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 미수' 독립운동가는 사형..하영 증조부, '천하의 매국노' 이완용 살린 의사였다
무명의 더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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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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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호는 1916년 11월 대정친목회 결성 당시 평의원으로 참여한 기록이 있다. 이 대정친목회는 친일반민족행위자 민영기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총재가 회장을 맡아 설립한 실업인 단체다. 이완용과 조중응, 송병준, 이윤용 등 당대 친일반민족행위자 상당수가 회원으로 참여했다.
뿐만 아니라 안상호는 이완용을 살린 의사 중 한 명이라는 기록도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국사관논총 제32집 수록 논문에 따르면, 이완용은 1909년 12월 22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독립운동가 이재명 의사에게 단도로 어깨와 복부를 찔리는 피습을 당했다. 하지만 이완용 암살은 미수에 그쳤다. 이완용이 세 번이나 찔리고 살아난 데는 우리나라 최초 흉부외과 수술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의료진 중에 안상호의 이름이 포함된 것. 자료에는 안상호를 비롯해 한성병원의 학전 의사, 안동병원장, 대한병원의 국지 원장과 고계 부원장, 전의 박종환 등이 치료에 참여해 이완용의 목숨을 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 암살 시도로 체포된 이재명 의사는 사형선고를 받고 이듬해 9월 30일 순국하였다.
의사로서 이완용을 치료한 것이 친일 행적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안상호는 이완용을 살린 것과 달리 고종황제 독살 의혹을 받는 인물이기에 씁쓸하기 그지없다.
앞서 지난 2004년 부산외국어대 일본어과 김문길 교수는 고종의 외동딸인 덕혜옹주가 고종 사인에 대해 공식적으로 알려진 뇌일혈이 아니라 '황제 주치의에 의한 독살'이라고 주장한 내용을 기록한 문건을 공개한 바 있다. 이 문건에 따르면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총독부의 사주를 받은 전의 안상호가 만든 비소를 넣은 홍차를 먹고 독살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다만 이 문건에 대해 역사학계에서는 고종이 사망한 1919년에 덕혜옹주의 나이가 7세에 불과해 독살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당시 파다하게 퍼졌던 독살설을 일본인 친구에게 말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했다.
안상호는 1918년 12월 10일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일선동화의 가정'(一鮮同化의 가정), 즉 '일본인처럼 생활하고 동화되는 것이 모범적이다'라는 사례로 기사에 실리기도 했다.
일본인 아내와 결혼해 가정을 꾸린 안상호는 "나도 지금 조선 옷은 한 번도 입지 아니하고 음식도 매운 것은 조금도 못 먹는다", "자녀들이 집에서 일본어만 사용한다. 조선말은 전혀 하지 못한다. 완전한 일본인 가정으로 키우고 있다. 집안에선 전적으로 일본어만 사용하며 조선 사람과는 교류하지 않는다"라고 '일본인화' 된 점을 자랑스럽게 늘어놨다. 내선일체는 일제강점기 친일파들이 매국 행위를 정당화환 핵심 친일 논리이다.
뿐만 아니라 안상호는 이완용을 살린 의사 중 한 명이라는 기록도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국사관논총 제32집 수록 논문에 따르면, 이완용은 1909년 12월 22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독립운동가 이재명 의사에게 단도로 어깨와 복부를 찔리는 피습을 당했다. 하지만 이완용 암살은 미수에 그쳤다. 이완용이 세 번이나 찔리고 살아난 데는 우리나라 최초 흉부외과 수술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의료진 중에 안상호의 이름이 포함된 것. 자료에는 안상호를 비롯해 한성병원의 학전 의사, 안동병원장, 대한병원의 국지 원장과 고계 부원장, 전의 박종환 등이 치료에 참여해 이완용의 목숨을 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 암살 시도로 체포된 이재명 의사는 사형선고를 받고 이듬해 9월 30일 순국하였다.
의사로서 이완용을 치료한 것이 친일 행적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안상호는 이완용을 살린 것과 달리 고종황제 독살 의혹을 받는 인물이기에 씁쓸하기 그지없다.
앞서 지난 2004년 부산외국어대 일본어과 김문길 교수는 고종의 외동딸인 덕혜옹주가 고종 사인에 대해 공식적으로 알려진 뇌일혈이 아니라 '황제 주치의에 의한 독살'이라고 주장한 내용을 기록한 문건을 공개한 바 있다. 이 문건에 따르면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총독부의 사주를 받은 전의 안상호가 만든 비소를 넣은 홍차를 먹고 독살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다만 이 문건에 대해 역사학계에서는 고종이 사망한 1919년에 덕혜옹주의 나이가 7세에 불과해 독살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당시 파다하게 퍼졌던 독살설을 일본인 친구에게 말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했다.
안상호는 1918년 12월 10일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일선동화의 가정'(一鮮同化의 가정), 즉 '일본인처럼 생활하고 동화되는 것이 모범적이다'라는 사례로 기사에 실리기도 했다.
일본인 아내와 결혼해 가정을 꾸린 안상호는 "나도 지금 조선 옷은 한 번도 입지 아니하고 음식도 매운 것은 조금도 못 먹는다", "자녀들이 집에서 일본어만 사용한다. 조선말은 전혀 하지 못한다. 완전한 일본인 가정으로 키우고 있다. 집안에선 전적으로 일본어만 사용하며 조선 사람과는 교류하지 않는다"라고 '일본인화' 된 점을 자랑스럽게 늘어놨다. 내선일체는 일제강점기 친일파들이 매국 행위를 정당화환 핵심 친일 논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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