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텍스트 스포주의 **
포토에세이 사도 후회 안한다
볼만한 가치가 있다
흥미로운 내용일거다
다이슌이 한 말 다 맞으니 구입하는걸 추천합니다
챕터 2. 사랑을 몰랐던 우리들 (슌 SIDE)
친부모가 누군지 모른다
저에게 있어 최초의 기억은 세 살 정도때, 시설에서 다른 아이들과 놀던 기억이에요
한 살인가 두 살때부터 아동양호시설에서 지내고 있었던것 같아요 . 거기에 데려간 건 아마도 생모. 엄마에 관한 일은 자세히는 모릅니다
아빠에게 가정폭력을 당해서 더이상 아이를 키울수 없다고 생각했던걸까, 아빠가 약물중독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는것 같기도 하고, 아닌것 같기도 하고... 애매해요. 친부모와 만나본 적도 없고 어떤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시설내에서 진위를 알수 없는 소문만 돈듯)
사춘기때는 '내가 이렇게 된 건 날 버린 부모때문이야' 라는 생각도 했어요. 함께 살았다면 분명 다른 인생을 살았을테니까. 하지만 함께 산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했을거라는 보장은 없어요. 더 불행했을수도 있고. 지금처럼 이렇게 살아가고 있지 않을수도 있고. 그래서, 저를 시설에 보낸 걸 원망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닐지도요. 원망하는 감정조차 들지 않아요. 왜냐면 어차피 모르는 사람들인걸요
물론, 언젠가는 만나보고 싶어요. 제가 방송에 출연한건 엄마와 만나고 싶다는 마음도 어느정도 있었기때문이고...
하지만 그건 제 생각일뿐, 어쩌면 엄마에게 있어서 저라는 존재는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일지도 몰라요. 음... 이미 잊고 살고 있을지도...
엄마의 존재에 대해서 알게 된건, 두 번 이혼을 했고, 지금은 또 다른 사람과 함께 살고 있다는것. 이건 제가 호적등본을 떼러갔다가 알게 됐어요. 그리고 저에겐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고... 아마도 엄마는 지금 행복한 가정을 꾸린것 같아요. 동생들은 어떤 애들일까요. 궁금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일거예요
하지만 엄마와 뭔가를 해보고 싶다라던가, 이야기를 나눠보고싶다는건 아니고,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 실제로 보고 싶을뿐. 하지만 만난다고 해도 아무 생각도 안들것 같아요. '이 사람들이 너의 친부모란다' 라고 해도 '응... 그렇구나' 라고 하는 정도. 그저 어떤 사람들인지 흥미가 있을 뿐
시설에서의 일
제가 지내던 시설에는 70명 정도의 아이들이 있었어요. 2LDK정도 되는 집들이 부지내에 있고, 한 집에 10명씩 살았는데, 각 집마다 남자 선생님과 여자 선생님이 계셔서, 그 두 분이 부모같은 역할을 담당했어요. 하나의 시설 안에 일곱 가족이 사는것 같은 이미지. 유사가족이라고 해야할까요. 15살까지 계속 이 시설에서 지냈어요
저는 등교거부도 했어서, 시설내에서 지내는 시간도 다른 아이들보다 길었어요. 학교에 안가게 된건, 초등학교 4학년때부터. 딱히 괴롭힘을 당했다거나 그런 이유가 아니라, 그냥 아침에 일어나질 못했어요. 학교에는 친구들도 많았고, 가기만 하면 즐거웠어요. 하지만 잠에서 깨질 못했어요. 자주 선생님이 질질 끌고가듯 깨워주시곤 했지만 결국에는 못일어났고. 선생님들 입장에선 정말 손이 많이 가는 아이였을거라고 생각해요
처음엔 무슨 병이 있어서 못일어나는거라고 생각해서 병원에도 갔었는데 원인을 찾지 못했어요. 어쩌면 나 자신이 별로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았는지도. 그당시의 저에게 있어서 학교라는건 우선순위가 낮았나봐요. 우선순위 1위는 잠을 자는것. 계속 자고 있었어요. 혼나기도 했지만. 2위는 게임. 그 다음은... 생각이 안나고...
