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태프가 그러는데 비가 정말 많이 온대요.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전달 받은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하루 종일 공연장에 틀어박혀 있던 그들로서는 딱히 감이 오지 않았다. 일단 점심 도시락을 먹을 때 까지는 맑았고, 1부 공연 때는 조금 흐렸을 뿐이었다. 2부 시작할 무렵에 스태프가 우산 꽂이를 나르는 것을 보고 비가 내리는 구나 어렴풋이 짐작했을 뿐이었다.
정리를 끝내고 공연장을 나서려는데 정말로 비가 퍼붓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평소라면 제법 기다리고 있었을 팬들이 보이지 않았다. 누가 우산이라도 들고 기다려 주면 좋았을 텐데, 라는 평소에는 하지 않을 생각까지 들었다. 우산…….
“우산 없지?”
“일단 이거 받아오긴 했는데.”
미키가 먼지 쌓인 비닐우산 몇 개를 내밀었다. 콩트의 소품으로 쓰였던 것을 억지로 꺼내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낡아빠진 우산이었다. 그나마도 사람 수 보다 우산이 모자랐다. 버라이어티 진행이라도 하듯 차례대로 우산을 펼쳤다. 찢어진 우산. 두 번째 우산. 아즈마가 낑낑거렸지만 녹이 너무 슬어서 펴지지도 않았다. 세 번째 우산. 이번에도 찢어진 우산. 네 번째 우산. 우산살이 조금 휘었지만 이쯤 하면 쓸 수 있을 만한 우산. 네 개 중 겨우 하나. 멀쩡한 우산을 펼쳐 든 미키가 게스트로 온 후배를 우산 속으로 끌어당겼다.
“하세가와 상.”
그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세가와가 머뭇거리며 돌아섰다.
“사, 아니, 타치바나?”
예상도 못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옛날 애인. 아무에게도 말 한 적은 없으니 무슨 사이인지는 모를 테지만 어쨌든 좋아했던 사람이었고 이제는 볼 일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누구인지, 무슨 사이인지 말 한 적은 없지만 심상치 않은 분위기 정도는 충분히 느낄 수 있을 만큼 하세가와는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제일 먼저 말을 걸어준 것은 미키였다.
“천천히 얘기 하고 와. 변경 사항 있으면 전화할게.”
“아니…….”
머뭇거리는 하세가와를 내버려 둔 채 미키가 손을 흔들었다. 그러고는 그 옆에 서 있는 다른 멤버들을 반쯤 억지로 끌고 택시 정류장으로 향했다. 사람은 여섯인데 결국 우산은 하나뿐이었다. 그나마도 편의점 비닐우산. 아즈마는 찢어진 우산이라도 쓰겠다며 미키가 들고 있는 비닐우산 중 하나를 펼쳐 들었다. 정확하게는 펼치려고 했다.
“이거 말고, 펼쳐지는 거!”
또 꽝을 뽑았냐, 너는. 하세가와가 키득거렸다. 타치바나가 불쑥 다가와서는 우산을 씌워주었다. 그가 움직이며 분 작은 바람과 함께 시트러스 향이 밀려왔다. 비 정도로는 향기가 씻겨 내려가지 않는지 오히려 더 진하게 느껴졌다.
“시간 오래 안 뺏을게.”
“아니, 괜찮아.”
그의 손에는 그럴듯한 꽃다발마저 들려있었다. 뭐라고 제대로 말을 하기도 전에 꽃다발을 건네주기에 받아들었다.
“재밌었어. 너무 웃어서 허리가 다 아프다.”
“……어.”
“수고했어. 몸 챙기고. 바쁘다고 밥 굶지 말고.”
이전과 다를 것 없는 말투에 하세가와는 받은 꽃다발을 던져버릴까를 잠시 고민했다. 왜 그가 여기 서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
.
.
“얼굴에 신나 죽겠다고 쓰여 있더라.”
“……응.”
“좋지?”
“좋지. 좋긴 한데 미래가 안 보이는 건 맞지. 이 짓을 10년이나 했는데…….”
뒤에 와야 할 신세한탄은 꾹 씹어 삼켰다. 헤어진 애인에게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것만은 확실했다. 타치바나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무언가를 꺼내서 하세가와의 손에 쥐어주었다. 같이 살던 집 열쇠였다.
“열쇠가 아직 있어서. 이거 주러 왔어.”
“버려도 되는데.”
“이사 가지 말고 거기서 살아, 그냥.”
“어?”
“집세만큼은 번다며. 그러니까 좋은 집 살아야 한다며. 그냥 거기 있다가, 돈 많이 벌거든 좋은 데로 이사 가면 되겠네.”
“말은 쉽지.”
“그 집세 못 낼 정도로 못 벌진 않잖아?”
고개를 끄덕였다. 타치바나의 말이 맞기는 했다. 소비를 줄이기는 해야 할 테지만 당장 이사를 생각해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
.
.
택시가 도착했다. 하세가와는 어느 샌가 자기가 들고 있던 우산을 접으려 했다. 그러나 타치바나는 우산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택시에 올라탔다.
“우산은 너 가져.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우산 하나로 되겠어?”
“너는 집에 어떻게 가려고.”
“택시에서 내리면 금방이야.”
“됐어.”
“기사님, 괜찮습니다. 출발 해 주세요.”
택시 문이 닫혔다. 열린 창문으로 손끝이 살짝 나와서는 까딱까딱 흔들렸다. 길고 가는 손가락 위로 그 새 빗방울이 떨어져 손끝이며 소매 끝을 적셨다. 빗소리를 뚫고 타치바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산 누구 줘 버리지 말고 꼭 네가 써. 목 쉬면 안 되잖아.”
.
.
.
어디서 보고 있기라도 한 것 처럼 때 맞춰 미키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디야?”
-지난 번 거기. 비 오니까 멀리 못 가겠더라. 지금 올 거야?
“어.”
-우산은 있어?
“아까 그 사람이 줬어.”
-우산 있대. 타카야마 쨩, 하세가와 우산 있대.
전화기 너머에서 타카야마에게 말을 거는 미키의 목소리가 들렸고, 타카야마가 거기에 뭐라고 대답하는 목소리도 들렸다. 어딘가에서 안고 있는 꽃다발과는 다른, 코끝이 찡해지는 시트러스 향이 풍겨오는 것 같아 코끝을 찡그리며 전화기에 갈게, 한 마디를 겨우 하고서는 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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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전력. 대지각. 지금 몇 시일까.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지 궁금한 1차이지만, 아무튼 써 보았어.
한참 전 주제였던 이별에 쓰다 만 걸 재활용해서 우산을 쥐어주었음.
이거 http://theqoo.net/152061021(전력 中 동화) 랑 이어지는 이야기라고 해야 하나, 동화에서 헤어진 그 남자가 여기 찾아온 타치바나 사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