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사다난하던 드레스덴-프랑크푸르트에서 돌아오고나서 몇주만에 일레이가 일하러 훌쩍 나가고 난 다음날이었어.
예전에 산책하다 만나 친해진 동네 꼬마들과 놀아주기로 했던 태의는 그중 한명의 집에 초대받아서, 아이의 부모님이 차려주신 간식과 색색깔의 색종이에 둘러싸여 종이접기하는 너댓명의 아이들을 보고 있는 중이었지.
야무지게 접어서 공책에 붙이며 꾸미는 아이, 잘 안접힌다며 성질부리는 아이, 일반적인 방식을 따르지 않고 독창적으로 자기만의 세계를 펼치고 있는 아이 등 다양한 성향들을 보면서 웃고있던 태의는 문득 어떤 아이도 '학'을 접고있진 않다는걸 깨달았어.
자신의 어린시절 한국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알려졌던 종이접기는 학접기였고, 나라마다 유행하는 종이접기 방식도 다를테니 당연한가- 하고 생각할 즈음 마침 한 아이가 "태이! 태이도 같이 종이접기해요!" 하고 말했지.
그럴까? 하며 아이들속에 꼬물꼬물 파고들어 앉은 태의는 색종이를 하나 집어 접기 시작했어.
접어본지 오래돼서 까먹진 않았을까 하던 걱정은 부질없이 몸이 기억하듯 손이 움직였고, 형태를 갖추어 나가는 새의 모양새를 보며 아이들이 "우와-" 하고 눈을 반짝였지.
"태이, 이건 어떻게 접는거예요?"
"우와, 멋있어!!"
"나도 접는 법 알려주세요!"
아이들의 선망의 대상이 된 태의는 별거아닌 학접기인데.. 하면서도 내심 어깨가 으쓱해지는걸 막을 순 없었지. 그렇게 저녁까지 아이들에게 학접기를 알려주며 "태이, 최고!" 를 잔뜩 듣고나서 콧노래를 부르며 집에 왔을거야. 다음번엔 거북이 접는 법을 알려줄게! 라는 약속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씻고난 후 침대에 걸터앉았는데, 문득 일레이 생각이 났어.
아직 떨어진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는데, 유독 일레이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져서였을까. 괜스레 침대가 더 넓고 휑하게 느껴져서 태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낮에 있었던 자랑스러웠던(?) 학접기 시간을 떠올렸을테지.
그러다 언뜻 한국에선 학을 접으며 소원을 빌기도 한다는 생각까지 흘러갔고, 매번 돌아올때마다 자잘한 상처를 달고 오던 일레이가 다시 생각났을거야. 얼마전엔 크게 다치기도 했고 말이지.
태의는 일어나서 책상앞으로 갔어. 전화기 옆에 놓인 정사각형의 하얀색 메모지더미가 보였지. 한장 집어들어 학을 접기 시작했어.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거람...' 하면서도 완성한 학 한마리를 빙빙 돌리며 픽 웃고선, 창틀에 살짝 올려놓고 잠시 바라보고 서있었을거야.
일레이를 생각하면서.
그렇게 창틀엔 하얀색 종이학이 한개 두개 늘어나기 시작했어.
때때로 안부전화하는 일레이와 통화도 하는데다가, 그 일레이 리그로우니까 당연히 무사히 돌아올거라고 믿으면서도, 그럼에도 매일 저녁 한마리 학을 접는걸 그만두지 않았을거야.
온 집안을 싹싹 청소하는 리타가 희한하게도 창가의 종이학은 건드리지도, 뭐냐고 묻지도 않았고말이야.
그렇게 작은 종이학이 50마리가 넘어갈 즈음, 늦은 밤 일레이가 돌아왔어.
오자마자 당연히 태의방부터 들린 일레이는 "일레이, 왔어?" 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태의를 품에 가두고 입을 맞추겠지. 태의의 휘어진 눈가를 어루만지며.
