셨습니까."
아무 흔적도 찾을 수 없던, 새카맣게 불타버린 공터.
오로지 그것이 전부인 곳.
"돌아갈 곳도 없습니다."
- 53p
바랜 시간 사이로 몇 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싸구려 감정 하나가 갈라진 틈을 비집고 존재를 알렸다. 몇 번을 죽이고 불태워도 끝까지 사라지지 않은 초라하고 구차한 돌조각처럼. - 59p
과장된 열기가 머릿속을 떠다녔다. 물살을 회귀하는 감정은 무언가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잃어버린 마음의 고동을,
지워버렸던 소중한 존재를.
- 63p
테어도어.
저 사내가 또 다시 자신을 보며 그 이름을 부른다면 그때는 제 품속의 남자를 정말로 죽여버리고 싶어질 것만 같았다.
- 79p
"기억하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기억이야 다시 쌓아가도 될 일이니까요."
"지나간 일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
"앞으로의 일만이 중요할 뿐입니다."
- 83p
"검술도 엉망이고."
"사격 솜씨도 형편없고."
"어디 전쟁터라도 끌려갔다간 큰일이겠군요."
"그래."
"아마 반나절도 견디지 못하고 죽겠지."
죽는다.
농담조였음에도 죽는다는 말에 마음속으로 격렬한 거부감이 치솟았다. 심장 어디 한구석이 무너져내리는, 마치 절망감을 닮은 까마득한 기분마저 들었다. 조금의 무게도 느껴지지 않는 말에 잘생긴 눈매가 거칠게 일그러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의외군."
- 84~85p
"여전히 믿을 순 없지만..."
"믿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어."
- 91~92p
맥퀀은 지금 발언대에 선 자가 얼마나 오만하고 권위적인 사내인지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아니. 바닥까지 추락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저자의 자취를 감추고 싶었다. 누구도 그를 우러러볼 수 없도록. 누구도 그에게 마음을 줄 수 없도록. - 98p
"이상해."
"...뭐가 말입니까."
"정말로 자네가..."
"제가...?"
"내게 마음이 있는 것 같아서."
- 104p
"세상은 의도와 과정보다는 결과로 판단하네.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모든 건 결과를 놓고 봐야 해."
- 117p
"자네는 어딘가 멍청한 구석이 있어."
"그러니 모두 잊는 거야. 과거도. 잘못도."
"제가 잘못한게 있습니까."
"나를 기만한 죄."
"...에런."
"떠나고."
"...에런. 도대체...."
"...믿게 만든 죄."
"그게 가장 큰 죄지." -154~155p
"알았으니 내게 입을 맞춰."
"......."
"진심 어린 사과의 마음을 담아서."
"잘못한게 없는데도 해야 합니까."
"...그래도 해."
"...뭐라도 해." - 157~158p
빠아앙--
상념이 깊어지는 순간 다시 증기기관차의 기적 소리가 길게 울렸다. 최신식으로 설계된 상업화의 상징인 철도와 구시대 유물의 상징인 사륜 마차의 궤적이 교차한다. 한 시대가 끝나고, 한 시대를 맞이하는 장면이었다.
- 170p
무시하고 짓밟아도 몰랐을 그 작은 감정의 불씨가 이토록 위험한 맹독이 되어 숨통을 조이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명백한 실수고, 확연한 실패였다. - 199p
"기어코 독을 뱉어내셨구나."
"......."
"네게로."
- 228p
결혼. 전쟁.
막연했던 일들이 현실로 성큼 한 발 더 내디뎠다. 그리고 가까워진 공간 어디에도 누군가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그 사실이 못 견디게 시린 바람을 타고 전해졌으나 맥퀀은 늘 그렇듯 제 감정을 외면하고 왜곡하는 쪽을 택했다.
- 211p
그러나 그는 그런 감정을 그리움이라 말하고 싶지 않았다.
결코, 그런 류의 감정은 아니었다. 그래서도 안 될 사람이었고 그럴 리도 없었다.
- 217p
그러나 그보다 두 살 많은 형제는 종종 저택에서 캘리븐과 마주칠 때면 꼭 이름을 불러주곤 했다. 호기심도, 애정도 아닌 그저 일상적인 부름.
