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1997년 12월 30일 인민혁명당 재건위 관련자 8명을 사형시킨 뒤 지금까지 사형을 집행하지 않아 사실상 사형 폐지 국가로 분류되고 있다.
그런 까닭에 사형선고를 받고 대기 중 12명이 병 등의 사유로 숨졌고 59명의 사형수가 대기 중에 있다.
59명의 사형수는 연쇄 살해 등 수많은 인명을 해친 이들이 대부분이다.
이중 성태수(1960년생)는 단 1명을 죽이고도 사형을 선고받았다. 1심에 이어 2심, 3심도 사형을 선고할 만큼 성태수의 죄질은 극히 나빴다.
◇ 다방에 여학생 팔아넘기려 집으로 가던 2명 납치
1995년 4월 전과자라는 이유로 직업을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던 성태수는 다방에서 일하던 서동원(1969년생)을 불러 "다방에 여학생을 팔아넘겨 돈 좀 만져 보자"고 꾀었다.
이들은 도시보다 한적한 시골을 택해 여학생을 납치하기로 계획을 짜고 1995년 4월 18일 전남 순천시 서면 일대를 살피던 중 오후 5시 30분 무렵 서면 선평 삼거리에서 집으로 돌아가던 A 양(당시 13세 중 1년생)을 납치했다.
얼마 후 B 군(당시 11세 초교 6년생)도 위협, 차량에 태웠다.
성태수는 여고생인 줄 알고 납치했던 B 군이 남자라는 사실에 짜증을 있는 대로 낸 뒤 '후환을 없애야 한다'며 흉기로 A 군을 찔러 살해, 인근 순천 상사댐에 B 군 시신을 밀어 넣었다.
성태수와 서동원은 전남을 돌면서 다방 업주들에게 A 양을 넘기려 했지만 업주들은 A 양이 너무 어린 데다 성태수와 서동원 정체를 알 수 없기에 하나같이 '생각 없다'며 손사래 쳤다.
당시까지도 인신매매 형태로 유흥업소에 여성을 팔아넘기는 조직들이 있었다. 대부분의 조직과 선을 닿고 있었던 업주들로선 처음 보는 성태수와 서동원을 믿을 수 없어 제의를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A 양을 13일가량 끌고 다니면서 성태수와 서동원은 성폭행까지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995년 4월 31일 성태수는 서동원 몰래 A 양을 데리고 여관을 빠져나와 목포 쪽으로 도망쳤다.
차량으로 이동하던 성태수는 5월 1일 자정을 넘겼을 무렵, 담배를 사기 위해 목포 국도변의 한 휴게소에 들렀다가 겁에 질린 A 양, 어딘지 수상해 보이는 성태수를 본 휴게소 주인이 "어떤 관계냐, 학생은 어디 사냐"고 물었다.
이에 성태수가 흉기를 꺼내 위협하자 업주도 야구방망이를 집어 들고 맞섰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성태수는 A 양을 남겨둔 채 혼자 도망쳤다.
신고를 받은 경찰은 5월 1일 오후 목표 유달동 행정복지센터 인근에서 성태수를 체포해, 범행 일체를 자백받았다.
경찰은 상사댐으로 달려가 B 군 시신을 인양하는 한편 서동원을 전국에 지명수배했다.
서동원은 5월 3일 시민의 제보로 붙잡혔다.
살인· 납치· 인신매매 미수· 시신유기· 성폭행 등의 혐의로 기소된 성태수는 사형선고를 받자 희한한 이유를 내세워 항소했다.
즉 1991년 8월 22일 부산과 동부 경남 일대에 큰 피해를 줬던 태풍 글래디스에 의해 머리를 다친 뒤 '정상적 판단이 어려워졌다', '내 정신이 아니다'며 심신미약을 내세운 것.
하지만 항소심은 범행을 주도한 점, 단순히 귀찮다는 이유로 어린 학생을 살해한 점, 여학생을 인신매매하려 했고 성폭행한 점 등은 용서받을 수 없다며 1심과 같이 성태수에게 사형, 서동원에게 무기징역형을 선고했다.
이들은 형량이 높다며 상고했지만 대법원은 1,2심 판단이 옳다며 기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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