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점선이 시행을 찍고 그어 내리더니 종국에 시 전체를 꺾쇠로 가뒀다. 이어 두차례 인장을 박아두길 “削除”(삭제). 그러곤 위에 “주의”하라 일본어로 깨알처럼 메모를 남겼다.
“一. 삭제된 자리에 공란(空欄)을 두지 말 것. 一. 삭제된 자리에 삭제당했다는 표시를 넣지 말 것.”
말인즉 시를 삭제했으나 출간하더라도 삭제된 태나 증거는 남기지 말라는 것. 일제 총독부의 무도한 검열 자국을 피칠갑처럼 두른 이 시는 1932년 5월 잡지 ‘신생’에 처음 발표된 심훈의 ‘그날이 오면’이다.시인이자 소설가, 영화인 그리고 독립 운동가였던 심훈이 시 ‘그날이 오면’을 포함해 자신이 직접 육필로 쓰고 엮은 첫 시집 원고가 그의 사후 90년 된 해에 다시 조국으로 돌아왔다. ‘심훈시가집: 1919-1932’ 제목의 단행본이 되었을 터, 1932년 당시 일제에 난도된 채 출간이 무산되고, 이후 1970년대 도미한 후손에 의해 보관되어 왔다. 얼추 반세기 만의 귀환이다.
장편 소설 ‘상록수’, ‘직녀성’, ‘영원의 미소’의 친필 원고와 ‘상록수’ 영화 각본 등에 심훈의 부고 전보, 사진 등 개인 자료까지 망라되어 있다.
시 ‘그날이 오면’도 그 가운데 하나다.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과 슬픔으로 광복을 염원한다’하여 ‘신생’에 발표한 ‘斷腸二首’(단장이수)를 오려 ‘심훈시가집’에 붙이고서 시제를 ‘그날이 오면’으로 고친 흔적까지 오롯하다. “그날이 오면은”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라던 시인의 절절한 결기가 시참이 될 것을 일제가 두려워했음은 물론이겠다. 일제의 검열 사유는 “치안방해”다.


항일 시인으로만 그를 규정하긴 어렵다. 중국·일본에서 유학하고 전후로 기자, 작가, 교육운동가, 영화인으로 활약했다. 특히 시, 소설, 배우·각본·감독 등 예술 장르를 넘나들기에 당대 최고의 르네상스형 위인이란 평가가 무색하지 않다. 그 특징을 관통하는 작품이 ‘상록수’다. 1936년 8월28일 초판이 발행된 지 꼬박 90돌을 맞아 친필 원고, 신문 연재 스크랩, 교정쇄, 친필 시나리오, 이쾌대의 형 이여성이 내지를 그린 단행본 등의 형태로 환국했다. 조선 식민지 농촌의 수탈 현실을 그린 ‘상록수’ 역시 심훈이 감독까지 맡아 영화화하고자 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무산되었다. 그리고 그해 9월 서른다섯의 나이로 요절했다.

심훈의 유산이 온전히 간직되어 문학관으로 오기까지 그의 셋째 아들 심재호(1936~2021)와 후손의 기여가 크다. 조부모 집에 방치되다시피 있던 부친의 원고를 처음 보고 그 밖의 자료까지 찾아 나선 이가 재호씨다. 언론인 출신으로 1974년 미국으로 건너간 통일 운동가로도 알려져 있다. 형제와 남북 이산한 가족사와 후대 이민사로 한국 현대사를 가정사로 압축해 온 당사자다.
7년에 걸쳐 미국을 오가며 재호씨 등 후손들에게 자료 기탁을 설득하고 논의해온 서영인 한국문학관 자료구축부장은 “후손들 모두 심훈의 자손이란 걸 너무도 자랑스러워하신다”며 “모든 노력을 다해 고증 처리와 함께 자료를 잘 보관하고 대중들에게 널리 그 의미를 알리겠다고 약속했다”고 이날 밝혔다.
심훈의 손녀 영주씨는 “한동안 (심훈이 ‘상록수’를 쓴 거처) 필경사가 있는 당진에 뒀다가 여러 염려로 미국에 가져와 오동나무함에 보관해 왔다. 아버지(심재호)는 ‘할아버지 작품은 조국의 것’이라고, 그러니 조국에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우리도 항상 그렇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한국문학관 임헌영 관장은 “심훈은 여운형에 버금갈 만큼 국제 정치 질서에도 정통했고, ‘그날이 오면’은 구한말 매천 황현의 ‘절명시’와 쌍벽을 이룬다”며 “이번 광복절은 그의 귀환과 의미를 되새기는 날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국문학관은 내년 4월 정식 개관을 통해 그간 수집해 온 12만점의 한국 문학 자료를 대중에게 공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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