에런 위즈필던이 캘리븐에게 준 관심은 딱 그 정도까지였다.
그러나 누구도 주지 않은 관심이었다.
- 232p
사랑은 한여름 밤의 꿈처럼 달콤하지만, 그 감정을 이어가는 책임은 무겁고 벅찼다. - 240p
너는 참으로 완벽하게 불안정한 감정을 연기하지 않았던가. -255p
아마도 나만이 알겠지.
영원히.
누구도 알지 못한 채 오로지 나만이.
나만이 알고, 나만이 기억하며, 내게만 남은 모습.
그는 삶에서 이보다 더 완벽한 고립을 알지 못했다.
- 267p
같은 고백이나 감정이 달랐다. 색채가 달랐으며 형태가 달랐다.
찬란한 계절은 끝이 났다.
만개한 꽃도 이제는 저물어갈 때였다.
양귀비는 사람의 인생을 망치는 꽃이었다. 그토록 아름다웠던 꽃의 결실은 결국 마약이었다.
너는 변했고,
퇴색된 감정은 불에 태워 묻는 게 옳았다.
- 270~271p
갈가리 찢어야지.
새카맣게 태워버려야 한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단 한 번도 가진 적 없다는 듯이.
'좋아합니다. 진심으로.'
그것은 본디 나의 것이 아니었으므로.
- 271p
"시간을 도려내고 싶군."
"다 박살 내고, 도려내서 태워버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 286~287p
처음부터 끝까지 기만뿐이었던 관계의 종말이었다. - 287p
"그딴 감정일 리 없지. 혼자 꿈이라도 꾸었나 보군."
"아니었다면 미안하게 됐군요. 어찌나 애틋하게 입을 맞추고 믿는다고 속삭이기에 나를 사랑이라도 하시는 줄 알았지."
- 319p
그리웠다. 그러나 그만큼 싫고 두려웠다. 그럴리 없다 하면서도 애가 탔다. 보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숨결이 서늘한 살갗이, 상처가 빼곡한 섬세한 손과 낮은 목소리가, 체취에 묻어나는 쓰디쓴 엽궐련의 향까지. - 323p
"혼자 꿈이라도 꾸었냐고 말했던가요."
"애초에 사랑이 아니었으니 꿈이랄 것까지도 있겠습니까."
- 324p
얼마 남지 않았다.
곧.
곧.
...그러니 조금만 더.
- 325p
애정. 그 말은 형제가 이십여 년간 힘을 가진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당해 왔던 고통을 외면하는 단어였다.
애정이 아니다. 저것은 욕망이고 탐욕이었다. 기괴하게 뒤틀리고 엉망이 되어버린 욕심이었다.
- 328p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 그를 외면하지 않은 이는 망가질 대로 망가졌던 형제뿐이었다.
- 328p
"내가 아니면."
"내가 아니면 도대체 누가 그자에게 총구를 겨눌 수 있지?"
"데본셔? 그 노쇠한 작자 말인가?"
"레스터, 나는..."
"내 몫이네."
"그 사람을 죽이건 상처를 주건 무엇을 하건, 비스필트 백작에게 아주 작은 흔적이라도 남기는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벌벌 떠는 늙은 공작이 아니라 바로 나란 말일세."
"...나만이 할 수 있지."
"마지막은 내 것이네."
- 333p
'테어도어.'
"정말로..."
"정말로, 후회하지 않겠습니까."
"후회하면."
"후회하면 뭐라도 달라지나?"
"......"
- 337p
어리석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순덩어리인 제 마음이 우스워 견딜 수 없었다.
결투신청서의 마침표를 찍는 순간에도, 펠린턴 홀을 찾아가는 순간에도, 봉투를 건넨 순간에도, 마지막으로 돌아서 이곳에 선 순간마저도 맥퀀은 제가 정말로 상대에게 방아쇠를 당겨야 하는 상황을 단 한 순간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 339p
기억은 과거가 되고 과거는 감정이 되어 현재를 삼켰다. - 341p
어째서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 총구의 방향을 바꿨는지, 왜 그 총구가 당신의 머리를 향하고 있었는지, 어째서 그리도 평온한 얼굴이었는지.
