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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는 빈센조가 없는 주말, 이 리뷰는 <빈센조> 19~20화를 복습/재탕하며 의식의 흐름에 따라 작성되었음.
# <빈센조>의 버라이어티한 빌런 처형 방식
“맹수를 만났을 땐 도망보단 숨어 있어야지. 왜 이렇게 무모해.”
“디테일하게 바보 만드는 게 내 전문이야. 죽이는 거 다음으로.”
“고통이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드라마틱하게 느껴질 거야.”
드라마의 최종화에서 작가는 주인공의 원한감정 여부, 범죄의 양태, 사회적 해악의 정도 등에 따라 주요 빌런들에게 차별화된 죽음을 선사한다.
▶ 고(苦, pain)에 대한 빈센조 까사노의 인식
purgatorio(연옥) 대가
⇑ +관용 약(弱) ←→ 강(强)
죽음(육체적) < 수치(정서적) < 고통(물리적) < 공포(정서적) < 후회(정신적)
⇓ +고통 +번뇌(권태∞결핍) ⇓
inferno(지옥) 살아서 겪는 지옥
+친애/이해 ⇓
paradiso(천국)
★ 장한서
“인생이 왜 이렇게 선택의 연속인지 모르겠네.”
악을 방조/학습한 생존형 악이었다가, 권위에 저항하며 갱생 가능성을 보이고-1980년대 LA 코리아타운 스타일로 나타났을 때부터-, 형제에 의해 자살에 가까운 타살을 당하면서, 희생과 의지의 대가로 속박을 끊고 해방되는 유일한 인간.
“반성은 말로 하는 게 아니라 바뀐 행동을 계속 유지하는 거야. 뭐 언제까지 갈진 모르겠지만, 아직은 잘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아.”
장한서 또한 이복형에게는 “가장 친밀한 적, 비밀을 공유하는 적, 돌아서면 걷잡을 수 없는 적”이었다. 결국 노예의 상태로 죽은 것이 아니라 주인이 되어 자유롭게 죽었다. 인물의 성장과 구원 서사를 마무리하기 위해 드라마의 짜임새가 매끄럽지 못했던 측면이 있지만(“너희 형제들 문제는 너희들끼리 알아서 해. 난 개입하지 않을 테니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악인의 최후에 내려준 작가의 선물.
★ 한승혁
“생명은 존재에게 주어진 최고의 선물인데?”
“교활한 인간치고 배짱 있는 놈이 없더라고.”
평범하고 친근한 이웃집 악당이지만 공고한 악의 시스템을 실질적으로 지탱하던 축. 교활하고 겁 많은 기회주의자에게 빈센조가 내린 판결은 수치와 공포. 유도한 건 이이제이, 적전분열. 한승혁은 수치를 두려워 않고 생명의 상실을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악인이므로 주인공 대신 작가가 가차 없이 내린 판결은 사형. 죽음의 방식은 배신자에게 어울리는 영화 같은 공개처형.
“승혁아, 양다리 잘못 걸치면 가랑이 찢어지는 건 알지? 과다출혈 오면 요단강을 초고속 모터보트로 건너는 수가 있어, 응?”
“아이고, 쟤 저러다가 진짜로 저승사자가 따라붙으면 우짤라고 그라노?”
★ 최명희
“줄 잘못 잡으면 그게 니 목매는 동아줄 된다. 명심해라.”
최명희가 한승혁에게 던졌던 말은 스스로에게도 적용됐다. 죽음에 초연한 척했지만 충직함을 가장하며 사실상 장한석을 팔아 생존을 꾀하기도 한다. 구치소 독방에 누워 헨델의 <울게 하소서>를 흥얼거리던 장면이 사람이면 응당 가져야 할 죄의식조차 세탁하던 가장 최명희다운 모습.
“당신은 치닫는 욕망대로 사는 괴물일 뿐이지.”
