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쩍 봄이 가까워졌다.
금방 꽃들이 피고 거리는 더 화사해지겠지.
나도, 피어날 수 있을까?
내 안의 겨울은 끝이 나긴 할까?
작년의 나는 살면서 가장 힘든 일을 겪었었다.
아침이 오는 게 싫었고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숨 쉴 때마다 실패의 찬기가 나를 파고 들어 마음까지 얼어버렸다.
이미 다 끝나버렸다고, 다시 일어설 수 없다고.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나의 등을 짓누르며 스스로를 주저앉혔다.
거울을 봤다.
내가 내뱉은 절망과 아픔에 얻어맞아 내가 나인 것조차 알아볼 수 없게 많이 변했었다.
한창 빛을 내던 그 눈빛과 자신감은 어디로 갔을까.
그때 나는, 나를 미워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다 끝났다고 생각하면서도
모두가 잠든 밤엔 남 몰래, 진짜 아무도 모르게
행여 누가 들을까 두려워 나만 겨우 들릴 만큼 아주 작게
감히, 봄을 꿈꾸기도 했다.
나도 다시 꽃 피울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나를 미워하면서도 나는
끝끝내 나를 사랑했다.
<아이유-아이와 나의 바다>
#2
누구도 모르길 바란다.
친구들 다 같이 바다를 보러 갔던 늦은 오후
모래밭을 달려가 다들 햇빛에 부서지는 바다를 바라볼 때
나는, 그 애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잔뜩 설레는 눈에 바다를 담던 그 모습.
누구도 여전히 모르길 바란다.
우연히 같이 듣게 된 전공 수업에서
맨 뒷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그 애의 옆 모습을
나는 전공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다.
아무도 영영 모르길 바란다.
다 같이 한강으로 놀러갔던 날
그 애가 내 친구 녀석의 옆 모습만 내내 바라볼 때도
나의 시선은 그 애에게 닿아있었다.
소란스러운 마음을 달래느라 한숨을 몇 번 쉬었지만
그 애는 돌아보지 않았다.
아마 내가 그 애 옆모습만 보느라 그 애를 딱 반만 좋아한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마음이 닿지 않은 걸까?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는 마음이길 바라지만
곁눈질밖에 못하는 비겁한 마음이었지만
혼자 남아 적어본다.
그래도 거기, 분명히.
사랑이 있었다고.
<윤하-기다리다>
#3
난 좋은 게 참 많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너도 좋고 나도 좋고
저 사람도 좋고 동네 고양이도 좋다.
널 보면서 기분이 좋아지고 날 보면서 내심 뿌듯하고
동네 고양이를 보면서 가슴이 시큰한 것이 역시 난 그런 게 좋다.
난 좋아하는 것이 많은 내가 좋다.
아낌없이 사랑을 나눠주는 내가 좋다.
종종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도 있다.
그... 이것저것 좋아하는 거 이해가 안 간다고.
왜 그런 걸 좋아하냐고.
그럴 때면 뻔한 문장이 생각난다.
좋아하는데 이유가 필요한가?
좋으면 좋은 거지.
그래서 난, 오늘도 좋아한다.
너를 나를 우리를.
<데이식스-좋아합니다>
#4
"아, 됐어~ 끊어!"
어쩜 엄마와의 통화는 왜 맨날 이렇게 폭발하고 끝나는 걸까.
잔소리 좀 참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려워서.
나이 서른 먹은 딸, 밥 벌어먹고 사느라 힘들어 죽겠는데
왜 다 아는 얘기로 답답하게 하는 건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평일엔 야근한다는 핑계로 주말엔 늦잠을 잤다는 이유로
언젠가부터 엄마의 전화를 잘 받지 않게 됐다.
그런데 얼마 전 엄마가 낮부터 전화를 해왔다.
휴대폰이 망가진 것 같다는 연락이었다.
"그니까~ 제때 좀 바꾸지."
7년을 썼으니 망가질 법도 했다.
새 휴대폰을 사들고 집에 와서 이것저것 옮겨주는데
메모장에 시간이 적혀있었다.
목요일 9시. 금요일 3시. 주말 4시.
이게 뭐냐고 물어보자 엄마는 말했다.
"너랑 통화할 수 있는 시간. 바쁜데 방해하면 안되잖아."
순간, 가슴에 무거운 게 턱 얹혔다.
아무 때나 걸 수 있는 전화를 붙잡고 엄마는 얼마나 고민했을까.
제멋대로 끊긴 전화를 붙들고 내 이름을 몇 번이나 불렀을까.
목소리 하나 들려주는 게 뭐가 어렵다고.
어려운 일은 척척 잘해내면서 왜 이깟 쉬운 일은 제쳐두는 건지.
사는 게 왜 자꾸 정반대로 흘러 가는지.
스스로가 한심해지는 밤이다.
<김진호-가족사진>
#5
고3이 되었다.
아무렇지 않던 일도 예민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뭐든지 잘해낼 수 있을 것 같던 자신감도 잃어버렸다.
몸은 성장하는데 마음은 약해져만 갔다.
나도 모르게 주변 사람들에게 모진 말을 하고
또 후회하는 날이 반복되었다.
깜깜하고 깊은 우물 속에 빠져버린 것 같았다.
이 어둠에 빠져 이대로 영영 가라앉을 것만 같은 기분.
그때, 나에게 손을 내밀어준 인연들이 있었다.
추운 겨울에 부르튼 내 손을 보고 핸드크림을 선물해주던 친구들.
그리고 내가 추울까봐 이른 새벽부터 차에 시동을 걸어놓던 엄마.
칠흑같던 어둠에 빠져 허우적대던 나에게
손을 뻗고 마음을 뻗어주던 빛나는 별같은 존재들.
그 별들을 시리게 바라보며 나는 다시 깨닫는다.
지금 나를 감싼 어둠은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우물이 아니라
언제라도 밝아질 새벽을 기다리는 밤하늘이라는 걸.
그래서, 나는 무너지지 않는다.
내가 아무리 부족하고 약해진대도
나를 미워하는 어둠보다
사랑해주는 별들이 더 많을 테니까.
<이소라-바람이 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