마치 내가 당신을 쏘지 못할 것을 알았다는 듯,
그래서 제 손으로 끝내겠다는 뜻이었는지.
왜.
무슨 이유로.
- 346p
내 것이었으니까.
내 것,
당신은 누구도 아닌 내 것이었으니까.
- 348p
사실은 저를 그리 불러도 화가 나지 않았다.
처음으로 누구의 이름으로 부르건 상관없다 여겼다.
그것은 곧 당신이 살아있다는 증거였으므로.
- p355
저 심해의 물결 아래로 황홀한 지옥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 395p
그리고 그제야 맥퀀 레스터는 조금 전 그가 들었던 말을 어설프게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아주 오랜 시간 자신이 공들였던 그 전쟁에서 죽은 이가
누구인지를.
- 409p
당신과 나 사이로 템스 강이 흐를지라도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을 막을 수는 없을 겁니다. 당신의 그 꿀처럼 흐르는 아름다운 황금빛 머리칼과 세상의 바다를 모두 품은 푸른 보석도, 부드러운 살결도, 달콤한 입술조차...
"제정신이 아니군..."
- 412p
느리게 눈꺼풀이 열리고, 그 사이로 진한 녹음이 드러났다.
아주 오래전 두 사람이 잃어버리고 불타 없어져 버린 렘디프의 전경이었다.
- 415p
너는 더 이상 만들지 못한다.
너는 더 이상 내게 요리해주지 못하고
너는 더 이상 내게 서투른 솜씨로 깔개를 만들어 줄 수 없어.
- 417p
나의 개.
그 숲에 갇혀 버려 나오지 못한 나의 개였다.
- 418p
찬란한 태양이 뜨는 아침이면 기억은 어둠 뒤로 사라지고 감정은 추락할 것이다. 너는, 다시 나를 경멸하고 목을 조르기 위해 발악할 테지. 그러니 꿈은 이로도 족했다.
오로지 한 사람만이 알고 있는 비밀의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 419p
귀를 짓이기고 싶다. 번듯한 얼굴을 난도질하고 싶었다. 기만과 추잡한 욕망뿐인 작자의 입에 피스톨을 넣어 방아쇠를 당기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너는 더 이상 더럽고 저열한 죄를 짓지 않는 나의 개로만 남을 수 있겠지.
네 손에 묻은 아편은,
이미 나를 지옥에 빠트린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던가.
- 421~422p
3권
에런 위즈필던은 바다로 떠났다.
기약 없는 여정이었다.
주인은 늘 그렇게 돌아올 날이 정해지지 않은 여행을 떠나곤 했다. 영혼을 소모해 받은 조각을 팔기 위해. 늘 상처를 달고 돌아오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떠났고 결국은 두 사람이 사는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 16p
"유치하다 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이 유치함은 연인 사이에나 가능한 가장 내밀한 감정이지요."
"결국 제 모든 유치하고 졸렬한 마음은 당신을 향한 사랑이자 질투가 아니겠습니까."
"사랑합니다."
"에런, 사랑하고 있어요."
- 22~23p
'내 것.'
성공이었다.
가장 고귀한 불멸이 그의 품 안으로 들어온 순간이었다.
- 24p
펠린턴 홀을 나서던 형제는 홀가분한 얼굴이었다. 마지막까지 비틀린 미소를 지었으나 저택을 등지고 걸어나가는 뒷모습은 역설적이게도 참으로 가볍고 경쾌했다.
콘웰이라는 이름도
가문도
정신이 병들어버린 가족도, 그의 운명을 옥죈 후계자의 굴레도
무엇하나 형제의 걸음을 붙잡을 수 없었다.
- 36p
"아무리 피워도 무엇이 좋은지 잘 모르겠습니다. 불쾌함이 더 크더군요."
[그런데 왜 피는 거야.]
"그래야 당신이 보이고...."
"당신의 목소리가 들리니까...."