악마에게 동류의식을 느껴 자발적으로 지옥행 급행열차를 탄 metamorphosis적 악인. 빈센조가 안배한 징벌적 복수는 피에 젖은 맨발로 죽을 때까지 불 속에서 춤추는 잔혹동화.
“맥주보다는 줌바댄스를 좋아하지 않나? 그 춤 마음껏 추게 해줄게.”
1+1 싸구려 와인이 된 뒤에, 최명희가 미혹됐던 욕망의 빨간 구두는 다른 주인을 찾아갔을까?
★ 장한석
사연 있는 악인이 아닌, 반사회적 인격장애(태생적 사이코패스+환경적 소시오패스)의 의인화. 드라마적 설정값을 감안해 “사람 새끼가 아닌”, “살 가치가 없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악에게도 애착 대상은 존재했다고 가정한다면, 작가는 마지막에 남김없이 빼앗는다. 사랑이라는 착각(홍차영), 위력으로 지배했던 동생(장한서), 거래로 획득한 존경(한승혁), “나의 콘실리에리”라는 유아적 망상(최명희), 상속받은 권력의 원천이던 재력(비자금), 그리고 마지막엔 자존심과 생명과 묘비.
빈센조가 장한석에게 선물한 죽음의 이름은 ‘속죄의 창(Kop’ye iskupleniya/копье купления, 贖罪의 槍)’. 한편 사망 장면에 깔리는 BGM은 ‘속죄의 창(Finestra di espiazione, 贖罪의 窓)’. -속죄 아닌 번뇌를 선택한 빈센조의 창가엔 더 이상 인자기가 날아오지 않고, 끝까지 속죄를 거부했던 장한석의 시체엔 까마귀가 날아든다.-
이름 없는 묘지에 묻혀 얼굴에 흙을 뿌리는 사람만 있고 아무도 없었다던 악몽은 데자뷰-에필로그에서 포도밭 흙더미를 사뿐히 즈려밟는 홍차영-로 회수됐다. 직접 살해한 혈육의 씁쓸한 회상만이 장한석에게 주어진 일말의 연민(“그때 잡혀서 벌 받았으면 지금처럼 안 됐을지도 모르죠”).
▶ 변호사 ‘자작나무숲’ 핫뉴스
[B그룹 손해배상 소송 관련]
수백억대 규모의 B그룹 불법행위에 의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재판 연기.
사유는 재판 내용이 차기 대선 특정 후보군에 대한 흑색선전 악용 우려로 추정.
B그룹 재판 연기 결정에는 해당 후보 쪽의 입김이 들어간 것으로 추측되나, 전반적인 법무부와의 조율, 선관위의 개입, 남동부지법과의 협의는 남동부지검 J검사의 주도 하에 이뤄짐.
해당 J검사는 현재 부장검사로 인사발령 받음.
한때 B그룹을 6가지 혐의로 기소하기도 했지만, 친재벌파인 현 남동부지검장이 들어오면서 돌아선 것으로 보임.
지검 내에서는 J검사의 부장 영전 소식에 콩고물 얻어먹으려고 줄 서는 중.
★ (+α) 정인국
드라마에서 살해된 검사와 검사 출신 전관 변호사는 총 네 명. 작중에서 둘은 장한석이 죽였고, 나머지 둘은 빈센조가 죽였다-빌런 4인방 중에서 둘은 장한석이 죽이고, 나머지 둘은 빈센조가 죽인 것처럼-. 드라마는 사회의 그림자를 비추는 동굴로 기능한다. 죽음의 이유와 방식은 제각각이지만, 현 시점에 작가가 제일 미워하고 경멸하며 재생 불가능한 쓰레기라고 여기는 직업군이 무엇인지는 명확하다. 결코 스스로를 처벌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처벌받지 않는 구제불능 검찰권력에 대한 심판.
“일개 마피아 새끼가 대한민국 부장검사를 갖고 놀면 안 되지.”
