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산을 좋아했지만 나는 바다를 좋아한다고 서래는 말한다. 해준은 나도 그렇다며 조용히 혼잣말을 한다.
해파리는 물 속에서 투명한 상태로 부유하지만 물 밖으로 나오면 반투명한 상태가 되고, 죽으면 그 투명성을 상실한다.
..
서래는 투병중이던 어머니를 위해 펜타닐을 구하면서 자신의 몫으로 4알을 더 구한다.
어머니를 죽인 후 자신도 따라갈 요량이었겠으나 어쩐 일인지 그녀는 어머니와 할아버지의 유골과 펜타닐을 가슴에 안고 밀항길에 오른다.
그녀에게 죽음은 유예된 것이며, 지연된 것이다.
언제든 손쉽게 죽을 수 있기 때문에 꼭 오늘 죽을 필요는 없는 삶.
그래서 그녀는 죽음을 가까이 둔 채 살아가는 남자들과 결혼을 한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스스로 말하는 남자들과.
가파른 절벽을 가장 난이도가 높은 코스로만 오르는 첫 번째 남편은 절벽에서 사고로 떨어져 죽는 것이 자신의 로망인 사람이다.
사기로 끌어모은 돈을 도피자금 삼아 해외로 도망치기보다는 결국 살해당할 걸 알면서 남은 돈을 탕진하며 살아가는 두 번째 남편 역시
닥쳐올 죽음을 늘 등 뒤에 달고 살아가는 남자다.
왜 저런 남자들과 결혼을 하느냐고 해준이 물어보지만 사실 꽤나 서래와 닮은 구석이 있는 남자들이 아닐 수 없다.
펜타닐을 늘 갖고 다니는 그녀에게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남편들이 아닌가.
남편들이 연달아 죽었으니 아내를 의심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하지만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취미와 일을 하는 남자들과만 결혼하는 여자라면, 남편이 계속 죽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 있다.
내 아내도 별로 놀라지 않을 것 같은데? 내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늘 말했으니까
이렇게 말하는 해준 역시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남자다
당신은 피와 살인사건이 있어야 행복하다고 그의 아내가 말할 정도로, 해준 역시 죽음과 가까이 살아가는 존재다.
그러나 서래의 남편들과 달리 해준은, 죽음과 삶을 오가고 바다와 뭍을 오가는 존재다. 마치 자라처럼.
늘 바다를 그리워 하기에 서래와 자신이 같은 부류라 말하고 그녀의 말을 번역기로 돌려 이해하려 하지만
그 이해는 늘 조금씩 어긋나고 만다.
우는 줄 알았던 그녀는 웃고 있었고, 심장과 마음이 바뀌었으며, 사랑한다고 말했으면서도 자신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당신과 내가 같다고 말하고
내가 왜 당신을 좋아하는지 궁금하지 않냐고 물으며 어떻게든 그걸 그녀에게 말하고 싶어하지만 그녀는 딱히 그걸 궁금해하지 않는다.
애초에 자라는 뭍으로 나와 알을 낳는 동물이 아니었던가.
서래가 해준을 사랑한 이유는 그가 자신과 함께 바다에서 죽을 남자가 아니라 다시 뭍으로 돌아가 살아남을 남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그의 마음 속에서 자신이 살아갈 것이기에.
...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내 사랑이 시작됐다고 서래는 말한다.
그러나 그 때 해준이 끝낸 사랑은 서래에 대한 오해와 착각이 동반된 사랑이었다.
그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그녀를 사랑했고
서래가 바다에서 다시는 돌아올 수 없게 된 이후에야 비로소 온전히 그녀를 이해하게 된다.
그가 다시 만난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그녀의 말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을 때. 그녀는 마침내 죽을 수 있게 되었고
그제서야 그는 깨닫는다.
그녀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여자였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