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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리뷰는 <빈센조> 9~12화를 복습/재탕하며 의식의 흐름에 따라 작성되었음.
# 이해와 공감을 거부하는 악, 장한석(=장준우)
“한국 대기업들 전부 다 스테로이드 맞은 보디빌더들, 거짓이든 과장이든 근육만 빵빵하게 보이면 그만.” 바벨그룹의 리얼 오너, 장준우는 9화 초반만 해도 빈센조의 실력을 인정하고 라이벌로 인식하고 있다(“나를 더 강하게 만드는 스파링 파트너”). 타고난 creativity를 가진 메이웨더급 소드마스터 빈센조에 대한 선망. 빈센조의 정체를 알기 전, 완벽하게 이긴 후 처리할 것이라 장담하는 그는 스스로 신이 되려던 바빌론인처럼 오만한 캐릭터.
“나한테 가장 큰 문제는 내 기분이 상하는 것밖에 없어.” 영어이름 ‘Jason’, 하키 마스크를 쓰고 충동살인을 저지르는 사이코패스 장한석은 <13일의 금요일> 시리즈의 살인마 제이슨 부히스와 자신을 동일시-정신연령이 어리다는 공통점은 있다-한다. 자본권력마저 눈 아래로 보던 검찰권력도 잔인한 폭력과 가족살해의 협박 앞엔 나약한 개인. 기독교에서 타락과 악을 상징하는 바빌론, 더럽고 미움받는 온갖 새들의 집.
장한석이 정체를 숨기고 경영하는 이유. 첫째, 게임하는 것처럼 스릴이 넘쳐서. 둘째, 큰일 나면 감방 가기 싫어서. 셋째, 신이 된 것 같아서. “신은 꼭꼭 숨어서, 인간에게 불행이란 불행은 다 주면서 엔조이한다. 간혹 행복 한두 개 주면서 ‘세상은 살 만하다’ 착각 심어주고.” 모험하는 걸 싫어하던 최명희는 어느새 뒷산 나들이보다는 위험한 빙벽 등반이 좋고, 세 번째 이유가 제일 맘에 든다고 말한다. “나도 그렇게 되길 바라서요.” 신의 자리를 넘보는 자들끼리의 의기투합. “난 기도 같은 거 안 해.”
“착각하지 마. 일부러 안 죽인 거니까. 곧 진짜 죽일 거야. 겁나면 도망 가봐. 또 따라갈 테니까.” 지은 죄보다 덜 고통스럽게 죗값을 치르는 건 관용. 복수의 원칙 첫 번째, 적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준다. 두 번째, 적이 가장 소중히 하는 걸 없애버린다. 어리바리한 인턴 변호사 장준우라는 가면 속에 숨어 있는 장한석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기 위해 지푸라기즈가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동안 4인의 빌런 내부는 분열한다.
“제가 행복한 바벨로 만들어드리겠습니다. 타인에 대한 죄책감, 공포, 전혀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장한서 비 엠비셔스! 야망과 실행의 간격은 좁을수록 효과가 좋습니다.” 한승혁의 충동질에 넘어가 이복형을 향해 라이플을 쏜 장한서. 단순무식한 루키들이 이길 때도 있지만 승률은 낮다. 수술 후 무사히 깨어난 장한석은 유령으로 남지 않기 위해 회장 자리에 오르기로 한다. “엄청 무서운 꿈을 꿨어요. 이름 없는 묘지에 묻히는 꿈을요. 내 얼굴에 흙을 뿌리는 사람만 있고 아무도 없었어요.” 제일 가혹한 복수의 방법은 그 사람이 가장 공포를 느끼는 걸로 복수하는 것. “누군가에겐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있을 수도 있다.”
