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을 마친 프로야구의 열기가 드라마 <스토브리그>로 인해 한겨울에도 이어졌다. 선수가 아닌 단장의 시점으로 보는 야구. 관전 포인트가 하나 늘었다.
“순 거짓말이에요.” 한 단장에게 <스토브리그>를 보느냐고 넌지시 물었다. 그는 이 질문에 물음표가 찍히자마자 고개를 흔들었다. “주변에서 하도 얘기가 많아서 들어봤는데…, 순 거짓말이에요. 우리 선수들이 얼마나 순한데.” 이렇게 말하는 그의 입에서는 애청자들이나 알 법한 디테일들이 쏟아진다. 알고 보니 그 역시 애청자다. 작품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구단 프런트는 물론이고 선수, 코칭스태프, KBO 직원까지 방영일을 기다린다. ‘현실과는 다르지만 재미있는 드라마라서’ 본다. 선수가 단장에게 반말하고 협박한다거나, 단장이 트레이드를 진행하면서 프레젠테이션으로 직원들을 설득하는 장면은 그들이 꼽는 비현실적인 장면이다.
야구팬의 입장은 다르다. <스토브리그> 속 장면과 실제 일화를 비교하기 바쁘다. 청소년 대회에서 팔꿈치를 다친 특급 유망주, 병역 회피, PED(경기력 향상 약물) 스캔들, 원정 도박에 승부 조작, 대학 야구 황무지 현상까지 등장인물의 배경이나 사건·사고는 대부분 실제 사례에 바탕을 뒀다. 임동규가 백승수 단장의 차를 박살 내는 장면은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장면 같지만, 실제로 비슷한 일이 있었다. 롯데 자이언츠 시절 정수근이 강병철 감독의 차에 돌을 집어 던져 유리창을 깨버린 거짓말 같은 일화가 드라마에서 살아났다.
<스토브리그>를 보는 팬들은 이런 현실 반영에 열광한다. ‘진짜 같은 야구 드라마라서’ 본다. 같은 드라마를 보면서 누군가는 거짓이라고 혀를 차고, 다른 누군가는 현실로 받아들인다. 그렇지만 드라마 속 설정이 어디까지 현실이고 허구인지, 또는 어떻게 과장했는지 선을 긋는 일은 무의미하다. 이 질문에 KBO 리그 현역 최고령 선수 박용택이 현명한 답을 내려준다. “예전에 나온 야구 드라마나 영화보다는 조사를 많이 한 게 보여요. ‘오버’하는 장면도 있는데 그건 드라마니까. 그런데 팬들은 ‘저것들 정말 저러나 봐’ 할지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재미있게 보고 있지만요.” 여기에 핵심이 있다. ‘정말 저러나 봐.’ <스토브리그> 인기의 첫 번째 이유다.
물론 그렇지 않은 일도 있다. 데이터와 감(感)의 충돌은 야구팬들이 생각하는 대표적인 구단 내 갈등 소재다. <스토브리그>에도 ‘뉴스쿨’ 데이터 야구와 ‘올드스쿨’ 감 야구의 대립이 클리셰처럼 등장한다. 그러다 보니 과거에나 볼 수 있던 갈등이 2020년의 현실처럼 보이기도 한다. 백승수의 동생이자 야구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다 전력분석팀 사원으로 입사한 백영수는 뉴스쿨의 상징이다. 그는 2차 드래프트를 앞두고 “너 야구 해봤어?”라는 한마디로 백영수를 깎아내리려는 코칭스태프와 마주한다. ‘그럼 그렇지.’ 팬들은 혀를 차며 현실에서 철 지난 야구관을 고집하는 응원팀의 감독과 코치를 떠올린다. 전력분석팀은 뭐 하나 싶다. ‘우리 단장은 이런 걸 알기나 할까요?’라며 게시판에 글도 써본다. 사실 다 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지금 KBO 리그에 뉴스쿨을 배제하는 구단은 없다. 본격적인 도입은 미국에 비해 늦었을지 몰라도 덕분에 성공 사례만 골라서 벤치마킹할 수 있었다는 장점을 누렸다. 불과 1, 2년 사이 스프링캠프 풍경부터 달라졌다. 이제는 레이더 장비 없는 구단을 볼 수 없을 정도다. 한국야구학회 신동윤 이사는 레이더로 타구와 투구를 쫓는 ‘트랙맨’ 데이터의 전문가다. 그는 “팬들의 인식과 달리 현장에서 더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인다. 특히 선수들은 자기 밥벌이가 걸린 문제라 더 관심이 많다”고 말한다.
