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라도 알 수 있는 작품 같은 건 있을수 없습니다.
그런 생각은 말과 영상, 조금 더 나아가 커뮤니케이션을 지나치게 믿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알기 어려운 것을 5분 안에 설명해주는 게 TV 방송이라고 생각하는 분도 많겠지만,
사실 한편으로는 간단해 보이는 현상의 배후에 숨은 복장성을 그리는 것이야말로 방송이라고 여기는 가치관도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세계는 복잡한 것이니까요.
그 복잡성을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알기 쉬운' 것만 찾는 고객들에게 영합한 결과, (전부 그렇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만)
영화나 방송이 유치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현실에서 도피했습니다.
방송을 비롯한 미디어는 유목민이어야 한다.
그들의 가장 큰 역할은, 주민들이 사는 세상이 성숙할 수 있도록 외부에서 비평하는 것이다.
그것이 저널리즘이 서야 할 위치가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특히 일본 같은 섬나라에서 사는 정착민 집단은, 이질적인 사람들과의 접촉을 통해 스스로를 성숙시켜나갈 기회를 갖기 어렵다.
일찍이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조건은 바닷사람을 매개를 외부에 '열려 있다'고 여겨졌으나,
어느샌가 바다로 인해 가로막혔다고 인식되며 '섬나라 근성'이 오랜 시간에 걸쳐 만연했다.
확실히 말해서 이는 병이다.
거기서 '일본은 단일민족'이라느니 '만세일계'라느니 '중국인은 범죄 유전자를 가졌다' 같은
안과 밖에 얽힌 환상과 망언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설상가상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체가 성숙하지 않았기에 집단을 덮고있는(외부에 있어서는 폭력으로밖에 부를 수 없는)
단일한 가치관(섬나라 근성)에 무비판적으로 몸을 맡기는 경향이 강하다.
그럼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얻는 듯한 착각에 빠진 것이 지금의 일본 사회(세간)의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시야가 좁고 상상력이 부족한 인간일수록 내부에서밖에 통용되지 않는 '아름다운 나라' 같은 단어를 중얼거리는 법이다.
지금의 일본과 거기에 사는 사람들(일본인만으로 한정되는게 아니라)에게 가장 불행한 것은,
이 정신적 외부에 있어야 할 미디어가 완전히 내부의 세상과 일체화되고
그 가치관에 영합해 오히려 마을의 외벽을 보강해버렸다는 사실이다.
국가적 가치관과 개인의 가치관, 그 이쪽과 저쪽에 대해 비평적인 입장으로 접근해 타자와의 접촉의 장을 여는 것으로
양자의 성숙(상대화)을 촉진함이 미디어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지만,
현재는 미디어가 외부에 있지 않고 국가와 개인과 동심원상에 겹쳐있다. 이는 섬나라 근성의 삼중고다.
미디어는 정부의 홍보 도구이며(TV를 오래 보는 사람일수록 자민당 지지율이 높다는 결과가 나왔다),
원래라면 제4의 권력으로서 경찰 권력의 행사를 점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솔선해서 범인 색출에 협력하고 사법에 앞서 사회적(세간적) 제재를 가한다.
이렇게 되면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 '세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거기에서는 내부 사람끼리 작은 차이를 찾아내 자기들끼리 서로 배재하는 '왕따'가 난무한다.
학교가 바로 지금 그런 세상의 축소판이 되어 질식할 것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
넓은 세계는 높은 벽에 차단돼 볼 수 없고, 서로 감시하는 세간에만 둘러싸인 답답함에서
인간이 도망칠 수 있는 수단이라고는 현재 자살밖에 없는 상황으로 흘러가는게 아닐까?
설사 아무리 극악한 인간이라도 누군가가 살해당한 것을 기뻐하는 행위는 적어도 남 앞에서는 삼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쟁은 정치를 포기하는 게 아니라 정치의 한 부분이라는 목소리도 들려오지만,
사람을 죽여서 찾아오는 평화가 있다면 신문도 방송도 존재 의의를 잃는다.
저널리즘은 무력행사 이외의 방법을 끝까지 믿고, 모색하고, 그것에 몸을 바치는 가치관이다.
그것은 일찍이 '옳음'을 부추겨, 권력과 하나되어 사람들을 전쟁을 내몬 것에 대한 반성으로서
언론이 떠안은 역할이자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이 밑에부터 내용은 에세이의 마지막 장을 그대로 발췌)
재해지의 부흥은 고사하고 복구도 아직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다고 말하는
사기꾼 같은 방식으로 원전을 재가동하려는 무리가 이미 등장했다.
원전 내구성 진단은 간이 검사로 때운다? 그런 발언은 그 지진(3.11 동일본 대지진)을 경험하기 이전의 인간만 가능할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더이상 '인간'이 아니다.
그런가 하면, 지진으로 인해 교통이 마비되어 집에 돌아가지 못해 곤란해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역 구내에서 몰아낸 철도 회사에 욕을 퍼붓던 도지사는,
그에 대한 대책이나 자신의 책임을 말하기보다 도쿄 올림픽으로 힘을 보여주자고 말한다.
그의 아들은, 이런 환경에서 아이를 키우는 것이 불안하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의 상황을 집단 히스테리라고 부른다.
"빨리 잊자." 그들은 모두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우리가 4개월 전에 경험한 것(3.11 동일본 대지진)은, 일본 어느 곳에 사는지에 관계없이,
지금까지 우리가 중요한 것을 외면하고 잊은 척하며 내달려온 문명을 근본부터 되묻는 사건이었다.
그 풍경을 앞에 두고, '미래'나 '안전'보다도 '경제'를 우선시하는 가치관이 경멸스럽다.
사태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댐과 도로가 그 지역 사람들의 생활을 풍요롭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아무리 그것이 쓸데없다 하더라도
그 자체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돈이 움직인다는 식의 구도가, 원전을 둘러싸고도 반복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일반인들의 눈을 흐리는 큰 원인 중 하나는,
신문과 방송이라는 미디어가 벌써 망각 쪽으로 방향키를 돌렸다는 사실이다.
그들 대부분도 역시 기득권층의 이익 안에서 눈이 흐려져버린 것이다.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는, 실패까지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결국 문화로 성숙된다.
그 시간을 기다리지 않고 망각을 강요하는 것은 인간에게 동물이 되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은 정치와 언론이 행할 수 있는 가장 강하고, 가장 치졸한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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