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한번쯤 보지 않을까 했는데 인생주간 할인하길래 할인쎄려서 보고 왔어. 극장이 정동길에 위치해 있어서 걷는데 되게 좋았당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에서 하고 있었는데 좋더라. 2층은 못올라가봤지만 1층은 소규모 팬미팅 같은거 하기에도 좋아보였어. 음향은 아쉽고. 대사는 잘들리는데 노래할때 너무 쨍쨍해서 가사가 쫌 안들렸음. 그래도 이 가격에 이 퀄이면..ㅇㅇ
미드나잇 액터뮤지션은 비지터가 문을 두드린다. 맨과 우먼이 등장한다. 정도만 알고봤어. 플레이어들 배우가 특정 조연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를 연기하는 것도 극 시작하고 알았고. 무엇보다 배경을 전혀 모르고 봤는데 극이 시작되니 약간 움츠러들기 시작함. 독재정권이 배경인것 같았는데 개인적으로 그런 배경에 거부감이 큰 편이라 보는 내내 조마조마했던 것 같아. 그만큼 펼쳐지는 상황이 필터링없이 생생하게 느껴졌어. 역사적 배경을 염두해둔 것 같았는데 세계사 알못이라서.. 어떤 나라 어떤 시대 라기보단 조지오웰의 소설 <1984>로 대입해서 봤어. 주인공인 맨과 우먼이 처한 상황이 꽤 비슷해 보였거든. 무작위나 다름없이 끌려가 고문당하고 살해당하는 사람들. 의도없는 말이 실체없는 자의 입맛대로 해석되어 반역으로 몰리는 시대. 그 시대의 사상에 굴복하고 물들어버린 맨과 우먼. 두 사람 같은 사람들을 찾아 데려가는 비지터.
비지터가 객석 내 복도에서 등장하며 극이 시작되는데 복도를 걸어내려오며 잠깐씩 멈춰 서서 객석을 살펴. 구경하듯, 응시하듯, 바라보는 눈빛에 감정이 있는듯 없는듯. 되게 오묘해. 확실한건 사찰당하는 느낌이었음. 걸음걸이도 독특한데 구두 앞코를 제외하곤 온 몸의 중심축이 앞으로 기울어진 자세였어. 전체적인 몸의 균형과 대조되게 위로 치솟은 구두앞코와 대비되서 인상적이었어. 그 자세에서 앞으로 질질 끌듯 걸었고 덩달아 구두 끌리는 소리가 조용한 객석내에 둔탁하게 울려퍼졌어. 신경이 거슬리다 못해 점점 공포스러워졌음. 비대칭적으로 기울어진 몸을 편안히 건사하며 걷는 남자의 오묘한 무표정은 인간같아 보이지 않았어. 맨과 우먼은 그를 악마라고 표현했는데 모르겠어. 비지터 라는 새 종족, 인류라고 받아들였음. 그만큼 비지터를 연기한 박유덕 배우의 연기에 숨이 눌릴듯한 위압감을 느꼈어. 이런 분위기를 유독 두려워하는 편이거든. 그래서 극의 시작이자 비지터의 등장이 극이 끝나고도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야.
두번째로 인상적인 장면은 우먼이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노래하는 씬. 끝에 고음 올라갈때 못올라가서 쫌 깨지긴 했는데 그래도 우먼 배우의 목소리가 어여뻤어. 뮤지컬 정통파(?)보단 인디밴드 뮤지션 같은 목소리였음. 우아한데 소녀같은 목소리 있자나.
마침내 비지터를 두번째로 살해하고 끝났다란 표정으로 비지터 위에 걸터앉은 우먼이었어. 그녀가 저지른 짓과 상반되는 가녀린 다리나 몸이 대조적으로 보였음. 극 중 우먼이 비지터를 두번 살해하는데 한번은 머리를 후려갈기고 두번째엔 눈알을 뽑아버림. 어영부영하는 맨과 다르게 "정신차려!"라고 외치면서 어떻게 버릴까. 토막을 내야해. 라고 해. 맨이나 우먼이나 둘다 쓰레기 같은 짓 많이 했는데 극중 관객들에게 보여지는 임팩트있는 짓은 우먼이 많이 함. 그게 비지터가 애초부터 그녀를 선택했던것 같은 이유였어. 확실하진 않지만 맨이 비지터의 꾀임에 넘어가 희생하고나자 비지터가 기다렸다는 듯 우먼에게 나와 함께 가자는 포즈를 취하는데 애초부터 노렸던 건 우먼 같았어. 맨 처음 만났을때도 호감을 보이며 우먼한테 키갈한것도 같은 선상인듯해. 동족을 만난 반가움과 희열로 보였어. 그리고 비지터의 손길이 어깨에 닿자 시든 꽃처럼 축 늘어져서 실시간으로 영혼이 빠져나가는 듯 걷는 우먼이 세번째로 인상적인 장면이었음. 그녀는 영혼이 빠져나간 채 비지터가 쥐어준 탬버린을 흔들고 비지터와 플레이어들이 모두 사라지고 남은 자신의 방 안 피아노 위에 놓인 종을 열두번 쳐. 이때 위에서 아래로 탕 탕 탕 치는게 아니라 손끝부터 팔목까지 곡선을 그리며 치는데 그녀의 마지막 의지처럼 보였어. 열두번째 종이 울리면 이 극이 끝날걸 이미 알고있고 열두번째 종이 울리면 그녀가 완전히 죽으리란 느낌이 들었어. 그래서 죽기 직전 영혼이 조금이라도 달라붙어있는 육신이 마지막으로 우아하게 마무리하고 싶어하는 욕심으로 보였음. 그리고 열두번째 종이 울릴때 무대는 완벽히 암전돼. 비로서 극이 끝나.
공연 내내 고함소리, 비명소리, 자극적인 소리가 전면적으로 밀고들어와 쫌 괴로웠어. 신경을 최대치까지 긁겠다는 듯 날카롭고 새된 소리도 계속 들려오고. 보통 이런 극은 끝나면 그래서 어쩌라는거지.. 로 끝나기 마련인데 그렇지 않았던 건 결말때문이었어. 만약 맨과 우먼이 서로 살겠다고 서로를 고발했다면 개싸움 극이 개싸움으로 끝나는 구나 라고 생각했을텐데 맨이 우먼을 위해 단번에 희생해서 그렇구나.. (납득)하게됨. 기승전결을 모르겠는데(체감상 기전전전전결) 넘버가 등장하는 사이사이에도 맺고 끊음이 확실한 뮤지컬이었어. 확실히 뭘 봤다 라는 느낌이 드는 끝마무리였음.
보는 내내 힘들었는데 끝나고 그렇군.. 하며 쓰다보니 말이 길어지고 있어. 그래서 앤틀러스는 어떨까? 라며 앤틀러스도 쫌 보고싶어졌어. 요상하게 홀린 기분임. 혹시 나처럼 안본덬에겐 쓸모있는 후기는 아닐거 같은뎈ㅋㅋㅋㅋ 그래도 재밌게 봐서 꼭 적고싶었음. 읽어준 덬들이 있다면 고마워!
+ 커튼콜 끝나고 무대인사 했는데 대표로 박유덕 배우(비지터)가 인사하고 끝냈어. 크리스마스 잘보내래ㅋㅋㅋㅋ 뭔가 얼레벌레하면서도 그 안에서도 티키타카되는 분위기가 보기 좋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