때로는 드라마보다 현실이 더 진보적이다. <스토브리그> 속 백영수는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신입사원이지만, 실제 야구단에서는 팀장급 인사다. NC 다이노스의 데이터팀 임선남 팀장은 외국인 선수 선발을 담당하다 이제는 팀의 선수 선발 전반을 책임지는 관리자로 업무 영역을 넓혔다. 메이저리그로 돌아간 에릭 테임즈, NC에서만 5년을 뛴 에릭 해커가 그의 대표작이다. 임선남 팀장도 야구단 일을 시작하기 전 인터넷 유명인이었다. 백영수가 인터넷 커뮤니티 ‘야구세상’의 로빈슨으로 알려진 것처럼 본명 아닌 필명으로 유명했다는 점 또한 비슷하다. 야구 경기 내용을 통계적으로 분석하는 ‘세이버메트릭스’를 접한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그의 영향력 아래 있다. 그는 ‘FreeRedbird’라는 필명으로 2009년부터 2011년까지 세이버메트릭스를 소개하는 글을 연재했다. 야구 통계를 소개하는 책 한 권 없던 불모지 한국에서 그의 글은 바이블이나 마찬가지였다.
2020년의 프로야구 팬들은 드라마 <스토브리그>로 ‘단장의 시간’을 대리 체험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단장이 중요한 일을 한다는 어렴풋한 짐작만 했지 무슨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언론을 통해서만 엿볼 수 있었던 미지의 세계, 단장실 문을 기존 미디어가 아닌 드라마가 열었다. 이제 야구팬들은 단장들이 내놓은 결과물을 덮어놓고 욕하지 않는다. 과정까지 ‘알고 깔 수’ 있게 됐다. 국가대표급 프랜차이즈 스타를 거침없이 트레이드하고, 머니 파워가 아닌 협상과 결단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유능한 단장 백승수의 존재가 더해지면서 폭발적인 반응을 끌어냈다. 꿈에 그리던 단장의 등장, 드라마가 실제 스토브리그보다 더 뜨거운 반응을 얻는 두 번째 이유다.
감독과 단장의 권력 분립, 나아가 ‘단장의 시간’ 선언은 <스토브리그>가 야구팬들을 어떻게 사로잡았는지를 설명하는 데 꼭 필요한 기초지식이다. 과거 한국 프로야구와 그 곁의 미디어는 감독의 입에 너무 많이 의존했다. 경기 전 브리핑에서 나온 말은 농담조차 비중 있게 다뤄졌다. 때로는 감독이 고민하지 않아도 될 문제까지 얘기하곤 했다. 이제 1군 선수단 관리와 경기 운영은 감독에게, 큰 틀의 구단 방침은 단장에게 묻는다. 일종의 권력 분립이다. LG 트윈스 차명석 단장은 2018년 취임한 뒤 언론에 자주 얼굴을 비쳤다.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중계방송에 잠깐 나가서 구단 상황을 직접 밝혀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고 한다. 그의 ‘튀는 행동’을 못마땅해 하는 이들에게 차명석 단장은 “지금은 단장의 시간”이라는 말로 정중하게 반박했다. 12월과 1월은 감독과 선수들이 임금을 받지 않는 비활동 기간이다. 감독이 아니라 단장이 바쁘게 움직이면서 다음 시즌의 성공을 준비하는 시간이 곧 ‘단장의 시간’이다. 동시에 선수도 감독도 아닌 새로운 주체의 등장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선언이기도 했다. 단장으로서 스토브리그의 새로운 주인공을 자처한 셈이다.
한국에서 야구단 단장이 언론의 주요 취재원이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이른바 ‘선수 출신 단장’의 시대가 열리면서 변화가 시작됐다. 사장은 물론이고 단장까지 모기업에서 내려오던 시절에는 단장의 입에 주목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도 강팀을 만들겠다는 선언은 할 수 있었다. 백승수 단장의 ‘재송 드림즈 2020년 시즌 우승안’ 같은 구체적인 실행안을 그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단장이 전문 기업 경영인에 가까웠던 때, 이들의 이름이 언론에 오르내린다는 것은 구단에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현장과의 마찰 같은 부정적인 이슈가 아니라면 야구단 단장이 전면에 드러나는 일은 드물었다.
반대로 현장을 철저히 독립된 존재로 받아들이고 존중했을 때 비로소 언론과 팬들로부터 신뢰를 받았다. 이 시절에도 선수 출신 단장은 존재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대세를 이루지는 않았다. 2020년에는 10개 팀 가운데 7개 팀이 선수 출신 단장을 두고 있다. 나머지 3개 구단도 야구단에서 경력을 쌓은 이들에게 운영을 맡기고 있다. 이제 야구팬들은 단장의 선택에 따라 팀의 성적, 그리고 미래가 달라진다는 것을 안다. 영화 <머니볼>과 메이저리그 뉴스로 단장의 중요성이 강조되기 시작하고 KIA 조계현, KT 이숭용, 한화 정민철처럼 선수일 때부터 익숙했던 이들이 책임 있는 자리에 오르자 팬들의 시야도 넓어졌다. 물론 아직은 과도기다. 메이저리그 단장에 비하면 KBO 리그 단장의 권한은 턱없이 작다. 그동안 팬들은 이 차이를 알 기회가 없었다. 막연히 궁금해했다. 때로는 이 궁금증을 풀지 못한 채 단장의 권한을 지나치게 크게 해석했다. 한국 야구팬은 TV 앞에 앉아서 궁금증을 풀 수 있게 됐다. <스토브리그> 덕분이다. 글 / 신원철(<스포티비 뉴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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