시설내의 룰도 처음엔 잘 지켰지만, 점점 지키지 않게 됐어요. 통금 시간이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어요. 지금 되돌아보면 어디에나 있을법한 평범한 사춘기 아이같은 생활이었어요
즐거웠던건 아침과 점심, 저녁 식사시간. 일년에 한번씩 오는 초밥, 라면 푸드트럭. 소꿉친구들과 함께 지냈던 것. 그정도일거예요. 역시 그당시 일은 기억하고 있는것들이 적을지도 몰라요. 떠올리고 싶어도 잘 떠오르지 않거든요
그래도 시설의 선생님과 자주 다퉜던것은 기억하고 있어요
선생님도 아직 어른이 아니었고, 인간이니까.. 아이들과 싸우거나 하거든요. 저는 평소에 여자 선생님하고 자주 싸웠어요. 이제 막 전문대를 졸업하고 일을 시작한 젊은 선생님이었는데, 제가 선생님이 옷을 개고 있으면 그걸 흐트러뜨리거나, 말을 걸어도 무시거하거나. 그랬더니 선생님도 보복을 해와서.. 어떻게 보면 서로 싫어할만 행동들을 하고 있던 상태였어요. 저도 아이였지만, 선생님도 아이였던거죠. 보육사 면허를 땄지만, 실무 경험은 부족한. 그래서 제가 무슨 말을 하면 바로 발끈해버려요. 지금이라면 그럴수도 있지.. 화 날만하지...라고 선생님을 이해할수 있지만요. 하지만 서로를 향한 괴롭힘의 응수는 원만히 해결되지 않았어요
어느날, 그 짓궂은 행동의 응수가 대사건이 되어버렸어요. 선생님이 '고작 이정도밖에 못하는거야?' 라고 도발을 해왔어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몰라요. 선생님의 그 말이 계기돼서 난동을 부렸어요. 다친 사람이 없어서 망정이지 누군가가 옆에서 말려주지 않았다면 그랬을 가능성도 부정할수 없었거든요. 그 일로 제가 있을곳은 그 시설에서 없어졌어요. 그렇게 15살때 그곳을 나오게 됐어요
최악이었던 두번째 시설
아기였을때부터 지내던 시설을 나오게 된 저에게 바로 다음 시설이 구해지진 않았어요. 사실 다른 시설로 옮긴다는게 간단한 일은 아니거든요. 전에 있던 시설에서 문제를 일으킨것도 클거구요. 다음 시설이 정해질때까지 제가 있었던 곳은 아동상담소였어요. 기간은 아마 반년정도였다고 생각해요
아동상담소는 굉장히 폐쇄적인 장소였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책을 읽고, 아침식사를 하고, 바로 3시간 정도 공부. 그리고 또 책을 읽고, 스포츠 시간이 있고. 가본 적은 없지만 아마 형무소가 이런곳이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화장실에 갈때도 허가가 필요한 곳이었어요. 그곳에서 빨리 나가고 싶어서 빨리 다른 시설을 찾아봐 달라고 했는데, 일이란건 너무 서둘러도 좋을 게 없는거였어요. 정말로 최악인 곳에 가게 됐거든요. 그곳에 들어가보니, 그동안 지냈던 시설이 얼마나 좋은 곳이었는지 실감했을 정도로...
두번째 시설은 말하자면 무법지대. 보스같은 사람 한 명과, 그 밑으로 여러명의 부하들을 거느린 조직이 만들어져 있었어요.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통제는 되고 있었을지도요. 그곳에 저같은 별로 남자답지 않은 녀석이 들어온게 맘에 안들었는지 적대시 당했고 폭력은 일상이었어요. 그 시설에서는 보스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살아갈수 없고, 보스의 맘에 들지 않아도 살아갈수 없는, 보스가 모든것인 그런 세계. 좋은 일이라곤 하나도 없었어요. 폭력뿐만 아니라 자주 제 물건을 부숴놓기도 했어요. 양부모님이 사주셔서 소중히 하고 있던 테일러 스위프트의 CD가 산산조각이 나있었던 적도 있어서... 슬펐어요
시설내에서의 자유도 그다지 없었어요. 학교는 갈수 있어서 그동안엔 즐거웠지만, 시설 자체는 조금 이상한 곳이었다고 생각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곳도 형무소 같았어요. 보스에게는 원장 선생님도 간섭을 안했고, 그가 누군가를 때려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TV를 볼때도 보스가 자기가 보고싶은 방송을 보고 나머지는 그냥 뒤에서 그걸 지켜보는 그런 상태였어요. 정말로 보스가 하고싶은대로 다 했어요
저는 여전히 고등학교때도 학교에 자주 안갔는데, 그 이유도 있어서 보스에게 자주 폭력을 당하기도 했어요. 학교 좀 가라고. 선생님도 그냥 평범하게 저한테 말하면 될것을 일부러 보스에게 말해서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시키려고 했어요. 그렇게 해도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데...
