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에 따라 그 성질이 천차만별이다. 원유의 등급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바로 ‘API 비중’과 ‘황 함유량’이다.
API 비중은 미국석유협회(API)가 제정한 비중 측정 단위로, 가벼울수록 수치가 높고 무거울수록 수치가 낮다. 일반적으로 API 비중이 33도 이상이면 ‘경질유(Light Crude Oil)’, 30도 이하면 ‘중질유(Heavy Crude Oil)’로 분류한다.
그렇다면 경질유와 중질유, 둘 중 어느 쪽이 더 비쌀까? 정답은 경질유다. 맑고 가벼우며 유동성이 좋은 경질유는 황 함량이 적어 정제 과정이 비교적 단순하고, 휘발유나 나프타, 항공유 등 값비싼 석유 제품을 많이 얻을 수 있어 시장에서 높은 몸값을 자랑한다.
반면 중질유는 검고 무거우며 끈적거린다. 황이나 중금속 불순물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 정제하기 까다롭고, 아스팔트나 벙커C유 같은 저부가가치 제품이 주로 나와 가격이 저렴하다. 원유 시장에서는 가볍고 맑은 것이 최고의 가치를 지니는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등장한다. 한국의 정유사들은 이 값싸고 다루기 까다로운 중질유를 열렬히 선호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고도화 설비’(중질유 분해시설)에 있다. 과거에는 중질유를 정제하면 찌꺼기 기름인 벙커C유(중유)가 대량으로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한국 정유사들은 막대한 자본을 투자해 이 찌꺼기 기름을 다시 분해하여 휘발유나 경유 같은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탈바꿈시키는 마법의 연금술, 즉 고도화 설비를 구축했다.
이 설비 덕분에 값싼 중질유를 수입해 비싼 경질유 못지않은 고급 석유 제품을 뽑아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원료비는 낮추고 제품 가치는 높이는, 이른바 ‘정제 마진’의 극대화를 이룬 셈이다.
우리나라가 수입하는 원유의 약 70%가 중동에 쏠려 있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중동 원유가 주로 중질유이고, 우리 정유 설비는 그 중질유를 처리하는 데 최적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수입된 원유는 어떤 과정을 거쳐 우리 실생활에 들어오는 것일까? 그 핵심은 바로 ‘분별 증류’에 있다.
원유를 약 350도 까지 가열하여 거대한 증류탑으로 보내면, 끓는점의 차이에 따라 마법 같은 분리 작업이 시작된다.
마치 목욕탕에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가는 것처럼, 기름 속 성분들도 자기만의 끓는점에 맞춰 지정된 층에 차례차례 도달하는 것이다.
가장 끓는점이 낮고 가벼운 LPG(액화석유가스)는 탑의 맨 꼭대기에서 기체 상태로 빠져나온다. 그 아래로 휘발유와 나프타(75∼150도), 항공유와 등유(150∼250도), 경유(250∼350도)가 차례로 층을 이루며 분리된다.
가장 무겁고 끓는점이 높은 아스팔트와 찌꺼기 기름은 탑의 맨 아래에 남게 된다. 이 증류 과정에서 얻어지는 ‘나프타’는 전체 원유의 약 18%를 차지하며, ‘화학 산업의 쌀’이라 불릴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나프타를 900도 이상의 고온에서 분해하면 에틸렌, 프로필렌, 뷰타다이엔 같은 기초 화학 원료가 쏟아져 나온다. 이 원료들을 마치 레고 블록처럼 이어 붙이면 폴리에틸렌, 폴리프로필렌 같은 합성수지(플라스틱)가 탄생한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비닐봉지, 플라스틱 용기, 합성 섬유, 합성고무까지, 이 모든 것이 나프타에서 비롯된다. 최근 원유 수급 불안으로 나프타 가격이 오르자, 플라스틱 용기 확보에 비상이 걸린 것도 이 때문이다.
원유 시장에서는 가벼운 것이 오히려 더 비싸고, 더 귀한 대접을 받는 게 현실이다.
https://naver.me/GSQQABo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