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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능한 관료와 재벌은 축복"…한국식 시스템 극찬한 3인의 학자 이야기

무명의 더쿠 | 01:00 | 조회 수 2376
1980년대와 90년대, 이른바 '동아시아의 기적'을 두고 서구 주류 경제학계(특히 세계은행과 IMF를 중심으로 한 신고전파 경제학)는 이를 '자유 무역과 시장 원리에 충실한 수출 주도 정책의 승리'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이 해석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 한국과 대만의 경제 성장이 강력한 국가 주도 산업 정책(Industrial Policy)과 정부의 시장 개입 덕분이라고 주장한 학자들이 있었다. 
 
그 중심에 앨리스 앰즈던(Alice Amsden)을 비롯해, 로버트 웨이드(Robert Wade), 그리고 주류 경제학계 내부의 반역자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가 있다. 이들은 스티븐 브라이언, 피에트로 마시나 등 펨코에 여러번 소개한 적 있는 학자들 이론의 선구자 쯤 된다. 이들에 대해 알아보자.
 

image.png "유능한 관료와 재벌은 축복"…한국식 시스템 극찬한 3인의 학자 이야기

 
◇앨리스 앰즈던 (Alice H. Amsden, 1943~2012)
 
주류 신고전파 경제학의 교조주의를 평생 비판하며 개발도상국의 공장 현장과 관료 조직을 직접 누볐던 앰즈던은, 단순한 이론가를 넘어 치열한 삶을 살았던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앰즈던의 본명은 앨리스 호펜버그(Alice Hoffenberg)로, 1943년 6월 27일 미국 뉴욕 브루클린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가정은 학구적이면서도 실용성을 중시했다. 대학을 졸업한 어머니가 학교 비서로 일하며 사실상 집안의 가장 역할을 책임졌다. 
 
어머니는 두 딸에게 "여자도 스스로 자신을 부양할 수 있어야 한다"며 학업의 중요성을 강하게 주입했다. 앰즈던의 두 살 터울 친언니는 스탠퍼드대의 저명한 여성주의 경제학자이자 초대 여성연구소장인 마이라 스트로버(Myra Strober)다. 부모는 학비가 무료였던 브루클린 칼리지에 진학하기를 바랐으나, 자매는 모두 이를 거부하고 코넬대에 진학해 훗날 미국 학계를 이끄는 거두로 나란히 성장했다.
 
앰즈던은 1965년 코넬대를 졸업하고, 1971년 영국 런던정치경제대(LSE)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앰즈던이란 성은 첫 번째 남편이었던 존 앰즈던과 결혼하면서 얻은 것이다.
 
앰즈던은 학위 취득 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경제학자를 시작으로 UCLA, 바너드 칼리지(컬럼비아대),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뉴스쿨(The New School) 등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1994년 매사추세츠 공과대(MIT) 도시연구 및 기획학과 교수로 임용되었고, 1999년부터는 정치경제학 석좌교수(Barton L. Weller Professor)로 재직하며 학문적 황금기를 보냈다. 그녀는 책상머리에서 수식만 만지작거리는 샌님 경제학을 혐오했으며, 늘 개발도상국의 현장을 발로 뛰며 실증 데이터를 수집하는 억척스러운 연구자였다.
 
일본의 부상 이후 동아시아의 호랑이들을 예의주시하던 그는 한국의 기적 같은 경제 성장을 보고 의아해 했다. 서구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는 "자유시장 원리를 제대로 따라서 경제 발전에 성공했다"는 말이 아무리 분석해봐도 맞지 않다는 것이다. 세계은행 재직 시절 한국을 방문한 그는 대기업 현장과 연구소 등을 샅샅이 살펴봤고, 관련자들을 귀찮게 하다시피하며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 결과 하나의 커다란 현상을 발견했다. 바로 정부가 주도하고, 재벌을 밀어붙여서 이뜰어낸 '국가 주도 개발'이야말로 한국의 성공을 이끈 근본 요인이라는 것이다.
 
 
image.png "유능한 관료와 재벌은 축복"…한국식 시스템 극찬한 3인의 학자 이야기

 
 
그는 자신의 이론과 현장 취재를 집대성한 저작 '아시아의 다음 거인(Asia's Next Giant, 1989)'이란 책에서 이론적 근거를 설명했다. 이 책은 1992년 미국정치학회 '최우수 정치경제학 도서상'을 수상하며 한국 경제 성장을 다룬 가장 위대한 학술서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후발 공업화: 영국이나 미국처럼 '혁신을 통해 성장한 선발국과 달리, 한국 같은 후발국은 이미 존재하는 기술을 빌려오는 '학습'을 통해 공업화해야 한다고 분석했다.
 
