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qoo

개별 어휘 하나를 근거로, 집단 사고체계를 내면화하고 있다 단정한다면 논리적 비약이다

무명의 더쿠 | 14:33 | 조회 수 619


SbkFuF






"지못미". 21세기 초반 널리 쓰인 말이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의 준말인 이 표현은 미선이 효순이 사건,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세월호 침몰 사고 등 대중이 갑작스러운 죽음을 애도할 때마다 등장했다. 지금은 거의 소멸했지만, 한때는 쓰이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런데 이 말의 기원이 그룹 H.O.T의 팬픽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에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팬픽이 멤버들의 실명을 그대로 사용하는 알페스(RPS, Real Person Slash)의 일종이라는 사실은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당시 '지못미'를 사용한 모든 사람을 H.O.T를 대상으로 한 RPS의 향유자로, 나아가 RPS 애호가 집단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 그런 주장은 성립하기 어렵다. 언중 다수가 유행어를 채택할 때, 그 기원에 대한 지식이나 동의는 전제 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도 제법 쓰이는 "흑역사" 역시 비슷한 경우다. 누군가 지우고 싶어하는, 없었던 일로 하고 싶은 과거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이 단어는 일본 애니메이션 '턴에이 건담'에서 비롯됐다. 작품 안에서 흑역사는 인류가 전쟁을 반복하며 스스로 문명을 붕괴시킨 고대의 암흑기를 뜻한다. 이 사실을 근거로 "흑역사"를 쓰는 사람을 건담 팬, 혹은 일본 하위문화 애호가로 단정할 수 있는가. 앞선 사례와 마찬가지로, 그 근거는 충분하지 않다. 언어 사용의 실제는 기원에 대한 인지 여부와 무관하게 작동한다. 


 그렇다면 이제 두 단어의 기원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향후 이 말들의 사용을 제약해야 할 근거가 되는가. 과거에 '지못미'를 쓴 이력을 특정 연예인에 대한 성적 대상화 가담의 증거로 소급 해석해야 하는가. "흑역사"의 사용이 일본 대중문화의 국내 위상을 강화하고 문화적 종속을 심화시켰다고 자책할 근거가 되는가. 

이 두 추론은 같은 오류를 범한다. 표현의 현재적 의미를 그 표현의 기원으로 소급해 규정하는 오류, 즉 발생적 오류(genetic fallacy)다. 화자가 발화 시점에 담아낸 의미와, 그 표현이 최초로 발생한 맥락에서 가졌던 의미는 전혀 다른 층위에 있다. 


 이는 일종의 문화적 전유(cultural appropriation)다. 더 나아가 의미론적 재전유(semantic re-appropriation)라고 말할 수도 있다. "지못미"와 "흑역사"는 모두 특정 하위문화 집단 내에서 발생해 이후 일반 언중에게로 확산된 사례다. 기표[signifiant]는 그대로 유지됐지만 기의[signifié]는 재구성됐다. 기표와 기의의 결합은 자의적이며, 그 결합은 언중의 관습적 합의에 의해서만 유지된다. 따라서 언중의 사용 관습이 바뀌면 기의 역시 이동한다. 확산과 관습화 과정에서 원래의 맥락적 의미는 탈색된다. 앞선 두 단어의 경우, 원래의 의미는 실질적으로 소멸에 가까운 상태다. 


 특정 표현을 만들어낸 집단의 사고방식이나 문화적 태도에 강한 거부감을 가질 수 있다. 나 역시 그렇다. 

그러나 개별 어휘나 표현 하나를 근거로, 그것을 사용하는 화자가 해당 표현이 발생한 집단의 사고 체계를 내면화하고 있다고 단정한다면, 그건 심한 논리적 비약이다. 

더욱이 그 표현이 이미 하위문화의 경계를 넘어 광범위한 언중에게 전유된 상태라면, 이 비약은 논리의 양자 도약이라 봐야할 것이다. (물론 현재의 이 상태 자체를 개탄스럽게 생각할 수는 있다.)

즉, 해당 표현을, 해당 표현이 발생한 집단의 사고 체계의 맥락과 무관하게 사용한 경우를 관측한다면, 이를 그 사고방식에 대한 동의나 내면화의 증거로 삼아선 안 된다. 오히려 해당 표현의 하위문화적 재전유가 이미 완료됐다고 봐야 한다.




