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아파와 수니파
일단 이슬람에 수니파랑 시아파가 있다는 것 정도는 들어서 알 거야. 그런데 그게 어떻게 다른지는 대부분 잘 모르지.... 시아파와 수니파는 교리가 완전히 다른 종교는 아니고 이슬람 내부의 두 전통을 말해. 이 전통이 왜 갈라졌냐면 정통 지도자의 권위를 누가 가지게 되느냐에 대한 논쟁이 핵심이었음.
632년, 무함마드가 죽고 이슬람 공동체에는 문제가 생겼어. 이슬람 공동체는 정치+종교+군사가 다 결합된 구조였거든? 그런데 무함마드가 자기 후계자를 지정하지 않고 죽어버린 거야.(정확히는 해석이 갈린다에 가깝긴 해) 이슬람 공동체는 급속히 확장 중이었고, 여러 부족들이 막 통합된 상태였지.
무함마드의 장례준비가 진행되는 동안, 일부 무슬림 지도자들은 급하게 회의를 열어. 정치적으로 공동체가 불안정한 상태였으니까. 그리고 그 회의에서 아부 바크르가 그 후계자, 그러니까 제 1대 칼리프로 지명되지. 1대 칼리프인 아부 바크르는 공동체에서 탈퇴하려는 부족들과 세금을 거부하는 등 일어난 내부 분열을 전쟁을 통해서 강력하게 진압해. 결과적으로 중앙 통제가 강화된 아라비아 반도를 재통합한 나라가 탄생하지. 2년 정도 있다가 병으로 죽긴 하는데...
4대 칼리프가 되는 알리는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였어. 그 역시 초기 이슬람의 핵심 인물이었고 전투와 신앙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해. 그런데 저 첫번째 칼리프의 선출 과정에서 알리는 참여하지 않았다고 해.
여튼 이 첫번째 칼리프 선출은 종교적 합의나 토론을 거친 것이 아니라 정치 상황상 만들어진 선출이었던 거야. 그리고 알리는 참석하지 않았어. 이 정치를 위해서 빨리 결정내린 판단이 나중에 신학적 분열을 일으키게 됨.
수니파는 1대 칼리프인 아부 바크르부터 4대 칼리프인 알리까지 초기지도자들 모두 존경받는 인물이고 합의에 의해 뽑혔으므로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야.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 기존 질서에 대해 인정하는 경향이 강하지.
그런데 시아파는 정당한 후계자는 무함마드의 혈통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정당한 후계자의 권리를 가진 건 알리 뿐이었다고 인식해. 그래서 첫 칼리프 인 아부 바크르부터 정통적 권위가 박탈된 것이다 빼앗긴 것이다라고 보는거야.
그래서 수니파는 알리를 4대 칼리프라고 인식하고, 시아파는 초대 이맘이자 유일한 정통 칼리파로 간주해.
이렇게 수니파와 시아파가 갈리게 되었는데, 현재의 시아파의 특징적인 권위 구조, 순교 강조가 강해지는 사건이 벌어지게 되는 사건이 벌어져.
바로 카라발라 순교야.
2. 카라발라 순교
4대 칼리프인 알리가 죽고 난 후, 무아위야가 권력을 잡고 우마이야 왕조를 세우게 되었어. 여기서 왕조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그 전에 칼리프는 합의 선출 개념이었거든. 그런데 무아위야는 그 합의 선출 전통을 깨부수고 자기 아들에게 권력을 세습하려고 했던 거지. 이건 엄청난 충격을 가지고 오게 되었어.
후세인(알의 아들이자 무함마드의 외손자)은 무아위야의 아들인 야지드에게 충성맹세를 거부했어. 이유는 부당한 통치가 정당성을 가지도록 인정할 수 없다는 거였어. 그리고 후세인은 현재 이라크 남부에 있는 쿠파라는 도시로 이동하게 되었지. 거기 사람들이 편지를 보냈거든. 와서 우리를 이끌어 달라고. 그러나 쿠파는 우마이야 총독의 압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봉기를 실패하게 되었어. 그리고 후세인은 카라발라 평원에 고립되버려.
후세인은 그를 따르는 백명도 안 되는 가족과 지지자만 이끌고 우마이야 군대 수천명과 대치하게 되었고, 며칠간 물 공급을 중단당하고 이슬람력 10월 10일 아슈라에 전투가 발생해서 후세인과 동료들은 전원 전사하고 그의 가족은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지.
결국 패배한 전투긴 했어. 하지만 이 사건은 시아파에게 단순 패배가 아니라 소수의 정의가 다수의 폭정에 맞선 사건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거지.
이 전투가 의미하는 핵심 메시지는 정의는 수로 판단하는 게 아니고, 진실은 힘보다 우선하며, 죽음은 패배가 아니다라는 메시지였어. 즉, 순교 신학의 중심이 돼. 시아 정치 운동의 정당성을 의미하고 저항 담론의 근원이기도 해.
3. 그래서 이게 이란이 왜 미친?놈인 거랑 무슨 상관임?
카라발라 순교부터 시작해서, 시아파는 순교 신학이 강해지는데 이건 저 하나의 사건만이 아니라 구조적 역사 경험이랑 연결이 있어.
출발점이 패배의 기억이었지. 중요한 건 이거야. 시아파는 언제나 수니파보다 소수였어.(대충 보통 수니파:시아파 비율은 9:1 정도 수준...) 다수 권력을 잡은 적이 거의 없는 거야. 그리고 후세인이 죽었듯이; 정통 지도자가 반복적으로 제거되어 왔어. 승리보다는 상실의 서사였던거지.
그 와중에 후세인이 죽고 나서 시아파에 대한 대접이 어땠을까? 당연히 박해를 받았지.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생각하게 되는거야.
'하나님은 왜 정의로운 이들을 고난 속에 두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순교 신학으로 발전하게 돼.
그런 흐름에서 수니파의 지도자와는 다르게, 시아파의 지도자는 단순한 정치 지도자가 아니라 영적, 신화적 권위를 가진 존재가 되는 거지. 그런데 그런 존재가 억울하게 죽었다? 그러면 그건 패배가 아니라 어떤 신의 계획 속에 있는 의미 있는 희생인거야.
그런 의미 있는 희생이 순교고, 즉, 죽음은 패배가 아니다, 힘은 폭군, 힘을 가진 자들에게 있지만, 도덕적인 종교적인 승리는 순교자에게 있다는 신앙이 강해지는 거지. 호메이니가 그냥 늙어죽고 싶어하지 않았다 순교하고 싶어했던 것이다라는 글을 주방에서도 본 적 있지? 그 순교의 맥락이 이런 흐름인 거야.
애초에 이란에서 팔레비 왕조를 몰아내고 신정국가를 만든 이란 혁명은 이 카라발라 서사를 차용해서 정치화했어.
호메이니는 팔레비 왕조의 샤를 야지드, 그러니까 무아위야의 아들에 비유했고, 자신들이 이뤄낸 혁명()을 현대의 카라발라로 해석한거야.
그러니 그들의 세계관에서 자신들을 박해(;)하는 외부의 적들은 무함마드의 정당한 후계자를 힘으로 박해하는 악당들인거고 자신들은 종교적 순교자가 되는 거. 자기들이 옳은거야 ㅇ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