-가격을 왜곡하라(Getting Prices Wrong): 이 책의 가장 유명한 테제이다. 세계은행은 "가격을 시장에 맡겨라(Getting prices right)"라고 했지만, 앰즈던은 한국 정부가 의도적으로 환율, 금리 등을 조작하고(예: 특정 산업에 시중 금리보다 엄청나게 싼 이자로 정책 금융을 제공), 관세를 통해 시장 가격을 왜곡함으로써 민간 기업이 감당하기 힘든 리스크를 덜어주고 유치산업을 보호·육성했다고 분석했다. 
 
-국가의 규율과 통치 역량: 한국이 성공한 핵심 이유는 정부가 시중 은행을 국유화하거나 철저히 통제하여 '금융의 목줄'을 쥐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재벌에게 싼 이자의 차관을 주는 대신, '수출 목표 달성'이라는 엄격한 성과 기준을 요구했고, 달성하지 못하면 지원을 끊거나 부실기업을 퇴출시키는 강력한 규율과 자원 배분 통치 역량을 발휘했다.
 
-재벌의 명암: 앰즈던은 중화학 공업과 같이 막대한 자본과 리스크가 필요한 산업에서 재벌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는 훌륭한 국가 주도 개발의 실행자였음을 긍정했다. 그러나 이 체제가 필연적으로 독과점을 형성하고, 정경유착을 통한 지대 추구를 유발하며, 노동권을 가혹하게 탄압한다는 짙은 그림자를 동반했음을 냉철하게 지적했다.
 
앰즈던은 2012년 3월 14일,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의 자택에서 68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MIT의 공식 부고와 언론에는 자택에서의 돌연사로 기록됐다. 그는 생전 MIT에 한국학 연구소를 설립하기 위해 뛰어다녔다. 연구소 이름으로 'KIM'이라는 가칭까지 지어놨는데, 'Korea Institue of Mit'의 약자다. 다만 후원을 약속했던 대우그룹이 해체됐고, 그도 갑작스럽게 눈을 감으면서 아직까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한국의 재벌 문제에 대해 일관된 자세를 나타냈다. 
 
"재벌의 문제는 정치적 영역(정경유착)에서 발생하지, 경제적으로는 엄청난 고용과 부단한 연구개발 등 긍정적 요인이 훨씬 많다"는 것이다. 또한 한국 학계의 '미국 편향'을 줄곧 지적했는데, 미국 박사 출신이 주요 대학 교수진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건 다양성 측면에서 문제가 많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장 만능론'에 휩싸인 미국 주류 학계의 이론을 무방비로 받아들인다는 지적이다.
 
 

image.png "유능한 관료와 재벌은 축복"…한국식 시스템 극찬한 3인의 학자 이야기

 
 
◇로버트 웨이드 (Robert H. Wade, 1944~)
 
호주에서 태어나 뉴질랜드에서 자란 웨이드는 오타고대와 빅토리아대를 졸업하고, 영국 서식스대(University of Sussex)에서 인류학/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세계은행 이코노미스트로 일한 이력이 있으며, 프린스턴, MIT 등을 거쳐 현재 영국 런던 정경대 정치경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는 제도를 권력과 관료제라는 정치사회적 맥락 속에서 파악하는 학자다.
 
그의 핵심 저작으로는 '시장을 통치하다 (Governing the Market, 1990)'가 꼽힌다. 이 책은 동아시아 발전국가론을 완성한 명저로 여겨진다. 주로 대만을 다루지만 한국의 정책이 핵심 비교 사례로 등장한다.
 
-통제된 시장 이론 (Governed Market Theory): 동아시아 국가는 자유 시장도, 계획경제도 아닌 '통제된 시장'이었다. 국가가 사유재산제를 유지하되, 국가가 설정한 전략적 목표에 자본과 투자가 흘러가도록 유도(guide)하고 통제(govern)했다.
 
웨이드는 동아시아 주도 성장의 동력으로 경제기획원(EPB) 같은 '핵심 경제 부처(Pilot Agency)'를 강조하며 세 가지 특징을 제시했다.
 
-능력주의: 국가고시를 통과한 최고 수준의 엘리트 인재들로 정책의 전문성을 담보.
-상대적 자율성: 관료 집단이 이익 집단의 로비나 단기적 정치 외풍으로부터 독립되어 장기적 국가 이익을 밀어붙일 권력 확보.
-지휘 통제소 역할: 예산권과 기획권을 거머쥔 초정치적 경제 부처가 산업 정책의 완벽한 '컨트롤 타워' 역할을 수행.
 
웨이드의 가장 흥미로운 이력은 신자유주의의 본산인 세계은행 내부에서 벌인 이데올로기 투쟁이다. 1993년 세계은행이 아시아 성장을 다룬 '동아시아의 기적' 보고서 출간 당시 내부 이코노미스트였던 웨이드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1996년 발표한 논문을 통해 세계은행이 '패러다임 유지'라는 지적 조작을 자행했다고 폭로했다. 
 