[주의] 이 글을 신고합니다.

  • 댓글 4
목록
0
댓글 더 보기
새 댓글 확인하기
  • 🩷더쿠x노에트🩷 #헬시광 치트키 '베어 멜트 치크' 체험단 30인 모집 242
  • [공지] 언금 공지 해제
  • 📢📢【매우중요】 비밀번호 변경 권장 (현재 팝업 알림중)
  • 공지가 길다면 한번씩 눌러서 읽어주시면 됩니다.
  • ◤더쿠 이용 규칙◢ [스퀘어 정치글은 정치 카테고리에]
  • [스퀘어게시판 정치 카테고리 추가 및 정치 제외 기능 추가]
  • 더쿠 모바일에서 유튜브 링크 올릴때 주의할 점 790
  • 나는 더쿠에서 움짤을 한 번이라도 올려본 적이 있다 🙋‍♀️ 276
  • 더쿠에 쉽게 동영상을 올려보자 ! 3639
  • 슬기로운 더쿠생활 : 더쿠 이용팁 4023
  • ◤스퀘어 공지◢ [9. 스퀘어 저격판 사용 금지(무통보 차단임)] 1236
  • 모든 공지 확인하기()
    • 며칠 전 회사에 우리집 빵을 많이 가져온 날이 있었음
    • 15:48
    • 조회 144
    • 유머
    • 주식은 못 하면서 리센느 원이는 알아본 진수.twt
    • 15:45
    • 조회 756
    • 유머
    8
    • "내수는 포화"… 치킨 빅3, 글로벌 영토 확장 '사활'
    • 15:43
    • 조회 178
    • 기사/뉴스
    • 오모테산도 더현대 오픈 행사 참여한 아이돌 모음
    • 15:43
    • 조회 675
    • 이슈
    3
    • 모든 걸 삼켜버릴 블랙냥바🐾🐾🐾
    • 15:42
    • 조회 291
    • 유머
    3
    • 한국인만 권력있게 손풍기 들고 있는 거 웃기다
    • 15:42
    • 조회 852
    • 이슈
    6
    • 내가 지금 내 피부에 맞는 화장품 쓰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신박한 사이트 (제품 추천+네이버 최저가도 알려줌!!)
    • 15:38
    • 조회 1050
    • 팁/유용/추천
    5
    • 실시간 전국 기온,습도
    • 15:38
    • 조회 2586
    • 이슈
    38
    • 무료 단콘 연다는 남돌 남다른 전적
    • 15:37
    • 조회 1103
    • 이슈
    6
    • AI 시대 초과이윤 어떻게 나눌까…정부, 14일 토론회 연다
    • 15:37
    • 조회 439
    • 기사/뉴스
    37
    • 모태솔로 시즌2] 연애남매 정섭이랑 느낌비슷하다는 진우.jpg
    • 15:37
    • 조회 676
    • 이슈
    3
    • 테크놀로지아 원본 영상
    • 15:36
    • 조회 253
    • 이슈
    3
    • 현대백화점, 도쿄에 첫 플래그십 '더현대' 오픈…한국 백화점 최초
    • 15:35
    • 조회 509
    • 기사/뉴스
    3
    • 집안을 둘러봐도 보이지않는 고양이
    • 15:35
    • 조회 1065
    • 유머
    7
    • 6년전 어제 발매된, 솔지 "오늘따라 비가 와서 그런가 봐"
    • 15:35
    • 조회 40
    • 이슈
    • 신인 남돌이 라라의 스타일기 책을 사서(?) 보는 이유.jpg
    • 15:34
    • 조회 631
    • 이슈
    1
    • MLB 계정에 수상하리만치 자주 등장하는 kpop 아이돌
    • 15:34
    • 조회 683
    • 이슈
    1
    • 아이브 안유진 ‘시세 차익 18억’ 대박…국평 호가 40억 ‘디에이치 방배’ 당첨
    • 15:34
    • 조회 2286
    • 기사/뉴스
    24
    • 수지·켄달 제너·케데헌까지…아누아, 커지는 '광고비 부담' 시험대
    • 15:33
    • 조회 777
    • 기사/뉴스
    4
    • [속보] 대법, 김건희 '주가조작·통일교 금품 수수' 16일 선고
    • 15:28
    • 조회 135
    • 기사/뉴스
    1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