“아무도 믿지 말고 주지도 말고 칭찬도 하지 말라”, “기업가가 되려면 절대 위인전을 쓸 수 없는 삶을 살라”는 선대 장 회장의 교육. 길종문 원장에게 부친살해를 지시한 패륜아. 식탁 옆에 걸린 그림은 이카루스의 날개. 본인 말처럼 “이상한 미래를 먼저 잡으면 폭망”하고 “자기 무덤 자기가 판다.” 압생트를 즐겨 마시던 고흐는 자기 귀를 잘라버렸고, 첫 번째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잡아가려는 자의 귀를 잘라버렸다. “파괴자 바빌론이 우리에게 입힌 해악을 그대로 갚아주는 사람에게 행운이 있을지라(Psalm 137).”
#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나라, 금가프라자
가난하고, 무례하고, 염치없고, 무식하고,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못 참는 졸렬함. 금가프라자 사람들이 비호감의 극치가 된 이유들. 곳간에서 인심 나고 삶에 찌들면 팍팍해진다. 혐오감정은 신체적/정신적 위해를 줄 가능성이 있는 대상에게 일어난다. 하지만 약자를 향한 감정은 경멸이 되고, 상대가 강자일 땐 경외가 된다. 빈센조가 유럽의 럭셔리한 마피아 변호사가 아니라 중남미 뒷골목 사채업자 출신이었다면?
고작 이틀이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래서 화만 나는 약자의 심정을 느꼈다는 빈센조에게 홍유찬은 “진짜 약자들은 그 무기력과 화를 평생 느끼고 산다”고 말했다. 악을 악으로 처단하는 빈센조라는 멋진 괴물에 이입했다고 해서 평범한 소시민들을 징글맞은 거머리들, 구제 못할 민폐 덩어리들로 취급할 것인가? 금가 상인들을 초반에 몰염치한 약자로 그린 것은 언더도그마에 빠지지 말되, 그렇다고 사회가 공정하다는 착각에도 빠지지 말라는 작가의 시니컬한 경고로 보인다.
길버트(길벗)가 불씨를 당긴 탐욕, 욕망의 멜팅팟이 된 금가프라자. 바벨건설에 대한 투쟁을 선포하며 금가프라자 입주민들은 빈센조의 골칫덩이가 되지만, 적어도 이들은 바벨화학 산재피해자인 선량한 청년 이우영을 가족처럼 여기고, 바벨제약 유가족들의 억울한 죽음에 분노할 줄 안다. 적하스님의 말처럼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측은지심으로 남을 돕는 자들이야말로 사바세계의 살아있는 부처.
여전히 비둘기로 인해 고통받는 빈센조. 위치선정 기가 막힌 ‘인자기’로 명명. 인자기와의 관계 변화, 관계로 인해 변화하는 주인공. 자꾸 친구를 데려오는 인자기처럼 빈센조의 영역에 점점 침범하는 홍차영과 금가 사람들. 비록 퍼스널 스페이스는 사라져가지만 승리의 근간은 쪽수에 있고, 많아서 손해 볼 것은 없다.
‘지인의 딸->공조 파트너->흥미롭고 일 잘하는 동료->설레는 연애감정의 대상’으로 진화하는 홍차영. 직계가족 같은 친밀감-금괴 앞에서 특히-의 남주성 사무장, 성공한 덕후 안기석 팀장, 조력과 배신과 우정이 혼합된 조영운 사장. 같잖은 적에서 점점 귀여워지는 협력자로 변모한 박석도와 바이바이벌룬 직원들. 금가프라자로 엮인 사람들은 양부를 잃고 까사노 패밀리를 등지고 하나뿐인 혈육마저 끝내 살해당하는 빈센조가 얻게 될 유사 가족.
9~12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얼굴은 케이퍼무비(범죄영화)의 한 장면 같은 12화 엔딩, “마이 프레셔스!”를 외치는 골룸에 빙의한 빈센조의 탐욕스러운 눈동자. 비범한 자는 평범한 속물성을 드러내고, 평범한 속물들은 속속 비범함을 드러내고 있는 가운데 이 역동적인 활극의 끝은? Good as Gold, 금보다 값진 것. “진정한 친구를 얻는 건 보물을 얻는 것과 같다.” 빈센조의 바운더리 안에 들어온 금가 사람들, 새로운 패밀리의 탄생.
