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인 남학생 전용이었던 용산중학교
간혹 조선인 관료의 자녀들 몇 명도 다닐 순 있었음
안상호의 장남이 이 학교를 다녔다고 함


4남 안부호(=소록도 근무했던 안하영 조부) 또한 일본인 학교에 다님
안부호가 친구들과 찍은 사진에도 일본 이름으로 메모해둠
무슨 멤버라는 거 보니깐 친구들끼리 사모임 같은 거인 듯
집안 사람들 다 창씨개명 해서 일본학교 다니게 했나 봄ㅋㅋ
심지어 일제가 조선어 탄압하고 강제로 전국민 창씨개명 시키던 1930년대 말~1940년대 아니고,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그전(1910년대쯤)부터 이미 가족끼리 일본식 생활 + 일본어만 썼다고 밝힘
안상호가 죽을 당시에 장남은 용산중학교에 재학 중이라고 나와 있음
본인들이 하도 신문 인터뷰에 입을 많이 털어서 증거가 차고 넘침
왜 하필 용산이냐?

일제강점기 시절 용산은 일제의 필요에 의해 개발되어 이주한 일본인들 + 조선인 관료 등 일명 높으신 분(=매국노)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었음
관련 자료도 많은데 이 논문의 초록에서 주요 내용을 발췌해보면
이 글은 해방 이전 용산 지역 일본인 사회의 형성 및 변천의 과정을 군・관・민의 사회라는 규정 위에 공간을 중심으로 검토한 것이다.
(중략)
그럼에도 현재의 원효로 일대를 중심으로 일본인의 불법적인 거주는 시작되었고,
(중략)
러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일본군의 한반도 영구주둔을 획책한 일본정부에 의해 용산일대에서 대규모 토지수용이 이루어졌다. 이곳에는 군사기지를 비롯하여 철도 관련 시설들과 일본인 상가 등이 들어섰는데, 이를 통해 형성된 시가지를 ‘신용산’이라고 부름에 따라 기존의 시가지는 ‘구용산’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구용산과 신용산 모두 일본에 의한 식민지적 공간 재편의 결과라 고 말할 수 있으나,
(중략)
반면 신용산 지역은 조선인의 강제 이주를 동반한 대규모 토지수용을 통해 건설되었던 만큼 거의 완전한 일본인 사회를 형성하였다. 그렇지만 구용산 지역의 잡거가 조선인과 일본인 간의 이웃함을 의미했던 것도 아니고, 신용산 지역의 분거가 일본인 사회 내의 균질성을 보장해 주지도 않았다. 차별과 피차별의 끝없는 연쇄만이 공간의 경계를 넘어 작동하였다.
그래서 용산에서 나고 자란 일본인들도 많았고, 패전 이후 일제가 망하자 일본으로 돌아간 이들도 있었지만 터 잡은 곳에서 그대로 남게 된 경우도 있음
일명 토착왜구. 한국인으로 국적 갈이한 케이스도 왕왕 있음
왜냐?
일본도 도쿄 대공습이나 원자폭탄 투하 등 전쟁 여파로 살기 힘들었고, 조선 출신은 지들끼리 또 차별함ㅋㅋㅋㅋㅋ 그래서 조선에 남기로 한 일본인들도 많았음
조선에서 태어난 일본인 아이들은 이곳이 일본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일제가 패망했으니 갑자기 조선을 떠나야 한대서 어리둥절한 경우도 있었다고 함
이곳에서 살던 조선인들 또한 친일파 청산이 되지 않으니 재산 잘 유지하며 그대로 쭉 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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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용산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