“우리, 대한민국 검사들이다. 절대 굽히거나 지면 안 돼. 특히 이 재벌새끼들 개기면 확실히 짓이겨버려, 알겠어?!”
“범죄자 새끼가 건방은 엄청 떨어, 씨...”
“나 잘못한 거 없어. 원칙에 따라, 질서에 따라 사는 사람이야.”
‘벽벽이가 나쁜 벽벽이짓 몇 번 했다고 공무원을 죽이기까지 해야 하나?’라는 상식적인 질문에 작가는 ‘예스’라고 답한다. 이 우화 속에서 시민을 배신한 정인국은 평범한 가장인 개인이 아니라 나치독일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처럼 내적 갈등 없는 신념으로 구조적 악을 떠받치는 조직 그 자체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마음 놓고 드세요! 부정부페는 당일 들어오는 신선한 재료들로 고객님의 건강을 생각하는 음식을 준비합니다.” 위선자들은 언제나 사회 곳곳에 널려 있었지만, 기회를 줘도 반성하는 척조차 하지 않고 뻔뻔하게 정의를 말하는 군집에는 결코 ‘악을 선으로 갚지 말라’는 작가의 의지. 불의를 인정하는 자가 정의롭다고 주장하는 자보다 낫다는 것이 <빈센조>의 일관된 인간관.
“축하해. 내 경고를 무시하고 죽음을 택해서.”
“내 관용은 값이 좀 나가는 건데 받지를 않네.”
“난 범죄자라도 내가 한 잘못을 잘 아는데, 넌 왜 모를까.”
“잘못을 모르겠으면 잘못이 없게 해줄게. Se non c’è vita, non c’è colpa(생명이 없으면 잘못도 없다).”
# La commedia è finita! 코미디는 끝났다
“빌런에 비싸고 싸구려가 어디 있어. 그냥 다 똑같은 빌런이지.”
“날 죽이면 뭐가 달라지나? 세상에 평화가 찾아오나? 아니면 사회적인 메시지라도 되나? 개뿔, 아무것도 없어. 니가 말한 대로 쓰레기가 쓰레기 죽이는 거지. 니가 아무리 뽀대나게 내를 죽여도, 니하고 내는 똑같은 인간이야.”
<빈센조>는 최종화에서 보편적인 윤리의식과 충돌하는, 극단적인 가학성을 끝내 주인공에게 부여했다. 상상으로 채웠던 여백, 빈센조의 악마성을 노골적으로 직면하자 느껴지는 당혹감. 정인국의 추락사 장면처럼 비발디의 <La stravaganza> 12 바이올린협주곡 6번이 흐를 때가 가장 빈센조다운 살인 방식이라고 여겼는데 안일했다. -구치소 면회실에서 빈센조가 장한석에게 한 말은, 제작진이 시청자에게 한 예고였나? “그냥 말로만 들으면, 니가 체감을 하지 못할까봐서. 허락 없이 들어가서 미안해.”- 이제 정말 그림과 전쟁처럼 한 발 떨어져 관람하라는 친절한 부연설명.
“이렇게 야만의 시대로 돌아갈 필요는 없잖아!”
“세상이 야만적이지 않았던 때는 단 한순간도 없었어.”
개인적 취향으로 마지막엔 좀더 가볍고 명랑하길 바랐지만, 아무래도 작가의 좌절과 분노가 생각보다 깊었던 것 같다. 스플래터와 슬래셔 장르 사이에서 웃음기 뺀 후자에 무게를 실었다. 야만 위의 야만을 사는 마피아, 세계를 전장으로 이해하고 적은 포섭하거나 관용을 베풀거나 제압하거나 죽여야 하는 존재로 인식하는 주인공. 마냥 즐기자니 꺼림칙하고 한편으론 제작진의 선택을 옹호해주고 싶어지는 딜레마.