# 마카롱 콘샐러드의 매운맛
대외안보정보원 국제범죄정보센터 국제조직범죄대응국 이탈리아조직범죄대응팀 안기석 팀장은 핫식스를 세 캔이나 비우며 홀로 빈센조를 추적하다 아르노의 안군이 되어 금가프라자에 잠입한다. 언제나 콘실리에리의 뒤에 서 있는 ‘헬퍼’ 안기석이 관찰해온 빈센조는 스님들을 위해 직접 전기매트를 깔아주는 자비로운 가톨릭 신자, 어두운 길을 살아온 자신을 반성하며 담배 피우는 청소년을 선도하는 모범시민, 부처님 앞에서 절을 하며 흐느끼는 참회하는 인간,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온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능력의 소유자, 강인함과 탁월한 리더십으로 금가프라자 사람들의 투쟁을 이끄는 체 게바라.
“과거를 참회하고 정의와 약자, 부처님을 위해 절대악과 싸우는 남자.” 하지만 안기석의 오해와 달리 빈센조는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이 아니라 흐룽그니르(서리거인)를 물리친 토르. 실상은 모든 패밀리들이 인정하고 동시에 두려워하는, 이탈리안 마피아 최고의 콘실리에리. 누구보다 냉철하고 강인한, 절대 목표를 놓치지 않는, 계획이 섬세하고 신선한, 마퓌아의 변호사. 죽이기 직전 경고의 의미로 남기는 이니셜은 까사노 패밀리의 콘실리에리, 'C'.
예의 차리지 않아도 될 상대에겐 강압적인 반말과 업신여기는 태도로 일관하는, 세 번 말하는 거 딱 질색인(“누가 지시했어?”, “무릎 꿇어”), 빈센조가 사람을 간헐적으로 무시하는 모먼트. “그저 그런 정보처겠지 뭐.” “잘 배우고 있네요, 훌륭한 변호사 되겠어요.” “시끄럽게 굴지 마. 조용~히 먹고살아. 알았어?” “구멍가게 하던 주제에” “용건이 뭐야?” 면도날이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빈센조 까사노.
“악당들의 살의를 부추기는 방법은 공개적인 조롱과 적절한 협박.” 금가 패밀리의 까발리어TV 에피소드는 인자기(=비둘기)가 빈센조의 페르소나라는 점을 못 박은 장면. 한 마리 고독한 존재였던 인자기가 동료/이웃과의 공존/동행을 선택한 것, 창피하지만 마지못해 촬영에 응하고 또 필요 이상 잘해버리기까지 하는 모습을 통해 빈센조가 금가프라자(=new패밀리)에 스며드는 과정을 보여준다.
맘만 먹으면 전 인류를 열 받게 만들 수 있는 홍차영, 남을 모함하고 모해할 땐 가차없지만 자신에 대한 티끌만한 비난에도 파르르 떠는 빌런들의 하찮은 반응이 만들어내는 블랙유머는 실컷 웃다가도 최명희 역 배우가 과거 국정원의 합성사진 이미지 조작 피해자임을 어쩔 수 없이 떠올리게 한다.
마피아가 마피아게임을 하다가 마피아로 잡혀가고, 마피아 콘실리에리임이 동네방네 소문나도 마카롱 콘샐러드로 희화화해버리는 <빈센조> 월드. 이 세계에선 미스터리에서 로맨스로의 전환도 찰나이며, 코미디에서 살벌한 러시안룰렛게임의 느와르로 전환되는 낙차감도 어색하지 않다.
러시안룰렛에 사용한 총은 진짜인가, 아니면 잘 만든 모조품인가.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까사노 가문의 콘실리에리를 직접 조사했던 정보상은 빈센조 까사노가 어떤 인물인지 한국인 중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 그 자신의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적을 잔혹하게 죽일 수 있는 괴물이라는 것. 그리고 상대가 이미 알고 있는 정보를 역이용하는 것은 아마도 콘실리에리 빈센조의 주특기.