전에 있던 시설에 계속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하고 당시 생각한 적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무리라서 포기했었던것 같아요
어쩌면 힘들었을지도... 하지만 전 그런 괴롭다던가 슬프다던가 그런 감정을 그다지 크게 받아들이지는 않았어요. 저는 죽는 순간이라는것은 사람마다 각자 이미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죽는 순간으로 가는 길이 정해져 있고, 그 길을 담담하게 걸어갈 수 밖에 없다. 일어난 일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일어난다. 발버둥쳐도 소용없다
그래서 비관적인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그렇지 않으면 슬퍼서 살아갈수가 없었거든요
그렇구나... 역시 그때 난 힘들고 슬펐던거야...
양부모님
저에게는 양부모님이 있어요. 7살인가 8살때였을까? 어느날 갑자기 면회가 있다는 말을 듣고, 가서 처음 만났어요. 그 면회라는것이 저를 양자로 할지 결정하는 상견례 같은거였을지도
추석과 설날 단 두번, 양부모님 댁에 가서 자고 올 수 있었어요. 5일 정도였는데 항상 기대하고 있었어요. 양부모님은 굉장히 상냥하신 분들. 교류는 1년에 두 번 밖에 없었지만, 양부모님 댁은 저에게 있어서 오아시스 같은 곳이었어요. 함께 마트에 가거나, 세뱃돈을 받거나, 드라이브 하러 가거나. 별거 아닌 일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시설에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경험하게 해주셨어요. 단지, 그 무렵에는 그다지 '부모'라는 의식은 없었어요. 어렸을때는 상냥한 자원봉사자분들이구나 라고 생각했거든요. 아마 당시엔 '양부모'가 뭔지도 잘 몰랐고, 애초에 '부모' 그 자체도 어떤건지 잘 몰랐기때문에...
하지만 두번째 시설에 들어가고나서, 반년정도 좀처럼 양부모님을 만날수 없었어요. 그게 원장 선생님의 방침. 여러가지 사정으로 부모와 만날수 없는 사람도 있는데, 어째서 슌만 양부모를 만나러 갈 수 있냐는 불만이 나올수 있다는게 그 이유였어요
그래도 양부모님은 양부모님대로 갑자기 못만나게 돼서 걱정하셨던 것 같아요. 양부모님은 제가 어째서 시설을 옮긴건지 몰랐고, 어째서 지금의 시설에 있는건지도 몰랐던 상태. 겨우 만나게 돼서 그동안 시설에서의 상황을 말씀드렸더니 놀라셨어요
양부모님이 생긴 후에도 줄곧 저에게 있어 집은 어렸을때부터 지내던 시설. 양부모님 댁은 오아시스 같은 곳이었고 좋아하는 곳이었지만, 그래도 남의 집이라는 감각이 컸어요. 하지만 두번째 시설이 너무 최악인 곳이라, 5일정도 양부모님 집에 와있을때 '더이상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라는 마음이 생겼어요. 그래서 솔직하게 그 마음을 말씀드렸더니 양부모님도 받아들여주셨어요
양부모님 밑에서 생활한건 17살부터 약 2년간
시설에서 양부모님 댁으로 옮기면서 필연적으로 전학을 해야했고, 남학교로 전학 갔는데 2개월만에 학교에 안가게 됐어요. 그리고 제가 계속 집에 있으니 점점 양부의 태도가 달라졌어요 '니가 이런 아이인줄 알았다면 맡는게 아닌데!' 라고