- 45p
남자는 한 번도 자신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깊은 관계가 된 후로는 성조차 입에 담지 않았다. 콘엘의 에런 위즈필던이 맥퀀 레스터를 부르는 호칭은 그저 엔필드의 준 남작이라는 작위 명이 고작이었다. - 46p
조악한 솜씨로 염색한 붉은 머리가 찬란하게 빛났다. 분명히 제 손으로 찢고 짓이겨 태워버렸음에도 여전히 뜨거운 화마이자 아름답고 잔혹한 양귀비였다.
- 50p
맥퀀 레스터는 누구보다도 마약의 폐해를 잘 알았다.
아편으로 셀 수 없는 이들의 영혼을 나락에 빠트리는 일에 거리낌 없었으면서도 본인은 연기조차 흡입하는 것을 거부했다. 아편을 하느니 차라리 총으로 자살하겠다는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였다.
- 59p
한때 개러웨이의 마약왕이라는 악명 속에 각종 마약과 아편사업을 호령했던 사내가 아편에 중독된 폐인이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반년에 불과했다. - 60p
죽음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에런은 본능적으로 제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운이 좋아 이곳에서 살아 돌아간다 한들 남은 생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곧 완전한 자유를 의미하기도 했다.
- 75p
벌을 받아야 할 이들은 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 악은 악으로, 피는 피로 돌려받을 것이다. 그것이 에런 위즈필던이 믿는 유일한 진리였다. - 77p
내가 없는 그곳에서, 홀로 울고 있던 나의 주인, 나의 연인,
나의 에런.
- 90p
"내가 내 주인의 목덜미를 물었습니까? 내가 그를 죽였습니까? 말을 해주시오. 캘리븐 경. 내가 그의 개였는지, 내가, 내가...." -99p
조잡하고 졸렬하고 더러웠으나, 그 또한 사랑이었다.
사랑이 아니라기엔 너무나 사랑이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껏, 자신은 에런 위즈필던을 사랑하고 있었다.
- 102p
당신의 말대로 나는 멍청하고 모자라서, 그래서 아무것도 기얻하지 못했지. 모두 다 잊어버리고 그 시간을 쓰레기로 치부했다. 나조차도 그리 여겼는데 누가 우리의 시간을 존중할 수 있을까....
에런,
당신과 내가 아닌... 도대체 어떤 이가. -109p
"사랑?"
"...그런 감정 때문만은 아니네, 그저..."
"내가 아니면 아무도 그 사람과 지옥까지 함께 가 줄 사람이 없네."
"......"
"혼자 두면 안 되니까."
"......"
"그 이유뿐이지."
- 112p
시체를 찾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이 배에 있는 모든 이가 알고 있었다. 알고 있음에도 생각하지 않는다. 언어로도 담지 않는다. 그 사실을 어떠한 형태로 형상화하는 순간 마지막 남은 정신도 무너져 내릴 것을 알기에. - 123p
"자네의 감정이 그저 자네가 겪었던 시간의 잔상일 뿐이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나?"
"이미 오래전 끝나버린 일인데 오직 기억에만 추하게 매달려 여기까지 온 게 아니냔 말이세."
"사실은 아주 오래전에 끝난 이야기인데 말이지.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썩어버렸는데도 그 악취를 맡지 못하고 미련스럽게 그때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은 건가? 어리석게도."
- 130p
손바닥은 순식간에 물기로 젖어 들어갔다.
바래고 썩은 기억이고 감정이었다.
그 감정에 감히 사랑을 붙이고 논할 자는 존재하지 않으리라.
- 131p그리고 끝과 끝에 다다라, 더는 당신의 환상조차 볼 수 없다면 그때는,
그때는 죽으면 될 일이다.
- 137p
"자네와 비슷한 사람이 있었어."
"하나는 가까운 자였지.... 선한 만큼 나약했어. 쓸데없는 죄책감에 짓눌려 살더군. 평생을."
"하나는 그렇지 않은 자였는데...."
"형편 없을 정도로 지성이 없었고 막무가내로 감정을 드러냈지...."
"...나는 그런 것에 면역이 없었어."
- 140p
"알제프. 최선을 다할수록 내 영혼은 썩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네."
"내가 서 있는 곳이 더러움의 끝이 아니었네, 알제프."
