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켄트 지방 로체스터 대성당의 수도원 연대기에 남아있는 흑사병 관련 기록에서 발췌한 내용은 이렇다.
'아아, 이 떼죽음은 남녀 가리지 않고 수많은 사람을 집어삼켜 시체를 무덤으로 옮길 사람을 구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남자들과 여자들은 자식의 시체를 어깨에 짊어지고 교회로 가서 공동묘지에 내던졌다. 이 때문에 악취가 너무 심해져 교회 경내의 묘지 옆을 지날 수 없을 정도였다'
1346년부터 1353년까지 흑사병이 유럽을 휠씁었고, 유럽 인구의 3분의 1에서 절반 이상이 사망했다. 믿을 수 없을만큼 충격적인 일이었으나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이득이 되었다.
인구가 절반으로 줄었다는 사실은 모둔 사람이 재물을 2배로 가지게 되었다는 점을 의미했다. 노동력이 희소해지고 토지가 풍부해진 덕분에, 농민의 협상력이 더 강해졌다. 그리고 농민들은 그 점을 잘 활용했다.
14세기와 15세기에 걸쳐 유럽 곳곳에 봉기와 반란이 일어났다. 와트 타일러가 주도한 잉글랜드의 농민 반란은 지주와 영주로부터 강제로 양보를 이끌어낼 만큼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
여러 권역에서 임금이 2~3배 올랐고, 남녀 간의 보수 격차도 줄었다. 사람들은 키가 더 커졌고, 더 건강해졌다. 기대수명이 늘어났고, 키는 6cm 커졌다.
흑사병은 생존자와 그 후손에게는 축복이었다. 물론 흑사병의 축복은 오직 인명 손실 때문에 비롯된 것은 아니었고, 흑사병에 따른 권력 관계의 변화 때문에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흑사병 이후 경제적 호황을 맞이한 생존자들은 가처분 소득이 늘어났고, 사회적 사다리 위로 올라갈 새로운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 때문에 금, 모피, 비단, 설탕, 향신료 같은 사치품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다. 그러다 모종의 변화가 일어났다. 이 변화의 핵심적인 자극제는 흑사병으로 인한 인구붕괴였다.
그런 사치품은 멀리 떨어진 땅에서 수입해야 하는 품목이었고, 따라서 모험적 식민사업에 대한 수요가 자극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