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qoo

개별 어휘 하나를 근거로, 집단 사고체계를 내면화하고 있다 단정한다면 논리적 비약이다

무명의 더쿠 | 07-10 | 조회 수 853


SbkFuF






"지못미". 21세기 초반 널리 쓰인 말이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의 준말인 이 표현은 미선이 효순이 사건,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세월호 침몰 사고 등 대중이 갑작스러운 죽음을 애도할 때마다 등장했다. 지금은 거의 소멸했지만, 한때는 쓰이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런데 이 말의 기원이 그룹 H.O.T의 팬픽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에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팬픽이 멤버들의 실명을 그대로 사용하는 알페스(RPS, Real Person Slash)의 일종이라는 사실은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당시 '지못미'를 사용한 모든 사람을 H.O.T를 대상으로 한 RPS의 향유자로, 나아가 RPS 애호가 집단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 그런 주장은 성립하기 어렵다. 언중 다수가 유행어를 채택할 때, 그 기원에 대한 지식이나 동의는 전제 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도 제법 쓰이는 "흑역사" 역시 비슷한 경우다. 누군가 지우고 싶어하는, 없었던 일로 하고 싶은 과거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이 단어는 일본 애니메이션 '턴에이 건담'에서 비롯됐다. 작품 안에서 흑역사는 인류가 전쟁을 반복하며 스스로 문명을 붕괴시킨 고대의 암흑기를 뜻한다. 이 사실을 근거로 "흑역사"를 쓰는 사람을 건담 팬, 혹은 일본 하위문화 애호가로 단정할 수 있는가. 앞선 사례와 마찬가지로, 그 근거는 충분하지 않다. 언어 사용의 실제는 기원에 대한 인지 여부와 무관하게 작동한다. 


 그렇다면 이제 두 단어의 기원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향후 이 말들의 사용을 제약해야 할 근거가 되는가. 과거에 '지못미'를 쓴 이력을 특정 연예인에 대한 성적 대상화 가담의 증거로 소급 해석해야 하는가. "흑역사"의 사용이 일본 대중문화의 국내 위상을 강화하고 문화적 종속을 심화시켰다고 자책할 근거가 되는가. 

이 두 추론은 같은 오류를 범한다. 표현의 현재적 의미를 그 표현의 기원으로 소급해 규정하는 오류, 즉 발생적 오류(genetic fallacy)다. 화자가 발화 시점에 담아낸 의미와, 그 표현이 최초로 발생한 맥락에서 가졌던 의미는 전혀 다른 층위에 있다. 


 이는 일종의 문화적 전유(cultural appropriation)다. 더 나아가 의미론적 재전유(semantic re-appropriation)라고 말할 수도 있다. "지못미"와 "흑역사"는 모두 특정 하위문화 집단 내에서 발생해 이후 일반 언중에게로 확산된 사례다. 기표[signifiant]는 그대로 유지됐지만 기의[signifié]는 재구성됐다. 기표와 기의의 결합은 자의적이며, 그 결합은 언중의 관습적 합의에 의해서만 유지된다. 따라서 언중의 사용 관습이 바뀌면 기의 역시 이동한다. 확산과 관습화 과정에서 원래의 맥락적 의미는 탈색된다. 앞선 두 단어의 경우, 원래의 의미는 실질적으로 소멸에 가까운 상태다. 


 특정 표현을 만들어낸 집단의 사고방식이나 문화적 태도에 강한 거부감을 가질 수 있다. 나 역시 그렇다. 

그러나 개별 어휘나 표현 하나를 근거로, 그것을 사용하는 화자가 해당 표현이 발생한 집단의 사고 체계를 내면화하고 있다고 단정한다면, 그건 심한 논리적 비약이다. 

더욱이 그 표현이 이미 하위문화의 경계를 넘어 광범위한 언중에게 전유된 상태라면, 이 비약은 논리의 양자 도약이라 봐야할 것이다. (물론 현재의 이 상태 자체를 개탄스럽게 생각할 수는 있다.)

즉, 해당 표현을, 해당 표현이 발생한 집단의 사고 체계의 맥락과 무관하게 사용한 경우를 관측한다면, 이를 그 사고방식에 대한 동의나 내면화의 증거로 삼아선 안 된다. 오히려 해당 표현의 하위문화적 재전유가 이미 완료됐다고 봐야 한다.




