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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18세기 프랑스를 한바탕 거센 폭풍처럼 휩쓸고 지나갔던 영국 따라하고 덕질하기 열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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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16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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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글로마니(Anglomanie)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영국(Anglo)에 미치다(Manie)'.

18세기 중후반쯤에 한번 프랑스를 휩쓸고 지나갔던 
거대한 영국 덕질 열풍이라고 보면 됨. 


우리 프랑스가 당연히 유럽의 중심이라고 온갖 자부심 프라이드 가지고 살던 
프랑스인들이 갑자기 영국 스타일에 푹 빠져서 
영국을 미친듯이 배우고 흉내내기 시작함.

 

 

 

당시 유럽의 유행을 선도하던 중심국가는 단연 프랑스였음. 
베르사유 궁전의 화려함, 우아한 귀족문화, 절대왕정의 위엄, 상류층 공용어로서 프랑스어가 유럽을 지배했음. 

 


그런 자긍심을 가지고 있던 프랑스에 뜬금 영국 배우기 열풍이 분 건,
당시 프랑스의 대표 지식인 볼테르가 영국을 다녀온 뒤 책을 써내며 본격적으로 촉발되었음.


"야, 영국 가보니까 거긴 자유가 있어! 뉴턴 봐라, 왕이 아니라 과학자가 대우받는다! 상인들도 당당해! 우린 뭐냐?"


그는 영국으로 망명을 갔다 충격을 받고 돌아와 
『Lettres philosophiques』 철학 서신(영국인에 관한 편지)라는 책을 내는데
겉으로는 영국 칭찬이지만, 속뜻은 프랑스에 대한 적나라한 디스였음.

 

 


"영국은 상인을 우대하니까 나라가 부자잖아. 우린 상인을 천한 것 취급하니 영국보다 늘 가난하지."

 

 

"영국은 과학자인 뉴턴을 신처럼 모시는데,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만 붙잡고 있네."

 

 

 

이 책은 프랑스에서 즉시 금서가 되고 불태워졌지만,

사람들은 몰래 돌려보며 "와... 영국놈들이 이 정도였다고?"하며 충격과 각성에 빠지게 됨. 

 


프랑스식 귀족문화니, 화려한 패션이니, 예쁜 정원 같은것에 자긍심을 느끼면서도 
영국쪽이 법과 사회 시스템의 합리성이나 근대성에서 앞서있다는 점은 
프랑스인들도 솔직히 다들 느끼고 있던 바였음. 

 

 

하지만 볼테르의 이 책이 신드롬을 일으키며

프랑스인들은 그 격차가 생각보다 훨씬 아득한 수준이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됨. 

 

 

 

18세기 중반 프랑스를 강타했던 '영국병(Anglomanie, 영국 열풍)'의 시작이었음.

 

1757년 『Préservatif contre l’anglomanie』(‘앵글로마니 예방주사’ 같은 뉘앙스의 풍자 팸플릿)가 나올 정도로

유행을 비꼬는 반작용까지 역풍으로 불 정도였다고 보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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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린 영국한테 맨날 질까?"

 

 

지식인들만 안 게 아니라, 일반 시민들과 군인들도 피부로 느끼고 있었음.

프랑스는 7년 전쟁(1756~1763)에서 영국에게 처참하게 발리고,

인도와 캐나다 같은 알짜배기 식민지를 다 뺏겼던 참이었음.

 

 

"인구도 우리가 3배나 많고, 땅도 더 넓은데 왜 졌지?"

 

 

심각한 의문을 품은 프랑스 사람들은 "영국은 시스템 자체가 훨씬 선진적이고 근대적인데, 우리는 왕이 지 마음대로 하느라 돈이 썩고 비효율적이라서 졌다."고 프랑스의 절대 왕정 시스템 자체가 구시대적이고 낙후되었다는 인식을 널리 공유하기 시작함. 

'영국식으로 안 바꾸면 우린 영원히 2등이다'라는 위기감이 팽배해진 것.

 


실제로 영국인들은 당시 프랑스를 보면서 "문화만 번지르르했지, 정치 사회적으로는 우리보다 훨씬 뒤떨어진 나라"라고 혀를 찼음.