"더 더럽고 더 진창인 곳이 있었어. 우리보다 더 악취 나는 이들이 가늠 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아. 그동안은 그 경계에 나의 친구가 버티고 있어서 알지 못했을 뿐이고. 그래, 사실은 가장 더러운 걸 그에게 미뤄두고 나 역시 외면해왔던 거지. 거기까진 빠지지 않겠다 하면서 말이야."
- 144p
연인이 죽어가도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제 손이 너무 더러워 그를 구할 수조차 없었다. 맥퀀은 길가를 돌아다니는 개라도 자신을 경멸하고 비난해주기를 바랐다. 침을 뱉어주길 바랐다. - 150p
내가 테어도어다.
내가 당신의 테오고, 내가 당신의 시어도어야.
내가 당신의 종이고 당신의 개였다.
- 152p
"내가 테어도어였을 때도..."
"내가 맥퀀 레스터였을 때도..."
"당신은 늘 죽고 싶어 했어."
- 154p
잉글랜드의 아편 상인 맥퀀 레스터는 태어나 처음으로 신을 찾았다.
죽어서도 죗값을 치르겠노라고.
모든 죗값을 치르겠노라고.
영원히 고통스러운 지옥 불에 영혼을 태우겠노라고.
그러니 제발,
...제발
주여.
주여, 제발.
주여, 제발 저를 긍휼히 여기소서.
제발 저를 긍휼히 여기소서.
단 한 번이라도 그에게 내가 당신의 개였노라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소서.
저를 구원하소서.
- 168~169p
'아니. 나는 죽었지. 아주 비참하고 고통스럽게 죽었어. 자네는 나의 썩은 시체를 마주하게 될 거야. 그렇다면 나는 절망에 빠진 자네를 보며 기쁘게 웃겠네.'
과연 연인다운 심술이었다.
"아뇨, 그렇다면 나는 당신의 무덤을 파내어 시체를 꺼내 입을 맞추겠습니다."
- 174~175p
맥퀀은 환하게 미소지으며 생각했다.
나는 지옥에 갈 것이라고.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 죽고 또 죽어도 눈을 뜨는 그 모든 곳은 지옥일 거라고.
- 176p
죽어도, 당신의 시체 앞에서 죽으리라. 당신에게 죄를 고하고 용서를 빌며 죽으리라. - 179p
"...주인님."
"...이제 그만 일어나요."
"제가 왔습니다."
"당신의 개가...."
"당신의 개가 왔습니다..."
"너무 늦었습니다...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군요."
"저는 이제 장작을 팰 수 있고...."
"요리를 할 수 있죠...."
"허브로 깔개를 만들어 드릴 수도 있답니다."
"그러니 돌아가요."
"우리의 숲으로."
"우리의...."
"우리의 오두막으로.... 에런, 제발...."
- 194~194p
당산의 위태로움과 결벽과 사나움과 잔인함을 사랑했다. 아이 같은 잔혹함이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보통 사람처럼 생각하지 못하는 당신의 고장 난 심장과 머리가 사랑스러웠다.
당신은 이상한 사람이었다. 어딘가 철저히 망가졌고 결핍되어 있었다. 그래서 영원히 곁을 지켜주리라 맹세했다. 그 맹세가 얼마나 가볍고 덧없이 사라질지 알지 못한 채.
- 194p
"테어도어."
"...너는 기어코 이곳까지 나를 죽이러 왔구나."
- 196p
우습다.
너는 늘 감정적이었다.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너의 정의는 초라하나 맹목적이었고 비열하나 용맹했다. 한 사람이 가진 양면성이 더 마음이 갔다. 너의 그 순수한 악이 마음에 들었다.
우리의 기억은 썩어 문드러지고 악취 나는 쓰레기였으나 그조차 어떻단 말인가.
그 숲에 존재하던 이는 오직 두 사람뿐이었으니 그로 족할 일이었다.
- 197p
"그 신은 저는 아니어도 당신은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저의 죄를 사해주실 겁니다. 당신을... 당신을 살려주실 겁니다."
- 204p
다시는,
다시는 당신이 당신의 의지로 나에게 오는 일은 없으리라.
- 248p
기억이 돌아왔다는 차마 말을 할 수 없다.
