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매거진=윤나애 작가] 올해 초 곤충박람회에 다녀온 아들이 아프리카 달팽이 두 마리를 데려왔다. 이 거대한 달팽이는 비 오는 날 풀밭에서 볼 수 있는 우리나라의 그것과 많이 달랐다. 그 크기만으로도 함부로 방생했다간 귀여운 우리나라 생태계를 박살 내버릴 게 확실해 보였다. 우리집에 처음 왔을 때도 컸지만 그땐 청소년 시절에 불과했던 것인지 시간이 갈수록 더 커져서 어느덧 얼굴까지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커졌다. 최근에 아이가 애니메이션 속 달팽이요리를 보고 놀란 얼굴로 물었다. “엄마, 달팽이를 먹는 나라도 있어?”, “응, 있어. 에스카르고라는 고급 음식이 있단다”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었지만 “아 불쌍해”라는 아이의 한숨과 같은 말에 그만 두었다.
사실 에스카르고는 요리 이름이 아니라 프랑스어로 그냥 ‘달팽이’다. 프랑스에서는 기어가는 생명과 접시 위 음식 사이에 이름의 거리가 없는 것이다. 반면 우리말은 ‘소’와 ‘소고기’처럼 존재와 음식 사이에 한 겹의 언어를 끼워 넣는다. 이름이 달라지는 순간 그 존재는 좀 더 쉽게 먹을 수 있는 대상이 된다. 최근 알게 된 ‘물살이’ 운동도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물고기’라는 말엔 이미 ‘고기’가 들어있어 살아있는 순간에도 언어 안에서 먹거리로 정의된다. 그래서 몇몇 활동가들은 물속에서 살아가는 존재, ‘물살이’라 부르자 제안한다. 이름을 바꾼다고 세상이 갑자기 달라지진 않겠지만 그 존재를 마주하는 최소한의 태도는 달라질 수 있다.
이름 뒤 가려진 현실은 크다. 전 세계 식용 사육 동물은 매년 수백억 마리에 이르고 사료작물 밭을 위해 숲이 베어지며 가축의 소화 과정에서 나오는 메탄은 강력한 온실가스가 된다. 양식업과 남획으로 어족자원은 줄고 그물에 걸리는 다른 생물 또한 피해를 받고 있다. 이 거대한 순환은 식탁 위에서 단 하나의 이름으로 요약된다. ‘고기’. 그 두 글자 뒤에 얼마나 많은 자원과 생명이 소모되는지 우리는 좀처럼 떠올리지 않는다.
프랑스 화가 장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Jean-Baptiste-Siméon Chardin, 1699-1779)의 ‘가오리(La raie,1728)’ 앞에서는 우리가 먹는 것이 본래 무엇이었는지를 외면하기 어렵다. 어두운 화면 한가운데 커다란 가오리 한 마리가 갈고리에 걸려 있다. 배가 갈라져 붉은 살이 드러났고 납작한 몸 아래의 입과 구멍은 마치 사람의 얼굴처럼 보인다. 아래에는 굴과 생선, 칼과 주방 기물이 놓여 있지만 시선은 자꾸만 가오리에게 머문다. 식재료를 그린 정물화인데도 평범한 음식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샤르댕은 일부러 미화하지 않았다. 가오리는 아직 몸의 형태를 간직한 채 죽음과 식사의 경계에 서 있다. 그림의 제목도 ‘해산물’이나 ‘식재료’가 아니라 단순히 ‘가오리(The Ray)’다. 무엇으로 소비되는지가 아니라 원래 무엇이었는지를 먼저 말해준다.
우리는 반대로 이름부터 바꾼다. 물속을 헤엄치던 생명은 잡히는 순간 생선이 되고 포장되면 메뉴가 된다. ‘고기’라는 익숙한 말은 수많은 생명을 하나의 식재료로 묶어 버린다. 덕분에 우리는 그것이 어디에서 살았고 어떤 과정을 거쳐 식탁까지 왔는지 쉽게 잊는다.
부르는 이름 하나 ‘물고기’에서 ‘물살이’로 바꾼다고 환경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고기’ 대신 ‘살아가는 존재’를 떠올리는 순간에 우리는 한 번쯤 그 생명을 생각하게 된다. 필요한 만큼만 먹고 함부로 버리지 않는 태도 역시 그 생각에서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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