프랑스놈들은 가난뱅이들인데, 그 이유는 절대권력의 왕과 가톨릭교회가 다 뺏어가기 때문이라고 믿었음.

즉, 정치적 후진국으로 본 것.

 

그래서 루소나 볼테르 같은 프랑스 지식인들이 영국으로 망명하자,

영국인들은 "거 봐라. 결국 지식인들은 '자유' 냄새를 맡고 우리한테 오잖아"라며 콧대를 엄청나게 세웠음.

 

 

 

"왕 목을 치고 의회를 만들어도, 천벌을 받기는커녕 저렇게 부자가 되고 잘살 수 있다."

 

 

볼테르를 비롯한 프랑스 사람들이 가장 부러워하던 것이 바로 영국의 '자유'였음.

예를 들어, 프랑스에서 왕은 신이고 법인데,

감히 국왕을 욕하고 조롱하는건 마치 신을 모독하는 것과 같이 상상하기 힘든 분위기였음. 

 


하지만 해협 건너에 있는 바로 이웃나라에서는 허구한 날 국왕을 씹고 뜯고 맛보고 있었음.

신문에서 국왕을 뚱뚱하고 멍청하게 그린 만평이라든가, 대놓고 왕실에 반기를 드는 날카로운 어조의 사설들.

 

 

프랑스였으면 진즉에 사상범으로 바스티유 감옥으로 끌려갔을법한 '무엄한' 이야기들이

런던의 커피하우스에서는 웃음거리로 소비되는 사회 분위기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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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사례가 <사회 계약론>이라는 당시로서는 매우 도발적이고 혁명적인 책을 냈던 루소인데,

프랑스 왕실은 루소의 책을 금서로 지정하고 당장 루소를 체포하라는 수배령을 내림.

루소의 책들은 파리 한복판에서 찢겨지고 불태워졌음. 

 

 


루소는 체포되기 직전에 겨우 프랑스에서 탈출하여 유럽을 떠돌아 다니지만,

그가 환영받을 수 있는 나라는 거의 없었음.

 

 

프랑스도 영국에 비해 구시대적일 뿐 어쨌든 언론이라는게 존재하고,

계몽사상가들이 살롱에서 떠들 수 있는 자유가 있는 나라였기에

타 유럽국가들의 현실은 프랑스보다 더 시궁창이었기 때문.

 

(18세기면 아직도 농노제가 살아있던 나라도 동유럽쪽으로 갈수록 많았음)

 

 

스페인이었다면 살롱같은 게 생기기도 전에 종교재판에 줄줄이 끌려갔을테고,

러시아였다면 계몽사상가들은 아예 혀가 뽑힌채로 시베리아로 유배를 떠나야 했을지도 모름.

 


그런 루소를 쫓아내지 않고 받아준 나라는 결국 영국이었음.

 

이미 영국은 프랑스보다 100년 먼저 앞서서 왕의 목을 쳐버리고, 의회 민주주의의 기틀을 다지며

'아무리 왕이라도 법적 절차없이는 함부로 사람을 구금하거나 체포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사회에 확고하게 이미 뿌리내린 국가였음. 

 


책을 내려면 왕실 검열관에게 사전 검열을 거쳐야하는 프랑스와 달리,

영국은 언론과 출판의 자유도 훨씬 폭넓게 보장되고 있었음.

 

 

이 역시 프랑스보다 100년 정도 앞서서 이미 '출판허가제'가 폐지되며

책 내용에 대해서는 추후에 책임을 지더라도,

프랑스처럼 출판 자체를 국가가 앞서서 검열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든 사회분위기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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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영국 왕 조지 3세는 루소에게 "프랑스 왕이 당신을 괴롭혀? 내가 생활비 줄게, 여기서 편히 지내"라며,

저런 천재가 우리나라로 왔으니 연금을 줘서라도 어떻게든 꽉 잡아야한다고 국왕부터가(+ 흄같은 영국의 지식인들도)

루소를 두 팔 벌려 환영하던 나라였음. 

