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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쥔 공무원증은 그가 흘리고 간 유일한 흔적이었고, 의문이었다. 곤은 매일같이 이 신분증 속 여인에게 물었다.
‘그가 날 살린 이유를, 내가 살아남은 이유를 당신은 아느냐’고. 덕분에 여인은 곤에게 습관이 되었다.
이십오 년이 지난 지금은 누구보다 친숙했다. 곤에게는 위로였고, 위안이었다.
그렇게 묻다 보면 어느새 여인은 곤이 살아남은 이유가 되어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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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오 년 동안 나한테 자넨 허수였어.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수. 상상의 수지만 우주를 설명하는 수.
그런데 자넬 이렇게 발견해버린 거야. 자넨 허수가 아니라 실수 0이었던 거지.”
정확하게 곤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태을의 존재는 그랬다. 곤은 담담히 다음 말을 이었다.
그저 실존하기만 해도, 실수이기만 해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곤은 깨달았다. 태을은 실수 중에서도 0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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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두 사람 사이로 나풀나풀 무언가가 날렸다. 비가 그친 뒤 내리기 시작한 흰 눈송이였다. 첫눈이 두 사람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같이 가자. 나의 세계로.”
세상 모두가 용감할 순 없겠지만, 태을은 용감하기로 한 사람이었다. 곤은 그런 태을을 믿었다. 그런 태을이라 자신에게 ‘0’이 될 수 있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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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은 가장 명예로운 순간에 군복을 입어. 이기고 오겠단 얘기야. 명예롭게 돌아와서, 금방 갈게.”
“……온다고?”
“기다려줄 건가?”
“또 보자. 이곤.”
태을에게 불린 자신의 이름은 낯설고도 황홀했다. 곤은 가슴 깊이 제 이름을 새겨 넣었다.
“부르지 말라고 지은 이름인 줄 알았는데 자네만 부르라고 지은 이름이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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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사랑하는 사람이 조금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지치고는 한다.
그런데 태을과 곤의 사이에는 알 수 없는 차원이 거대한 벽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그 벽 앞에서 태을이 너무 힘들거나 지치지 않기를 곤은 바랐다. 이기적인 마음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황제가 될 이로 태어나고 자라며 처음으로 가져보는 이기적인 마음이었다.
“부디, 지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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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행세계, 신분증, 같은 얼굴. 골몰히 생각하면 할수록 답은 하나였다. 태을은 자신이 어떠한 운명 앞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운명은 스스로의 선택이지만, 어떤 운명은, 운명이 삶을 선택하기도 한다. 태을도, 곤도. 두 사람은 함께 서 있었다. 운명 앞에.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날 일들은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일상은 언제나 짧고, 잠시뿐이라는 슬픈 예감도 태을을 막지는 못했다.
태을은 자신을 선택한 운명을 어떻게든 헤쳐 나가기로 했다. 피하는 것도, 의심하는 것도 끝난 지 오래였다. 이제 그저, 사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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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간지주 사이를 넘자 차원의 문이 열리며 아무것도 흐르지 않는 문 안쪽의 세계가 열렸다. 붉은 풍선들이 떠다니는 세계.
곤은 자신의 당간지주를 등진 채 반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달려도, 달려도 끝없이 펼쳐진 세계는 그야말로 끝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곤은 멈추지 않았다.
끝을 보고 싶었다. 두 세계의 균형을 깨뜨리고 있는 이림의 끝을, 차원의 문이 품고 있는 비밀의 끝을. 그리하여 마침내는 닿고 싶었다. 태을과의 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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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 자넬,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어.”
가슴 아픈 고백에 태을은 깨닫고 말았다.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곤이 눈물을 터뜨리는 태을을 끌어당겨 키스했다.
눈을 감은 곤의 볼 위로도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우주를 건너온 연인의 절절한 키스였다.
그는 다른 세계가 아니라, 다른 시간 속에서 왔다는 걸. 태을은 알 수 있었다.
“어느 순간 내가 눈앞에서 사라진 듯 보일 거야. 그렇더라도 너무 걱정하지는 마. 나는, 멈춘 시간을 걸어가는 것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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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적에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반쪽짜리 식적을 계속해 사용하는 부작용일 것이다. 곤은 절망을 애써 삼켰다.
시간이 곤에게는 느리게, 다른 이들에게는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과거에 갇혀 절망스러운 곤에게 유일한 희망은 과거의 태을과 만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제대로 된 인사도 못하고 피리 소리를 따라 떠나온 자신은 못난 연인이었다.
곤은 과거의 태을을 몇 번 만나기로 마음먹었다. 2020년의 어느 날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태을이 조금이라도 덜 아프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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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변하지 않았어. 운명은 진짜 바꿀 수 없는 걸까?”
“그럴 리 없어. 운명이 그렇게 허술할 리 없어. 커다란 운명일수록 더 많이 걸어야 도착하게 되는 거 아닐까. 우린 아직 다 도착하지 못한 것뿐이야.”
가혹한 운명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싶을 때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이유가 되었다. 마땅히 주어진 운명을 사랑할 이유. 곤은 어느새 잠든 태을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조금 야윈 듯한 사랑스러운 뺨에 곤은 조용히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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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그날 밤과 똑같이 흐르기를 바랐다. 그러나 달라졌다. 달라지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달라진 걸까.
자신이 용감해지겠다던 태을과 곤을 대신해 총을 맞던 은섭과 두 번 고민 않고 이림과 함께 가겠다던 신재, 무운을 빌어주던 노상궁.
그 얼굴들이 곤의 머릿속을 스쳐 지났다.
곤은 깨달았다. 아름다운 식일수록 간단하다. 달라진 건 그날과 달리 오늘 밤,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우린 아직, 다 도착하지 않았으니까.’
곤은 사인검을 문 앞에 내려놓고 영과 같이 천존고로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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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과 사랑했던 정태을. 아마 자신을 잊었을 테지만, 그래도 태을이 보고 싶었다. 태을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문을 열 때마다 기대했고, 태을을 만나지 못할 때마다 실망했지만 곤은 태을을 찾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온 우주의 문을 열어서라도 태을을 만나고 싶었다.
이렇게 세월이 흘러서 결국에는 문과 문의 세계를 떠돌다 죽게 된다고 하더라도……. 헛된 시간이 된다고 할지라도 상관없었다.
태을을 찾는 시간이 헛될 수는 없기에 곤은 맥시무스와 함께 숱하게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