그때부터 양부모님 사이에 다툼이 생기고, 결국엔 이혼하셨어요. 어쩌면 내가 계기였을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내가 없었어도 이혼하셨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두분과 같이 살게 되면서 부부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고 느끼고 있었거든요. 물론 제가 그렇게 느꼈을 뿐 사실이 어땠는지는 알수 없지만요. 하지만 기존에 있던 불협화음 속에 제가 들어감으로써, 그게 더 커져버린 것 같아요
양부와는 함께 보낸 시간이 적어서 서로를 이해할수 있는 단계까지 가지 못했어요. 원래부터 그다지 간섭하는 분도 아니었고. 하지만 양모는 계속 제 옆에 있어주셨어요. 정말로 손이 많이 가는 아이였을텐데 저를 '보통의 인간'으로 교정하기 위해서 굉장히 애써주셨어요. 다양한 것들을 가르쳐주시려고 했구요. 그래서 지금의 제가 있는것도 양모님의 존재가 클지도 몰라요
양모님과는 지금도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어요. 양모님에 대해서는 신기한 감정. 이 감정이 보통 사람들이 느끼는 부모에 대한 감정과 같은건지는 모르겠어요. 부모가 있었던 적이 없어서. 저는 그 감정이 어떤건지 몰라요. 하지만 '가족'이 어떤건지 가르쳐주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세계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에 가지 않고 토목 일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 생각이 바뀌게 된 계기가 있어요. 그건 해외에 나가본 것. 양모님은 대학에서 심리 카운셀러로 일하고 계신데, 호주로 출장 갈 기회가 있어서 그때 저를 함께 데려가주셨어요
기간은 딱 1주일. 하지만 그때부터 조금씩 생각이 바뀌었어요. 예전부터 해외 음악이라던가, 해외 문화는 좋아했지만, 호주에 갔더니 온거리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어요
굉장히 좁은 세계에서만 살아왔는데, 거기서 갑자기 호주.. 게다가 혼자서 음악이 흘러넘치는 이 거리를 걷고 있다니
고작 1주일. 하지만 그 1주일 동안 혼자서 다양한 곳들을 가보고...... 그리고 일본에 돌아왔더니 그동안 보고 있던 광경들이 달라보였어요. 아마 나도 모르게 여러가지것들을 흡수하고 왔나봐요
그때부터 대학에 가고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도쿄에 있는 대학으로. 학비는 '일본재단 꿈의 장학금'이라는 당시에 1년에 10명 정도만 받을수 있는 장학금을 받고 다녔어요. 급여형으로 생활비, 주거비, 학비가 지급됐어요
하지만 1년도 지나지않아 학교에 가지 않게 됐어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유로워졌기때문일까. 계속 놀기만 했어요. 하지만 거기에 후회는 없어요. 너무나 즐거웠기때문에...
그때의 저는 아직 '보통의 인간'이 되지못한 상태였다고 생각해요
첫사랑, 그리고 신주쿠 2번가