[주의] 이 글을 신고합니다.

  • 댓글 4
목록
0
댓글 더 보기
새 댓글 확인하기
  • 올여름 시원하게 OK? <오케이 마담2> 최초 극캉스 시사회 초대 이벤트 85
  • [🚨필독🚨] 로그인 보안 강화📢시크릿모드 사용자들 필독 (사용안함 옵션 추가)📢
  • 📢📢【매우중요】 비밀번호 변경 권장 (현재 팝업 알림중)
  • 공지가 길다면 한번씩 눌러서 읽어주시면 됩니다.
  • ◤더쿠 이용 규칙◢ [스퀘어 정치글은 정치 카테고리에]
  • [스퀘어게시판 정치 카테고리 추가 및 정치 제외 기능 추가]
  • 더쿠 모바일에서 유튜브 링크 올릴때 주의할 점 790
  • 나는 더쿠에서 움짤을 한 번이라도 올려본 적이 있다 🙋‍♀️ 276
  • 더쿠에 쉽게 동영상을 올려보자 ! 3639
  • 슬기로운 더쿠생활 : 더쿠 이용팁 4023
  • ◤스퀘어 공지◢ [9. 스퀘어 저격판 사용 금지(무통보 차단임)] 1236
  • 모든 공지 확인하기()
    • 도미노 피자 리센느 개인 컷 버전 - 원이 추가
    • 17:29
    • 조회 39
    • 이슈
    • 이런거보면 성공은 인내하는 사람이 하는거 같다
    • 17:28
    • 조회 239
    • 이슈
    1
    • 어떤 여시의 옛날에 고스로리 입고 장례식장 간 이야기
    • 17:28
    • 조회 142
    • 유머
    2
    • 오늘 출시된 GS25 연준 X 요아정 콜라보 [사워레몬요거트] 아이스크림...jpg
    • 17:27
    • 조회 272
    • 이슈
    3
    • 독일철도 또 지연됨. 사유:
    • 17:27
    • 조회 677
    • 이슈
    7
    • 도파민 싹 도는 모솔연애2 여출 메기의 파격 행보 (데이터주의)
    • 17:25
    • 조회 632
    • 이슈
    2
    • 이번에 새로 출시한 짐빔 신제품 모델 된 남돌
    • 17:25
    • 조회 433
    • 이슈
    1
    • 허남준이 소개하는 <고래별>송해수의 관전포인트
    • 17:24
    • 조회 433
    • 이슈
    6
    • 어디 운동을 제일 신경 쓰세요? 👨🏻‍🦰결론적으로는 하체를 많이 하지 요양원 안 끌려가려고 못 걸으면 바로 요양원이야
    • 17:23
    • 조회 533
    • 유머
    11
    • 스테파 강경호 비주얼 근황 (연프 나옴)
    • 17:20
    • 조회 834
    • 이슈
    1
    • 어제 타이밍 좋게 리센느 댄스 커버 영상 올린 보이그룹
    • 17:19
    • 조회 598
    • 이슈
    3
    • 핫게간 엑셀방송이뭐냐면 (리액션 예시 숭함 주의)
    • 17:18
    • 조회 5259
    • 이슈
    66
    • 레버리지 etf 상품 최초 개발자 : 한국인
    • 17:18
    • 조회 2220
    • 이슈
    19
    • 컨셉 진짜 잘 뽑은 거 같은 남돌
    • 17:17
    • 조회 436
    • 이슈
    • 무속인급으로 둘째 성별 확신하는 연예인.jpg
    • 17:17
    • 조회 2734
    • 이슈
    10
    • 아일릿 원희가 리뷰하는 겁나 신 연준 아이스크림
    • 17:15
    • 조회 789
    • 이슈
    9
    • 대놓고 이 프로그램이랑 안맞는것 같다는 리센느ㅋㅋㅋㅋㅋ (with 광희)
    • 17:15
    • 조회 904
    • 이슈
    4
    • 내일 전국 날씨.jpg
    • 17:15
    • 조회 1704
    • 이슈
    6
    • 선미 신곡 'Forever July' 멜론 일간 순위.jpg
    • 17:15
    • 조회 384
    • 정보
    6
    • [속보] "재결합 거절해서"…아들 앞에서 아내 살해 50대, 징역 18년
    • 17:14
    • 조회 1623
    • 기사/뉴스
    40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