주류 학자들이 자신들의 '워싱턴 컨센서스' 도그마를 지키기 위해, 한국과 대만의 강력한 국가 개입 증거들을 의도적으로 축소하고 시장친화적인 데이터만 취사선택했다는 것이다. 그는 동아시아의 진짜 성공 비결은 시장 논리가 아닌 유능한 정부의 강력한 통제에 있음을 역설하며, 거대 국제기구의 교조주의에 맞섰다.
 
 
image.png "유능한 관료와 재벌은 축복"…한국식 시스템 극찬한 3인의 학자 이야기

 
 
◇조지프 스티글리츠 (Joseph E. Stiglitz, 1943~)
 
앰즈던과 웨이드가 '비주류 정치경제학' 진영에서 한국의 성공을 분석했다면,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주류 경제학의 심장부(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전 세계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에서 그들의 주장에 완벽한 이론적 정당성을 부여한 핵심 인물이다.
 
스티글리츠는 '정보의 비대칭성'을 연구하는 정보경제학의 대가이다. 그는 개도국의 경우 시장 제도가 불완전하고 정보가 비대칭적이기 때문에 '시장 실패'가 일상적으로 발생한다고 밨다. 그는 1996년 논문 '동아시아 기적의 교훈(Some Lessons from the East Asian Miracle)' 등을 통해, 한국과 대만 정부의 시장 개입을 맹목적인 왜곡이 아니라 '시장 실패를 치유하기 위한 고도로 정교한 교정 장치'라고 극찬했다.
 
주류 경제학은 정부가 은행에 지시하여 특정 산업에 돈을 몰아주는 관치 금융을 죄악시한다. 그러나 스티글리츠는 개도국 금융 시장은 원래 정보 부족으로 돈이 돌지 않으므로, 한국 정부가 '수출 실적'이라는 객관적 지표를 바탕으로 유망 기업에 자금을 강제로 배분한 것은 매우 훌륭한 정보 비대칭 해결책이자 성장의 원동력이었다고 옹호했다. 이는 앰즈던의 '의도적으로 가격 왜곡하기'와 궤를 같이한다.
 
스티글리츠가 한국 등 동아시아 국가들에 대해 가진 확고한 믿음은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IMF 사태) 때 가장 극적으로 드러났다. 당시 세계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였던 그는 자매 기관인 IMF가 한국에 강요한 '고금리 및 초긴축 정책(살인적인 구조조정)'을 맹렬히 비판했다.
 
"화재가 난 건물에 물 대신 기름을 부었다"는 것이다. 
 
스티글리츠는 한국의 위기가 국가 펀더멘털의 붕괴가 아니라 단기적인 유동성 위기(흑자 부도 상태)였음에도, IMF가 서구식 워싱턴 컨센서스 잣대를 들이대어 멀쩡한 기업들까지 연쇄 도산하게 만들었다고 맹비난했다. 그는 한국의 과거 '국가 주도 시스템'이 틀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시스템 덕분에 세계적인 산업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며, 위기의 원인을 동아시아 시스템 자체의 결함으로 몰아가던 서구 주류 언론과 IMF에 맞섰다.
 
스티글리츠의 이러한 굽힘 없는 소신 발언과 공개적인 IMF 비판은 워싱턴 주류 기득권층의 엄청난 분노를 샀다. 특히 당시 구조조정을 강하게 밀어붙이던 미국 재무부(래리 서머스 장관)와 IMF는 그를 눈엣가시로 여겼다. 결국 "입을 다물든지, 아니면 세계은행을 떠나라"는 거센 정치적 외압을 받은 그는, 학자적 양심과 비판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1999년 말 사실상 쫓겨나듯 수석 이코노미스트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는 거대 자본과 주류 이데올로기에 맞선 그의 굳은 신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경제학과 현실 정책에 미친 영향
 
앰즈던과 웨이드의 실증적 연구에 스티글리츠의 미시경제학적(정보경제학) 뒷받침이 더해지면서, 1990년대 "무조건 민영화하고 규제를 풀라"는 워싱턴 컨센서스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제도를 중시하는 진화경제학과 제도주의 경제학이 융성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대니 로드릭, 장하준 같은 후속 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들의 업적은 선진국들이 이미 사다리를 걷어차고 자유무역을 강요할 때, 개도국 정부가 독자적인 산업 정책으로 자국 경제를 어떻게 육성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책적 이정표가 됐다. 더욱 놀라운 것은 산업정책(Industrial Policy)의 화려한 부활이다. 오늘날 미중 패권 경쟁 시대에 미국이 반도체법(CHIPS Act)이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통해 천문학적인 보조금으로 자국 산업을 통제·설계하는 모습은, 과거 이들 세 학자가 분석했던 '한국식 발전국가' 모델이 21세기 선진국 정부의 형태로 부활했음을 보여준다. 이단아로 불렸던 이들의 분석이 결국 시대의 진리로 증명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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