자신의 섹슈얼리티에 대해 고민한다던가 그런 걸 생각하기 이전에, 절대로 들켜서는 안되는 일이었어요. 시설에 살면서, 남자방 안에서도 저는 이질적인 존재. 여성스럽다고 놀림받거나, TV에서 같은 섹슈얼리티를 가진 사람이라도 등장하면 '너도 저놈들하고 같은거지?' 라는 소릴 듣거나. TV에 나올때마다 제발 그만 좀.. 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쨌든 숨기느라 필사적이었어요. 게다가 저희의 커뮤니티에는 어른이 없기때문에, 커밍아웃이라도 했다간 위험한 미래밖에 보이지 않았어요. 제가 머물 장소를 지키기 위해서는 숨기는 것이 필수불가결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사람은 초등학교때부터 함께 지내던 사람. 생각해보면 상당히 오랫동안 한사람을 좋아했어요. 초등학교때부터 고2, 3정도까지 좋아했으니까요. 어떤 점이 좋았을까? 너무나 좁은 세상에서 살다보니 달리 다른 사람이 없었던 것 뿐이었을지도. 하지만 그 아이를 계기로 남자를 좋아한다는 걸 깨닫게 되었어요. 고등학교때 마음을 고백했지만, 물론 그런 관계가 되긴 어렵죠. 그애는 여자에게만 흥미가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중학교 2학년 정도까지는 바이섹슈얼이었는지도 몰라요. 시설에 있던 연상의 여자애도 좋아했고, 같은 반 여자애를 좋아하기도 했고. 그게 연애감정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흔들리던 시기는 있었을지도
두번째로 좋아했던 남자는 호주에서 돌아오고나서 다니기 시작했던 학원의 선생님. 대학생이었으니 알바였을까? 저는 계속 규슈에서 살고 있었기때문에 그가 말하는 표준어가 왠지 좋았어요. 수업이 끝나고 나면, 같이 밥먹으러 가자는 말을 하기도 하고. 그 사람 입장에서는 '얜 뭐지?' 싶었을거예요. 그때의 저는 조금 창피한 녀석이었다고 생각해요
대학에서는 같은 학부에서 수업을 듣던 아이를 좋아했는데...그 아이는 제가 대학을 그만둘때까지 좋아했어요. 집에도 놀러가고, 사이도 좋았어요. LINE으로 연락을 주고받고, 친구 이상의 일을 해주길 바랬고. 돌이켜보면 전 꽤 끈질겼다고 생각해요. 고백도 했었지만, 절대 무리잖아요. 당시에는 이성애자 남자를 향한 제 연심을 어떻게 소화시켜야 하는지 알지못했고, 무의미한 일을 했었어요
이성애자를 짝사랑하는건 괴로워요. 게이인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알게 됐어요. 이성애자를 좋아해도, 상대는 호의로 돌려주지 않는다는걸. 그건 굉장히 감정이 소모되는 일이거든요. 하지만 좋아하니까 뭔가 기대해버리죠. 내게 상냥하게 대해주면 혹시나 하는 생각을 해버리게 되는데, 그렇다고 좋아한다고 고백해버리면 관계가 깨지고, 잃는것도 많고. 그건 괴로워요. 그래서 앞으로는 이성애자를 좋아하게 되는 일은 없을거라고 생각해요
예전의 제가 이성애자 남자를 좋아했던것은 연애경험이 부족했기때문. 이제 이성애자라면 그 남자가 아무리 멋지고 내게 상냥하게 대해줘도 좋아하지는 않을거예요. 좋아해봤자 소용없으니까. 나를 좋아해주지 않을테니까. 대학생 시절의 저는 그걸 이해하지 못했던거예요
그리고나서 신주쿠 2번가에 점점 발을 들이게 되었어요. 처음으로 2번가에 갔을때 홍보간판을 들고 있던 사람에 이끌려 들어갔던 가게에서 굉장히 즐거웠어요. 그래서 몇번이나 더 갔었고, 대학 친구들도 데려가고. 그리고 거기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보다 더 2번가가 저의 세상이 되어갔어요
2번가에 대해서 여러가지를 가르쳐준 사람은 처음 도쿄에 왔을때 매칭앱으로 만난 사람. 제가 18살이었고, 그사람은 35살. 제가 처음으로 성적인 경험을 했던 상대이기도 해요. 식사를 하러 갔다가 함께 전철을 타고 돌아오는 길에 그런 분위기가 되어서...
