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와이는 원래 독립된 하와이 왕국이었다. 1810년 카메하메하 1세가 여러 섬을 통일했고, 19세기에는 미국과 무역, 선교, 이민을 통해 점점 밀접해졌다.

그러던 중 이민 온 미국 및 유럽계 설탕 플랜테이션 경영자들이 하와이 경제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고, 1875년 미국과의 상호무역조약으로 경제적 의존이 더욱 심해졌다.
문제는 이 미국계 엘리트들이 경제뿐 아니라 정치권력까지 장악하려 했다는 것이다.

칼라카우아 왕(Kalākaua) 시기에 미국 및 유럽계 세력이 왕에게 압력을 가해 1887년 헌법을 받아내게 한다. 흔히 총검 헌법(Bayonet Constitution)이라고 부르는 헌법이었다.
이는 왕권을 크게 제한하고, 외국인 및 부유한 토지 소유자들에게 정치적 영향력을 크게 확대했다.

1891년 칼라카우아가 사망하자 여동생 릴리우오칼라니(Liliʻuokalani)이 여왕으로 즉위한다.
그녀는 왕권을 회복하고 하와이 원주민의 정치적 권리를 강화하려 했는데, 특히 1893년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여 1887년 헌법으로 빼앗긴 왕권을 되찾으려 했다.

그런데 이것이 미국계 사업가들에게는 사실상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특권을 되돌려놓는 시도로 보였다.
여기서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하는데 미국계 사업가들이 안전위원회(Committee of Safety)를 조직한다. 지도자는 샌퍼드 돌(Sanford B. Dole) 등이었다. 파인애플로 유명한 그 돌과 연관됬다.

그리고 1893년 1월 17일, 이 세력은 쿠데타로 여왕을 폐위시키고 임시정부(Provisional Government)를 수립한다. 릴리우오칼라니는 무력 저항 대신 일단 권력을 내려놓았다.
중요한 점은 미국 외교관 존 스티븐스와 미 해병대가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미국 군대가 호놀룰루에 상륙했고, 미국 외교관은 새로운 정부를 인정했다.

쿠데타 세력은 애초부터 미국 합병을 상당히 기대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벤저민 해리슨(Benjamin Harrison)이었고, 그는 합병에 우호적이었다. 해리슨 행정부는 합병조약을 체결해 상원에 제출했다.

그런데 조약이 상원에서 비준되기 전에 대통령이 바뀌어 그로버 클리블랜드(Grover Cleveland)가 취임했다. 클리블랜드는 합병에 반대했고, 하와이 왕정 전복 과정을 조사하도록 제임스 블라운트(James H. Blount)를 파견해했다.
블라운트의 조사 결과 미국 외교관과 군대가 하와이 왕정 전복에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클리블랜드는 여왕을 복위시키려 했지만, 임시정부의 지도자들은 권력 반환을 거부했고 결국 여왕은 복위되지 않았다.

1894년 임시정부는 결국 1894년 하와이 공화국(Republic of Hawaii)을 선포한다. 그리고 이 공화국은 사실상 미국계 플랜테이션 엘리트가 지배하는 정부였다.

1897년 윌리엄 맥킨리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상황이 다시 바뀌는데, 맥킨리는 하와이 합병에 적극적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와이 원주민들이 대규모 반대 운동을 벌였다. 무려 21,269명의 하와이 원주민 및 혼혈 하와이인들이 합병 반대 청원에 서명했는데 당시 해당 인구의 절반 이상에 해당했다.
그래서 조약은 미국 상원에서 필요한 2/3 찬성을 확보하지 못했고 즉, 하와이 합병조약은 의회에서 실패했다.

그런데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이 터지고 판도가 완전히 바뀌는데 미국이 필리핀과 태평양에서 전쟁을 벌이게 되면서 하와이는 태평양을 잇는 중요한 요점지가 되었다. 특히 진주만을 해군기지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 결정적이었다.


여기서 미국은 꽤 특이한 방법을 사용하는데... 합병 세력은 의회 공동결의(Joint Resolution)라는 방법을 사용한다. 즉, 상원 2/3가 아니라 상하원 과반수로 합병을 승인하는 방식이었다. (Newlands Resolution)
1898년 7월 7일 맥킨리가 서명하면서 하와이는 공식적으로 미국의 영토가 되었다.

하와이 국기가 내려가는 것을 지켜보며 슬퍼하는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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