# 빈센조가 득템한 불법총기 리스트
마피아 콘실리에리인 만큼 맘만 먹으면 진짜 총이든 가짜 총이든 구할 방법 있겠지만, 굳이 애쓸 필요가 없다. 작중에서 총을 가진 상대를 제압하고 줍줍 했을 권총 수만 따져도...
- 구슬이들(황규 & 혁필) : 최소 2정 + 특수협박용 모의총포 1정
- 마피아 암살자들 : 최소 3정
- 정보책 김상윤 : 최소 1정(무기 로비스트라서 원하는 만큼 공급 가능)
- 조영운 사장 : 총알 없는 1정
“무슨 영화도 아니고”, “총 쏠 일 없다”더니... 총기소유 금지국가 대한민국, 이대로 괜찮은가.
# “상관없어요. 판결은 내가 할 거니까.”
시시때때로 유쾌통쾌한 탄산 코미디의 외피를 뒤집어쓰지만 극의 기저에 흐르는 진득한 정서는 추모, 기억, 천착. 초점은 생존자가 아닌 ‘유가족’. 유가족은 이미 몇 번 죽은 사람들이다. 날벼락처럼 가족을 잃으면서 첫 번째 정신적 죽음을 겪고, 원통함에 귀기울여주지 않고 부관참시하는 사람들을 통해 두 번째 사회적 죽음을 겪으며, 심지어 9화에서는 복수에 동참했던 유가족들이 세 번째 물리적 죽음까지 맞이한다.
“죄책감 접어두고, 더 효율적이고 실용적인 생각을 해요.”
“적어도 이 네 사람이 바벨제약 창고를 불태우게 한 건 후회하지 말자고요. 이분들 바람이었고, 위안이 됐으니까요.”
“난 지금까지 악당들하고만 싸워왔어요. 죽이든 죽든 우리끼리 해왔죠. 하지만 이 네 사람은 악당은커녕 악당 근처에도 있던 사람들이 아니었어요. 이분들이 흘린 피의 대가, 반드시 치르게 할 겁니다. 이건 나한테 정의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까지 내가 지켜온 룰에 관한 문제예요.”
이 드라마는 내내 장례를 치르고 있다. 진실의 편린조차 밝혀내지 못하고 어떤 책임자도 처벌하지 못하는 사회적 참사들에 대한 은유. ‘지겹다’, ‘그만하라’고 윽박지르지만 진절머리 날 만큼 제자리걸음하는 무능과 진상규명을 집요하게 방해하는 악의. 왜곡보도와 여론조작, 거짓말을 하는 사람의 힘과 정비례하는 거짓말의 힘. “유가족은 평생 아픔을 잊지 못한다. 그저 행복에 덮이기를 바랄 뿐.” 남겨진 자들이 망각하지 않는다면 생물학적 죽음은 영원한 죽음이 아니다. 제대로 장례식을 치르지 못하면 남아있는 사람들의 삶 전체가 장례식.
“마음 더 차갑게 해요. 복수는 냉정할수록 성공률이 더 높아요.”
“책임 묻지 않을 거예요. 찾게 되면 바로 죽일 거예요. 말려도 할 겁니다.”
그래서 작중 홍차영과 빈센조, 그 동료들은 참사의 원흉을 직접 응징함으로써 위선적인 영웅주의가 아니라 망자를 위한 거대한 씻김굿을 하는 샤먼(무당)이고, 특히 빈센조는 잔혹한 서부극의 데스페라도(무법자) 또는 언더테이커(장의사)처럼 적들의 관이 필요한 일을 만들거나 그 관을 운반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다. 더 나아가 주인공들은 4화에서, 그리고 16화에서 유가족 당사자가 되는데, 이로써 복수의 대행자에서 어벤저(원수를 갚는 자) 그 자체가 된다. “마지막 기도나 해.” 빈센조의 키사스(Qisas, 당한 만큼 갚아주는 <꾸란Koran>의 형벌 원칙. 살인 등 피해자의 혈육에게 주어지는 ‘피의 복수’ 권리).
“약속한 원칙을 깨야겠네요. 누구도 해치지 않는다는 거.”
“원칙 철회할게요. 필요는 모든 원칙을 깨뜨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