처음으로 사귄 사람도 2번가에서 만난 사람. 앱으로 알게 되고 2번가의 바에서 만났어요. 하지만 그 사람과는 2주만에 헤어졌어요. 그 당시에는 연애에 대한 내성이 없었고, 아무 경험도 없었어서, 그저 좀 괜찮은 사람이네...라고 생각했던 것만으로 사귀게 된거라, 그냥 분위기에 휩쓸렸을뿐일지도
커밍아웃을 한것은 처음으로 제대로 좋아하게 된 남자친구가 생겼을때. 인스타에 '연인이 생겼습니다' 라고 사진을 올리고 '게이입니다'라고. 계속 숨기는것도 귀찮았고, 커밍아웃을 한다는것에 대해 당시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어요
대학 친구들도 팔로잉 되어있었기때문에 모두들 그때 알게 됐을거예요. 처음엔 놀라기도 했을까요? 어땠을까... 친했던 애들은 특별히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역시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 그런 사람에게 좋지 않은 시선을 받기도 했어요. 여자애들과 자주 함께 있었기때문에 보통은 알아차릴것 같기도 한데. 하지만 잘모르는 사람들 눈에는, 제가 질투의 대상이었나봐요. 여자들에게 인기 있는것처럼 보였던건지... 하지만 그런걸로 싫은 일을 당했던 기억은 그다지 없었어요. 동성중에도 이해해주는 사람들이 주위에 많이 있었기때문에, 별로 신경쓰지 않았어요
최악의 남자친구
처음으로 관계가 길게 이어졌던 남자친구와는 4개월 동안 사귀었어요. 20살때. 하지만 그사람과의 연애는 너무나 지옥같았어요. 같은 가게에서 일하던 사람이었는데, 정말로... 사귀는 동안 제 멘탈이 붕괴될 레벨이었어요
그랬는데도 어째서 사귀고 있었냐면, 얼굴이 너무 잘생겨서. 제 타입이었어요. 얼굴도 잘생기고, 키도 크고. 하지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 사이코패스라기 보다는 소시오패스. 대화가 안되고, 웃지도 않고, 누군가에게 애정을 주지 못하는 사람
물론 그사람도 일할때는 제대로 웃기도 하고 말도 하지만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안됐어요. 바람기도 많아서 손님 집이나 전남친 집에 자러가는 일도 있었구요. 머물 곳이 없다고 하면서 전남친 집에서 지내려고 하는 사람. 감정도 없어서 로봇같았어요. 식사를 하러가도 휴대폰만 만지고, 대화도 없고. 지금 생각하면 왜 저런 사람과? 라고 저 스스로도 이해할수 없지만, 정말로 얼굴을 좋아했어서 사귀었던거겠죠..
그런 그와 헤어지게 된 계기는, 정말로 사소한 일이었어요
어느날, 가게 일을 마치고 함께 갔던 소바가게. 저는 메밀 알러지가 있어서 먹을수 있는건 오야코덮밥뿐. 그런데도 그사람이 제 오야코덮밥을 절반이나 먹어버리는거예요. 쉐어할거라면 서로 나눠 먹을수 있는 메뉴여야 하는데. 저는 메밀 알러지라서 그가 시킨 음식은 먹을수가 없는데. 그게 너무 화가 났어요. 밤 9시부터 그때까지 계속 아무것도 안먹어서 배도 고팠으니까
그날 집으로 돌아가서 처음으로 그사람에게 크게 화를 냈어요. 하지만 어째서 내가 화를 내는건지도 모르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왜그래?' 라고 묻더라구요. 제가 의자를 내던지고 소리치며 화내고 있는데, 자기가 뭘 잘못한건지도 모르고. 그리고는 저에게 '이상해' 라고 말하는거예요. 굉장히 슬펐어요. 그때서야 겨우, 다른 사람의 마음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걸 깨닫고 이별을 선택했어요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연애
21살때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사람이 아니었을 시기. 밤 9시부터 일을 시작해서, 아침 9시나 10시에 일이 끝나고, 그때부터 또 술을 마시고.. 정말 2번가에서 일하면서 인생을 끝내버릴까 생각했을 정도
하지만 2번가에 있었을때는 계속 즐거웠어요. 모든것을 잊을수 있는 장소. 아침부터 술을 마시고, 길거리에서 잠이 든적도 있었어요. 아니, 아침까지라고 해야할지 아침에도 낮에도 계속 술을 마셨어요. 숙취로 힘들때도, 술을 마시면 회복을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자포자기의 상태였을지도 몰라요. 가끔씩 설교를 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런 사람들은 저에게 뭔가 새로운 시선을 주는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그러던 어느날, 가게를 방문한 어떤 여자애가 있었어요. 같이 온건 미국인 남성. 하지만 여자애쪽이 인상이 강렬했고, 인스타 계정을 서로 교환했는데 그 다음날 '나베파티할건데 슌도 와!' 라는 연락이 왔어요. 처음 만난건데 참 친화력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만난 다음날 나베파티라니.. 보통 그런 일 없잖아요