하긴, 이 드라마에서 죽음을 가볍게 다룬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참혹했다. ‘한 사람의 죽음은 한 세계의 종말’이니, 그게 자비가 필요 없는 악인의 죽음이라 해도 불편하지 않게 만들 순 없었을 것이다.
“지금까진 악당이었지만 이 일이 끝나고 나면 정말 악마가 되는 거예요. 난 변호사님의 선을 지켜주고 싶어요.”
“우리가 해온 일, 솔직히 견디기 힘들 정도로 잔혹했어요. 근데 왜 내가 변호사님 뜻을 따랐는지 알아요? 장한석 같은 인간을 징벌할 최선의 법은 존재하지 않아요. 차선의 법도 없고요. 그래서 변호사님의 차악을 따른 거예요. 그게 옳다고 생각됐으니까요.”
주인공 빈센조 까사노를 ‘가장 센 악인’으로 규정했지만, 드라마에서 살아남은 인물들 중에 무고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홍차영, 남주성, 조영운, 안기석을 비롯한 상대적 선역들도 모두가 살인과 수많은 강력범죄의 방조자이며 공모자다. “경찰한테 보내지 말고, 변호사님이 꼭...” 장한석의 칼을 맞아 생사의 기로에 섰던 전당포 사장 이철욱처럼, 작가도 공권력을 믿지 못하는 세상에서 무자비한 정의를 실현해줄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고 싶은 순간이 있었을 것 같다.
“어떻게든 다 짓밟아서 씨를 말려야 합니다.” 빈센조에게 기요틴 파일을 넘겨받은 대외안보정보원은 후일담에서 검찰과의 공조를 거부하고 철저한 정의구현 의지를 피력하며 희망의 불씨를 남겼지만, 관객은 물론 대본을 쓴 작가조차 믿지 않을 거다. 오늘도 여전히 의무를 망각한 종복들은 미치광이 칼춤을 추고 있고, 괴벨스의 후예들은 부끄러움을 잊은 지 오래. 뉴스를 볼 때마다 현기증이 난다.
“난 여전히 악당이며, 정의 따위엔 관심조차 없다. 정의는 나약하고 공허하다. 이걸로는 그 어떤 악당도 이길 수 없다. 만약 무자비한 정의가 세상에 존재한다면 기꺼이 져줄 용의가 있다. 하지만 이런 세상은 불가능하기에 새로운 취미를 가지게 됐다. 쓰레기를 치우는 것. 쓰레기를 안 치우면 쓰레기에 깔려 죽기 때문이다.”
겨우 열 명의 의인(義人)조차 찾을 수 없는 소돔과 고모라에 빈센조는 불과 유황을 들고 찾아온 파괴자. 화산 폭발 같은 재앙이 지나간 자리에 새로 터 잡는 인간들은 또 다시 악과 타락에 직면할 터다. 악은 부지런하고 끈질기며 촘촘하기 짝이 없으니까. 그러니 기꺼이 다문천왕의 야차와 나찰이 되기로 결심한 ‘까사노 금가 패밀리’처럼 독하게 싸우라는 것이다.
한쪽 발은 교도소 정문에 또 다른 발은 지옥문에 걸쳐놓고, 살아 겪는 지옥에서 쓰레기 치우는 취미를 즐길, 빈센조의 안녕과 행운을 빈다. 여전히 나쁜 소문 나는 걸 제일 경계하며 기부도 많이 하고 살려주는 사람도 많을 합리적 사업가이자 인권변호사, 그러나 주기적으로 포도밭과 올리브나무에 동물성 거름을 주며 지하경제를 주무르고 있을 까사노 패밀리의 동양인 보스. 누군가, 언젠가, <배부른 고양이 : 마피아 변호사 빈센조 까사노의 일생>을 평전(評傳)으로 쓴다면, 가장 낭만적인 챕터가 될 한국에서의 에피소드는 진짜 끝.
“이 더럽고 비열한 마피아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같이 가요, 더러운 마피아!”
“저도 같이 가요, 비열한 마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