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효세자(재세 : 1782년 음력 9월 7일 ~ 1786년 음력 5월 11일)는 정조와 의빈 성씨의 아들로 1782년(정조 6)에 태어났다.
1784년(정조 8)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2년 뒤인 1786년(정조 10)에 홍역이 발병하여 창덕궁 별당에서 5세로 세상을 떠났다.
처음 시호는 온효(溫孝)라 하였다가, 최종으로 시호를 문효(文孝)라 하였다.
효창원은 조선 22대 정조의 첫째 아들인 문효세자의 원이다.
효창원은 처음 조선시대에 세자의 묘제 형식에 맞게 조성하여 정자각, 비각,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하였다.
그러나 1944년에 서삼릉으로 이장하면서 원침에 있는 석물과 신도비, 표석만 옮겨오게 되었다. 신도비는 입구에 세웠다.
출처: 문화재청
정조는 아들과 부인의 안식처를 궁에서 멀지 않은 곳에 두고 싶어했다.
정조가 아들 문효세자를 떠나보낸 뒤 직접 지관(풍수전문가)들과 함께 도성 주변의 길지를 찾아 다닌 이유다.
도성과 한강 사이에 위치한 소나무 숲이 우거진 양지바른 언덕(현 효창공원)을 발견한 정조는
이곳을 아들의 묘로 정하고 장사를 지낸 뒤 '효성스럽고 번성하다'라는 뜻의 '효창묘'로 명명했다.
반년 뒤 의빈성씨 덕임이 사망하자 세자 묘 아래쪽 언덕에 그의 묘도 마련했다. 1870년 고종은 도성에서 가장 가까운 왕실 묘역인 효창묘를 효창원으로 격상했다. 효창원은 지금의 만리동과 청파동, 남영동, 공덕동, 도원동, 용문동에 이르기까지 100만 평에 이르는 숲으로 이뤄진 큰 규모를 자랑했다.
정조는 문효세자가 너무도 일찍 죽어서 왕권승계를 무척 걱정하였고, 그 애잔한 마음을 담아 일찍 세상을 떠난 아들의 신도비를 직접 써서 세웠고 그 신도비가 '효창원'의 묘역 입구에 서있다.
그런데 효창원은 본래 마포구 효창동 현재 효창운동장 근처에 있었다.
그러던 효창원은 1944년 일제 말기에 근방을 개발하는 과정에 지장이 있게 되자, 이곳 고양시 원흥동 서삼릉으로 이전하였다.
현재 효창원 앞에는 왕자의 묘로서 석물들이 서 있으며, 왕아니 왕비의 능에 비해 훨씬 간소하다.
석물은 원 앞에 장명등과 혼유석이 1기씩 서있고 원의 앞에는 망주석, 문인석 석마가 1쌍이 좌우로 도열하였고,
능의 뒤로는 석양과 석호가 좌우로 2기씩 서있다. 현재 효창공원은 바로 문효세자의 효창원이 있어서 그 지명이 효창동이 되었던 것이나
지금은 본래 효창원은 이사가고 그 이름만 남아서 효창공원이 되었다.
근방개발이라 함은?
1920년대 일제는 왕가 무덤이 있던 효창원에 골프장을 만들어서 공놀이를 즐김
효창원 왕가의 묘역은 일본 군대가 서울 땅에 주둔하기 시작하면서 훼손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효창원 솔숲이 펼쳐진 만리재에 병력 5000여 명의 숙영지를 마련해 주둔했다. 1904년 러일전쟁을 거치며 일제는 보다 본격적으로 효창원을 포함한 용산 일대를 일본군 기지로 만들어간다. 1910년 나라가 망한 뒤 일제는 효창원이 갖고 있던 위엄을 격하시키기 위한 여러 작업에 들어간다.
첫째가 서울지역 최초의 골프장이었다. 전국적으로 3.1운동이 발발했던 1919년 그해 일제는 효창원 일대에 5만7000평 9홀 규모의 골프장을 건립한다. 해당 골프장은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운영하던 조선호텔의 부속골프장으로 1924년 12월 청량리 일대에 대규모 골프장이 마련될 때까지 애용됐다. 골프장 건립 이유로 문효세자의 묘역에는 울타리가 세워졌다.
1925년 대홍수가 발생하자 일제는 효창원 일대에 천막촌을 마련해 이재민을 수용했다. 이듬해인 1927년부터는 효창원의 공원화를 위해 총독부가 주관하는 벚나무(사쿠라) 심기 행사를 수년 동안 반복적으로 열었다. 이후엔 일제 스스로 자신들의 행적을 기념하기 위한 각종 비석을 효창원 곳곳에 세웠다. 급기야 1940년에 일제는 효창원의 공식명칭을 '효창공원'으로 바꿔 버렸다.
1944년 10월 일제는 침략전쟁의 희생자를 위한 탑을 마련한다며 효창원에 잠든 문효세자와 의빈성씨 등 정조 가족들 묘를 강제로 이장하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정조가 효창원에 묘를 마련한 지 150여년만의 일이다.
의빈성씨의 묘는 정조가 특별히 예외를 두어서
아들인 문효세자의 효창묘와 한곳에 두었고 두 묘의 거리가 백 걸음 떨어져있는데, 정조가 의빈의 생전 소망을 따랐다고 함.
(실제로 숙종때 숙빈 최씨 릉을 옹주들과 같이 두자 했다가 숙종이 내시 파직한 예가 있어서 예법으로는 맞지 않는다고함)
본래 의빈묘는 곡장, 혼유석, 명등석, 망주석 한 쌍, 문인석 한 쌍, 묘상표석, 비각, 제각이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일제의 불순한 의도로 효창원이 효창 공원으로 격하되면서 경기도 고양시의 서삼릉으로 이장되었다.
문효세자는 백부인 의소세손과 나란히 묻혀있고, 의빈 성씨는 효창원에서 2km 떨어진 일제가 지들 멋대로 조성한 후궁묘역에 묻혀있음..
일제는 1945년 8월 패망한다. 왕가의 무덤을 훼손한 지 8개월 만의 일이다. 일제강점기 내내 목숨 걸고 독립운동을 한 지사들은 고국으로 돌아와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한 작업에 들어간다. 임정을 이끌었던 백범 김구가 선두에 섰다.
백범은 일제가 훼손한 왕가의 무덤에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한 지사들을 모실 계획을 실천한다. 이들이 바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그리고 안중근이다. 1946년 7월, 안중근을 제외한 유해를 찾은 삼의사의 국민장이 거행됐다. 2년 뒤인 1948년 9월에는 임정의 국무령을 지낸 이동녕과 비서장을 지낸 차리석의 유해를 봉환해 효창원 언덕에 모셨다.
출처: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