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한참 전부터 상자 안에 들어와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탈출구는 어디지?
그 때 내 옆에 있던 이가 위에서 내려온 큰 손에 이끌려 간다.
뭐야, 여긴 천장에서 엄청 가깝잖아.
상자 바닥부터 여기 꼭대기까지 많은 이들이 겹겹이 쌓여있고,
다들 하루 빨리 이 곳을 나가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아래에 있는 것보단 여기가 훨씬 탈출에 유리할테니,
여태 지내왔던 대로 있으면 자연스럽게 나갈 수 있겠지.
피 튀기는 분위기 속에서도 평온했다.
옆에 있던 이들이 하나하나 떠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래에 있던 이들과 난 같은 눈높이에 있게 되었다.
왜지? 이 상자를 먼저 탈출한 그들은 뭐가 다른 거야?
알 듯 말 듯한 의문이 생기기 시작한다.
더 아래에 있었던 이들도 하나하나 떠나기 시작한다.
그제서야 위기를 느끼고 돌이켜본다.
무엇 하나 두드러지게 잘난 게 없는 것 같다.
특출한 능력도 없고 특별히 외양이 눈에 띄지도 않는다.
하지만 분명 더 위에 있었어. 그 자리를 유지하는 것만큼은 최선을 다했어.
그 노력은 틀린 건가?
상자 안에 갇힌 이들을 하나 둘 끌어올리는 저 손의 주인은 누구인가
무엇을 기준으로 누구를 택하는가
좀 더 다르게 노력하면 선택받을 수 있는 것인가
이 곳을 나가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아니 애초에 이 곳을 빨리 나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상자 속에서 뭔가 깨닫고 더 할 수 있는 일이 있지는 않을까
어느 새 상자 바닥에 누워있다.
곁에 남은 이는 몇 없다.
위에서 커다란 손이 내려온다.
그 손이 드디어 닿았다.
여태 아무런 의심 없이 손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닿고 보니 쇠사슬같기도 하고 올가미같기도 하다.
이 상자를 나가서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