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연 - 재삼연 비교 있음. 불호 실존. 100% 개인 생각. 인용한 대본은 초연 기준.
스포... 랭보에 스포랄 게 있나? 첫 넘버부터 랭보가 죽었다고 알려주고 시작하지만 어쨌든 스포가 있다면 있음.
내가 보기에 <랭보>는 정말 신기할 정도로 랭보와 베를렌느의 관계에서 로맨스적인 부분을 들어내고, 서로의 시를 알아본 이해자로서의 면모를 부각한 극이야.
(오해금지: 나 로맨스적인 부분을 부각한 극도 좋아함) 얘넨 좀... 심할 정도로 시에 집중하고 있어.
사랑한다는 말? 안 함.
입맞춤? 하긴 하는데 서로에게 하는 게 아니라 상대가 시 써놓은 모래바닥에 함. 아니면 상대의 시집이나 글에.
랭보가 베를렌느한테 빡친 이유? 다른 것도 아니고 베를렌느가 자기 시를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기 때문임.
브뤼셀에서 재회했을 때 랭보가 하는 말은 “두 번 다시 내 시가 망상이라고 말하지 마.”, 사이 빠그라지면서 하는 말은 “우린 서로를 알아보지 말았어야 했어.”
진짜 지독하게 시와 이해로 얽힌 관계야.
개인적으로 <랭보>에서 (그나마) 가장 로맨스적인 대사를 꼽으라고 하면 베를렌느의 “내가 정말로 원한 건 시를 쓸 잠깐의 시간, 그리고 너. 그 두 가지뿐이었어.”인데 심지어 여기서도 시를 언급함. 진짜 지독한 미친놈들... 아니 시친놈들이 아닐 수 없음.
그럼 들라에는 어떻냐 하면, ‘모음들’에서 나오다시피 랭보의 시를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
혹은 반대로, 랭보의 시를 사랑하지만 이해하지는 못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들라에도 이 사실을 알고 있어. 좀 잔인하리만치 명확하게 알고 있음.
1872년 기준 인구가 13000명도 되지 않는, 프랑스의 작은 도시 샤를르빌의 농부 에르네스트 들라에는 결코 랭보의 이해자가 되지 못해.
랭보 들라에, 나 결국 아무한테도 이해받지 못한 것 같아.
들라에 (달래듯) 무슨 소리야. 내가 여기 있잖아. 사람들도 곧 네 시를 이해하게 될 거야.
랭보 그럴까?
들라에 (미소) 그럼, 물론이지.
랭보 하지만 지금은 그 사람밖에 없어. 내 시를 이해해줄 사람, 그 사람뿐이야.
난 랭보에게 “내가 여기 있잖아.”라고 말하면서, 들라에는 속이 박박 긁히는 기분이었을 거라고 확신함.
들라에가 아무리 상냥하고 다정해도 랭보에게 있어 베를렌느의 역할, 이해자로서의 역할을 대신해주진 못해.
그래서 난 재연 오면서 추가된, 추문이 실린 신문기사가 너무너무 불호야. 동료 이상의 관계 어쩌구저쩌구 하는 그거.
첫째로는 갑자기 랭보와 베를렌느 사이의 로맨스적인 부분을 눈앞에 들이밀어서,
둘째로는 들라에를 무슨... 서브남처럼 보이게 만들어서.
사실 둘째 이유는 들라에가 신문 읽은 다음에 곧바로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눈다...’ 하지만 않았어도 그럭저럭 해결됐을 문제임.
그런데 랭보와 베를렌느의 ‘부적절한’ 관계를 암시하는 신문을 읽고 그런 가사의 넘버를 부르니까 문제였던 거지.
원래는 랭보의 이해자가 되지 못했던 속상함을 드러내는 넘버였는데, 갑자기 분위기 삼각관계가 되어버리니까.
이 부분에서 아쉬운 게, 재연 오면서 삭제된 게 있거든.
들라에가 랭보와 베를렌느를 찾아오고, 랭보가 둘 앞에서 시를 발표한 뒤에 들라에가 집에 돌아가자는 얘기를 좀 하다가 이렇게 말해.
들라에 솔직히 이 시도 난 별로야. 그냥 그럴싸한 단어들만 줄줄이 늘어놓을 뿐이잖아. 너답지 않아.