태의의 숨이 가빠질때쯤 입술을 떼고 고개를 든 일레이의 시야에 어떤 하얀 뭉치가 들어왔어. 희한하게도 신경이 쓰였을거야. 평소라면 지난 몇십일간 모자랐던 태의를 채우느라 정신없어서 주변에 뭐가 보이든 일단 제껴뒀을건데, 이상하게도 창가에 쌓인 저 흰색 뭉치들이 뭔지 묻지않고는 못배기겠더란말이지.
"저건 뭐지, 태이?"
"..응?"
머릿속으로 당연하게 이어질거라 생각하던 수순이 깨어져서였을까, 태의의 대답이 한박자 느리게 흘러나왔을거야. 숨을 몰아쉬며 촉촉하게 젖어있는 일레이의 빨간 입술을 잠시 바라보던 태의는 일레이가 자신이 아닌 자기 어깨 너머 어딘가를 보고있다는걸 알아차렸고, 고개를 돌려 뒤를 본 순간 일레이가 뭘 물어봤는지 이해했지.
"아, 저거..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심심해서 만든거야."
"아하..."
하지만 일레이는 태의의 허리를 끌어안은채 창가로 걸어갔고, 덩달아 같이 걸어간 태의는 뭔가 부끄러워져서 눈동자를 도록도록 굴리며 가만히 있었어.
종이새의 갯수를 눈대중으로 파악한 일레이가 말했겠지.
"많이 심심했나보군. 태이."
"어, 어! 그게, 만들다보니까 재밌더라고. 하하.아하하..."
하지만 이어지는 일레이의 말에 웃음을 뚝 멈추고야 말았을거야.
"날 기다렸어?"
눈을 댕그랗게 뜨고 일레이를 바라본 태의는 일레이의 미소를 보며 깨달았을거야. 종이학의 갯수로 일레이가 모든걸 알아챘다는걸.
반사적으로 아니라고 외치려던 태의는 잠시 멈칫한 후 나지막히 말했을테지.
"...응."
순순히 대답할 줄은 몰랐는지 조금 커진 일레이의 눈을 보자 오히려 다음 말은 더 자연스럽게 흘러나왔을거야. "널 기다렸어. 일레이."
일레이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어깨에 얼굴을 묻었지. "걱정했어."
잠시 숨을 멈춘듯 미동도 없던 일레이의 가슴이 크게 부풀어올랐다 내려갔고, 한숨처럼 태의의 이름을 부르며 다시 시작된 키스는 밤새 이어졌겠지. 뜨겁게 휘몰아치는 열락의 밤 속 혼미해지는 의식을 핑계로 태의는 한마디를 더 덧붙였을거야.
보고싶었다고.
다음날 늦은 오후에, 창가에 놓인 종이학 한마리를 집어들며 일레이가 말했어.
"태이, 이건 어떻게 접는거지?"
"응? 너 이거 접을 줄 몰라?"
이 녀석이 어쩐 일로 이런걸 다 묻지? 라는 생각은 곧 아이들의 영웅이 되었던(뭔가 한층 더 과장된 것 같지만) 기억에 묻혔고, 일레이 리그로우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는 흔치 않은 기회를 잡은 태의는 신나게 시범을 보였겠지.
물론 딱 한번만 보고선 태의보다 더 완벽하게 비틀림 하나 없이 완벽한 대칭의 종이학을 접어낸 일레이를 보여 입술을 좀 삐죽였겠지만 말이야.
그러다가 인터넷에서 스치듯 봤던 웃긴 모양의 변형된 학이 생각났고, "일레이 이거 봐라?" 하면서 접었다가 "아하...알았어 태이." 하는 일레이에게 덥썩 들려 도로 침대로 끌려들어가며 "야, 뭘 알아! 아니야! 아니라고!" 하며 버둥거렸다고 한다...

연달아 이루어진 뜨밤에 기진맥진 했다가 눈을 뜬 후, 창가의 종이학더미가 없어진걸 발견한 태의는 일레이에게 "이거, 네가 치웠어?" 하고 물어봤지만 일레이의 미소만이 돌아왔고
며칠 뒤 일레이의 방 책장에서 유리병 안에 들어있는 하얀색 종이학들을 발견하고선 웃으며 가슴속 간질간질한 기분을 잔뜩 느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