왜 나를 부른거지? 하고 좀 의아했어요. 알고보니 같이 왔던 미국인 남자가 저를 보고 첫눈에 반해서, 그래서 불렀나봐요. 그는 뉴욕에 살고 있는 사람이고, 어쩌다 일본에 와있었어요. 저는 그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이 없었지만, 결국 그대로 그 여자애 집에서 그와 함께 지내게 됐어요
그녀는 정말로 온화한 사람이었고, '여기 있어도 돼' 라고 했거든요, '나 돌아갈게' 라고 말하면, '돌아간다고? 조금만 더 여기 있어' 라고 해서, 그렇게 어쩌다보니. 그 뒤로도 그녀의 집에서 일하러 출근했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의 집으로 돌아가는 생활이 되어버렸어요. 아마도 뉴욕의 그가 제가 함께 있어주길 바랬던걸거예요. 2주 정도 지났을까, 그사람이 뉴욕으로 돌아가게 되고, 그만큼 함께 있었더니 그가 떠나는게 쓸쓸하게 느껴졌어요
그리고 한 달 뒤, 저도 뉴욕에 갔어요. 그 사람과 함께 있고 싶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리고 그의 집에서 3개월동안 함께 지냈어요
거기서 저는 그를 정말 너무나 좋아하게 돼버렸어요
처음에 만났을때는 아무런 생각이 안들었지만, 일본에서 함께 보낸 2주일 동안 그가 궁금해지기 시작했고, 한 달 뒤에 뉴욕으로 가서 함께 지내는 동안에, 정신을 차려보니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있었어요. 외모 같은게 아니라, 한사람의 인간으로서 좋아하게 됐습니다
아마, 전에 사귀었던 사람이 최악이었기때문에 비교됐던 부분도 있었을거예요. 식사 할때도 휴대폰을 전혀 안보고, 모든것이 전남친과 반대였어요. 제대로 대화가 통한다는 사실에 감동까지 했어요. 정말로... 이런 평범한것이...
어쩌면 뉴욕이라는 이질적인 환경도 한몫했을지 모르지만, 그때까지 어딘가 이상해져 있었던 저를 그가 보통의 사람으로 만들어준 것도 사실. 드디어, 뉴욕에서, 저는 '보통의 사람'이 될수 있었어요. 자신의 존재를 객관화 할 수도 있게 됐어요. 2회차로 철이 든걸까? 이 표현이 맞는건지는 모르겠지만...
얼굴이 잘생긴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지만, 나를 좋아해주고, 소중히 대해주는 사람을, 나도 소중히 대해야 한다는것을 그가 실감하게 해주었어요
사귀지는 않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했던 사람...
하지만 역시 사는 나라가 다르고, 그리고 헤어지지 않으면 안되고.
그래도 다음에 우리가 만나게 된다면, 서로의 생활이 안정되면 사귀자는 말을 했었어요
그것이 2023년 4월의 일입니다
그런 그와 재회하게 된 게 그해의 10월. 그가 일본에 왔어요. 마침 보이프렌드 촬영에 들어가기 직전이었어요
다시 만난 그에게 '일본에서 만드는 남자들의 연애 리얼리티 방송에 출연하기로 했어' 라고 말했더니, 그는 울었어요. 아마... '우리는 사귀지 않아' 라는 걸 제 말로 바로 이해했던 것 같아요. 저는 그를 굉장히 좋아했기때문에 너무나 괴로웠어요. 하지만 그는 '슌이 하고 싶은걸 하면 돼' '슌이 행복해진다면 괜찮아' 라고 말해주는 사람이어서, 너무 붙잡거나 하지 않고 '촬영 잘하고 와' 라고 저를 보내주었어요
그와 헤어지고 난 직후엔 그사람이 계속 제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어요
그 전까지는 좋아한다면서 저에게 적극적으로 들이대는 사람은 싫었거든요
저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그래서 제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제게 호의를 보인다해도, 그사람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지금의 제가 있는건, 그사람이 준 사랑 덕분
미숙했던 내가 사랑이 뭔지 알게 되고, 그리고 다이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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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에세이를 읽고나니....
슌이 보이프렌드 촬영 첫날부터 끝날때까지 보였던 말과 행동 표정들이
좀 더 이해가 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