파르나스파니 보들레르니 하는 얘기를 나누는 랭보와 베를렌느와는 다르게(요즘말로 그뭔씹...), 들라에는 랭보의 시가 예전같이 아름답지 않고 겉만 번지르르하다고 지적함.
동시에 자신은 베를렌느처럼 랭보와 시에 대한 얘기를 나눌 수 없다는 것을 슬퍼해.
그리고 들라에의 지적에 버튼이 눌려 환청을 듣기 시작한 베를렌느는 들라에를 비난하지.
베를렌느 들라에라고 했지. 시에 대해 잘 아나? 랭보다운 게 뭔데?
들라에 우린 어릴 때부터 친구였어요.
베를렌느 그렇다고 네가 랭보는 아니지. (중략)
대체 둘이 어떻게 친구가 된 거야? 서로 많이 다른 것 같은데. 극과 극끼리 통하는, 뭐 그런 건가? (중략)
이 시, 정말 이해했어? 정말로 이해했냐고!
즉, 초연 때는 베를렌느가 환청을 들은 게 결국 랭보의 시와 관련이 있었어. 재연부터는 ‘추문 때문인가?’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지만.
난 셋 중 들라에를 제일 좋아하지만, 이 장면이 들라에에게 너무한 것과 별개로 (사유: 랭보는 베를렌느 찾아서 뛰어나감) 정말 좋았거든.
그런데 랭보와 베를렌느가 시친놈이긴 하지만 들라에도 만만치 않아. 얘 랭보 시 너무 좋아함.
런던에서 베를렌느와 그 일을 겪고도(초연 기준이라면 저런 말을 듣고도!) 다시 베를렌느를 찾아와서(심지어 랭보를 쏘고 복역했다가 막 형무소에서 나온 상태의!) 자신의 무례를 사과하고 랭보의 시를 출판해달라고 부탁할 만큼.
들라에한테는 랭보도, 랭보의 시도 너무 소중함. 그리고 여전히 이해자가 되고자 하는 열망을 마음 한구석에 가지고 있지.
베를렌느는 들라에에게 “나처럼 되고 싶지 않으면 너도 그만 네 갈 길 찾아가.”라고 했지.
이 말을 완전히 따른 건 아니지만, 어쨌든 들라에는 랭보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아프리카 행 배에 올랐어.
랭보의 마지막 시, 진정한 시를 찾으면 자신도 자신의 길을 찾고 조금이나마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여기서 또 아쉬운 거. 아니... 대체 왜 ‘나란히’를 본공에서 삭제하고 커튼콜로 빼 버린 거지?
랭보가 “나와 같이 오아시스를 찾아 헤매던 아이.”라고 말하는 것과 이어지잖아. 랭보가 첫 번째 소설을 쓰게 된 계기이자 그 소설의 주인공이 랭보와 들라에라는 걸 알려주고, 랭보에게 들라에는 이미 특별한 사람이었다는 걸 보여주는 넘버인데... 대체 왜?
‘마치 탐험가 같았던 너와 나’가 랭보와 베를렌느일 수도, 랭보와 들라에일 수도 있다는 게 얼마나 가슴 벅차는 일인데.........
베를렌느가 자기도 랭보 때문에 행복한 순간이 있었다고 하니까 들라에가 손 내밀고 그냥 둘이 돌아가버리는 거 너무 어이없음.
과거 회상 안 해요??? 아니 대본 지문에 쓰여 있단 말야. ‘과거를 추억하는 세 사람. 아르덴 숲속을, 파리 뒷골목을, 런던의 해변을 뛰놀며 재회한다.’
이미 죽은 사람인 랭보가, 살아 있는 베를렌느와 들라에의 삶에 (지극히 건강한 방향으로) 함께하고 있다고....
‘끝없는 모험, 유쾌한 일탈’ 이 부분 부르면서 ‘취한 배’에서처럼 들라에랑 손바닥 맞닿게 하고 부드럽게 떼는 게 얼마나 아름다웠는데....
Q. 그치만 커튼콜에는 있잖아요?
A. 아니 그거랑 다르지!!!!!!! 극중인물이든 관객이든 본공의 감정은 본공에서 매듭짓게 해달란 말야 커튼콜에서 굳이 나란히를 부르고 싶으면 그냥 본공에도 넣고 커튼콜에도 넣어줘 십분전에 불렀던 노래 또 불러도 똑같이 행복해할테니까
이상 초재삼연 랭보 다 본 사람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후기! 틀린 부분 있다면 지적 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