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바일 AP의 황태자, ARM
우선 ARM은 영국 런던의 북쪽에 있는 케임브리지에 본사가 있는 영국 회사입니다. 연 매출은 2조 원 가량으로 많지 않지만(참고로 삼성전자 연 매출이 300조 원 가량) 반도체 시장에 미치는 영향력은 압도적입니다.
ARM은 저전력 반도체 중앙처리장치(CPU)를 설계하는 회사입니다. 자신들이 설계한 설계도를 지적 재산권(IP)으로 삼아 삼성전자, 애플, 퀄컴 등 다른 반도체 회사에 판매합니다. ARM의 고객사들은 ARM의 설계도를 기반으로 각자의 수요에 맞는 반도체를 만들어 냅니다.
모바일 기기는 발열이 적은 저전력 CPU가 필수적입니다. 스마트폰의 두뇌 역할을 하는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대부분이 ARM을 기반으로 하는 이유입니다. ARM은 모바일 시장 점유율이 무려 96%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ARM이 이렇게 점유율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ARM의 다른 반도체 업체들과 ‘경쟁’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ARM은 반도체를 만들 수 있는 설계도만 사용료를 받고 판매할 뿐, 자신들이 직접 반도체를 만들지는 않습니다. 일종의 중립 지역인 셈인데, “ ARM은 반도체 시장의 스위스 같은 곳”이라는 평이 나오는 배경입니다.
■ ARM 매각 발표에 칼 빼든 FTC
이런 ARM에 대해, 지난 2020년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앞서 소프트뱅크는 2016년 ARM을 인수)은 전격 매각을 발표합니다. 인수 업체는 그래픽 반도체 시장의 1인자인 엔비디아였습니다.
엔비디아는 그래픽 반도체(GPU) 시장의 1인자이지만, 자율주행 자동차, 인공지능 등 다른 반도체 시장 진출도 공식 선언한 상태였습니다. 애플, 퀄컴 등 기존 ARM 고객사의 잠재적 경쟁자였던 셈입니다.
특히 엔비디아가 ARM을 인수하면 지금까지 ‘중립적’이었던 ARM의 경영 기조가 바뀔 가능성이 생깁니다. 예컨대 ARM의 설계도 가격을 갑자기 올린다든지, 특정 영역에서는 아예 판매를 중단할 수도 있습니다. 궁극적으론 엔비디아 이익은 높아지고, 경쟁사의 이익은 줄어드는 방향으로 상황이 변할 수 있는 겁니다.
엔비디아의 ARM 인수 발표 직후 영국, 중국 등의 경쟁 당국에서 부정적 입장이 나오고 주요 반도체 업체들도 반대 입장을 밝혔습니다.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 행보에 나선 건 미국 연방거래위원회(FTC)였습니다. FTC는 우리나라의 공정거래위원회 격인 미 연방정부 기관입니다.
■ “독과점 막아라”..‘리나 칸’의 공격
지난해 6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깜짝 발표를 합니다. 당시 컬럼비아대 교수로 있던 리나 칸을 FTC 위원장으로 임명한 겁니다. 리나 칸은 1989년생으로 지난해 임명 당시 우리 나이 만 32살로 역대 최연소 위원장입니다.
리나 칸은 예일대 로스쿨 재학 중 ‘아마존의 반독점 역설’을 주제로 논문을 써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바 있습니다. 리나 칸은 논문에서 ‘기존 반독점규제법으로는 아마존 같은 빅테크의 독과점을 막을 수 없다’고 강조했는데, 이후 ‘아마존 킬러’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이처럼 빅테크의 독과점 폐해를 지적해 온 리나 칸이 FTC 위원장으로 임명된 건, 최근 미 의회가 빅테크의 독과점 문제에 구체적인 행동을 취하기 시작했다는 점과도 맞물려 있습니다. 미 하원 반독점소위원회는 2019년 반독점 조사 보고서를 통해 애플, 페이스북 등 빅테크에 대한 규제가 시급하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이어 지난해 미 하원에서는 빅테크를 대상으로 하는 5개 반독점 패키지 법안이 발의되기도 했습니다.
리나 칸이 취임 후 ARM 매각 건을 들여다보리라는 것은 예상됐던 일이었습니다. 다만 엔비디아는 FTC의 승인에 비교적 낙관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그동안 엔비디아-ARM 사례 같은 수직 결합에 대해서는 대부분 정부에서 승인 결과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같은 사업 부문을 인수하는 수평결합과 달리, 엔비디아(그래픽 반도체)-ARM(반도체 설계)은 다른 사업 부문을 인수하는 수직결합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EU와 영국, 일본, 한국 등의 경쟁당국과 긴밀히 논의를 이어간 FTC는 지난해 12월 전격적으로 인수 반대 소송을 제기합니다. “엔비디아의 ARM 인수가 혁신과 경쟁을 저해할 수 있다”는 이유였습니다. 리나 칸 취임 6개월 만입니다.
FTC 측은 “엔비디아가 ARM을 인수하면 반도체 설계에 있어 독점권을 갖게 돼 시장을 왜곡할 것”이라며 “이렇게 되면 차세대 기술을 위한 혁신이 사라질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빅테크의 독과점’을 경계하는 리나 칸의 공격이었습니다.
엔비디아는 “우리의 인수는 시장에 경쟁을 불러올 것”이라며 반발했지만, FTC의 강경한 태도에 점점 입장 표명이 줄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달 초 엔비디아와 소프트뱅크는 ‘ARM 매각 결렬’을 발표했습니다. FTC의 소송 제기 2개월여 만이었습니다.
매각 결렬 직후 FTC는 “근래 들어 수직 합병 시도가 철회된 첫 번째 사례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소식”이라고 밝혔습니다.
FTC의 칼날은 다른 빅테크 기업들에게도 향하고 있습니다. 현재 리나 칸은 페이스북을 상대로도 반독점법 위반 혐의 소송을 진행 중입니다. 왓츠앱과 인스타그램 인수로 업계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갖게 됐다는 겁니다. 리나 칸의 FTC가 전세계적으로 독과점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디지털 빅테크 기업들에 대한 규제에서 지속적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 주목됩니다.
https://news.v.daum.net/v/202202261000142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