내가 당신의 개였다고도 말할 수 없다.
사랑한다고도 말할 수 없다.
영원히.
- 264p
이 새로운 발명품은 시대와 시간을 가르고 과거의 유물을 청산하는 수단이었다. - 265p
"이제 나는 자유야."
"나는 어디로든 갈 수 있고 무엇이건 할 수 있지."
"우리의 시간이 마주할 수 있었던 시간은..."
"아주 오래전, 찰나였을 뿐이네."
- 266p
그저 추억일 뿐이다. 한 사람은 헤어나오지도 못하고 한 사람은 잊기로 한. 비록 같은 기억과 감정을 공유했어도 교차점을 지나는 순간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이었다. - 296p
"삼 년만이군요...."
"삼 년입니다. 당신의 목소리를 다시 듣기까지 걸린 시간이."
- 299p
"너는 나를 속였어."
"나를 기만하고."
"...나를 지웠지."
- 332p
"나를 경멸하며 사랑을 입에 담았지."
"그렇지 않습니다."
"너는 늘 내 등 뒤에 칼을 꼽기를 기다렸어."
"...그렇지 않아요."
"나를 속이고... 나를 배신하고...."
"......."
"나를 싫어했지."
- 342~343p
"당신이 나를 무어라 부르건. 원망하고, 경멸하건...."
"당신이 살아있으면 족합니다."
"그리고 그저 그런 당신을 곁에서 볼 수 있으면 그로 족합니다."
- 345p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당신을 위해 나를 희생할 수 없습니다."
"떠날 수 없습니다."
"절대로...."
"제가 곁에 있는 것이 싫다면...."
"그때는 저를 죽이십시오."
"완벽한 죽음이 올 때까지 몇 번이고."
"기꺼이 수용하겠습니다."
"죽이고...."
"불태우고...."
"도려내서...."
"당신의 세상에서 저를 지운다 하여도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살아있는 동안은 불가능합니다."
"버리지 말아주십시오."
- 372~374p
몰려드는 감정에 익사 당할 것 같은 밤이었다. - 374p
맥퀀은 에런 위즈필던을 이루었고 이루고 이룰 모든 것들이 영원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더는 자신의 두 손이 연인을 훼손하고 그가 가진 것을 망치는 파괴자가 아니기를 간절히 바랐다.
영원히 구원자가 될 수 없을 테니, 그것만이라도 바랐다.
- 392p
"기차를 타고 오는 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
"당신보다 조금은 더 오래 살고 싶다는."
"곧 죽을 사람 취급하는군."
"그런 건 아닙니다."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실제로 그럴 텐데."
"그렇게까지 오랜 시간은 필요 없습니다."
"일 년 정도면 좋겠습니다."
"일 년?"
"당신의 장례를 치르고..."
"증기선을 타고 지구의 반대편까지 가는 겁니다."
"그곳이 어디기에."
"글쎄요. 그때가 되면 알게 되겠지요."
"그렇게 반대편 땅덩어리를 찾아갈 겁니다. 그곳에서도 가장 끝을 택하겠지요."
"오래 걸리겠군."
"그래서 일 년 정도로 잡았지요."
"그리고?"
"자살할 겁니다."
"......"
"즉어서도 당신에게 갈 수 없게."
"살아서는 당신을 놔줄 수 없으니..."
"죽어서는 그래도 한 번쯤은 당신이 바라는 완전한 자유를 주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도 당신을 막지도 못하고 붙잡지 못하게."
- 396~397p
수많은 후유증이 저주처럼 연인을 따라다녔다. 때로는 부상 후유증이기도 했고 대로는 아편 중독의 후유증이기도 했다. 차라리 그 모든 게 제게로 향하기를 바랐으나 신은 아편 상인에게 가장 효과적이고 가장 잔인한 형벌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 410p
분명 그것은 자신이었다.
또한 연인이 바라보는 세상의 자신이기도 했다.
당신이 창조하는 세상에 내가 있었다.
- 417p
이것은 영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조각가 블레이크 E 위즈필던과
마지막까지 그와 함께한 동반자 아서 S 스튜어트의 기록이었다.
- 418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