 


도버해협 너머의 이웃국가 라이벌인 영국은 프랑스인들에게 살아 움직이는 증거였기에,

국왕은 신의 대리인과 같은 존재라는 구시대의 가스라이팅에서 깨어나

"우리도 영국인들처럼 자유로워져야겠다"는 불씨를 키워가기 시작함.
 

 

 

패션과 라이프스타일: Simple is the Best


귀족들이 화려한 프랑스식 패션을 버리고, 투박하고 실용적인 영국산 모직 코트를 입기 시작함.

심지어 승마용 코트인 '레딩고트(영어 Riding Coat의 프랑스식 발음)'가

파리 거리를 점령하는 최고 유행패션에 등극하기도 함.


영국 애들이 모여서 홍차 마시고 신문 읽으며 정치 얘기하는 것도 그렇게 멋있어 보였음.

파리에도 영국식 사교클럽이 생기고, 오후에 티타임을 갖는 유행이 시작됨.

위스키랑 펀치 술도 이때 대유행함.

 

영국 귀족들의 취미인 경마가 프랑스로 수입됨.

'스포츠를 즐기는 영국 신사'라는 이미지를 소비한 거임.

당시 파리의 앵글로마니들은 틈만 나면 "내 말(Horse) 혈통이 영국산인데~" 하면서 자랑하기 바빴음.

 

 

 

정원(Garden): "자를 대지 마라, 자연스럽게"


프랑스식 정원은 베르사유 궁전 생각하면 됨.

나무를 네모세모로 깎고, 길은 일직선이고, 좌우 대칭이 완벽해야 함. 

 

근데 정반대로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추구미로 삼는

영국식 풍경정원이 프랑스에서 대유행하기 시작함.

구불구불한 오솔길, 갑자기 나타나는 폐허(일부러 만든 가짜 폐허), 숲과 호수 등. 

 

멀쩡한 건물을 일부러 망치로 부수고 이끼를 입혀

마치 '수백 년 된 영국의 성벽'처럼 보이게 만들었음.

그리고 그 폐허 앞에 앉아 우울한 표정으로 시를 읽는 것이 당시 최고로 멋진 '덕후'의 모습이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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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식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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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식 정원

 

 

 


파리 시민들이 영국 옷을 입고 영국식 정원을 거니는 건,

사실상 프랑스 국왕에게 "우리는 영국의 의회 민주주의와 자유가 부럽다. 우리나라는 촌스럽고 뒤떨어졌다"라고

온몸으로 무언의 시위를 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음

 

겉멋만 든 게 아님.

프랑스의 데카르트적 합리주의 대신, 영국의 경험주의(실험과 관찰 중시)가 떡상함.

아이작 뉴턴은 프랑스에서도 거의 신적인 존재가 됨.

 

 


프랑스의 대표 지성인 몽테스키외 같은 사상가들은

"결국 우리도 영국식 의회정치와 입헌군주제가 답이다!"라고 외침.

 

 

이런 영국식 가치의 추구 하나하나가 결국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밑거름이 됨.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 왕조를 무너뜨린 씨앗 중 하나가 바로 이 '영국 덕질'이었던 거임.

 

 

이 열풍은 18세기 중반을 거쳐 후반까지도 미친 듯이 타올랐음.

프랑스뿐만 아니라 독일, 러시아까지 퍼져서

18세기 중후반 유럽 전체가 '영국풍' 열병에 푹 빠져살았음. 

 


왕실의 권위에 꽉 막힌 절대왕정의 시대에

더 자유롭고, 더 실용적이고, 더 합리적인 삶을 꿈꾸던 유럽인들의 욕망이

영국이라는 모범 쇼케이스의 대상을 통해 폭발한 거대 문화 현상이었다 할 수 있음.

 

 

 

 

 

근데 왜 사라졌나?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 대혁명이 터지자마자,

"영국 놈들은 사실 자유의 수호자가 아니라 돈만 아는 사기꾼이었다!"라며

'앵글로포비아(Anglophobie, 영국 혐오증)' 분위기로 급변하게 됨.

 


정작 프랑스보다 한 세기 앞서서 왕의 목을 치고 혁명을 일으켰던 역사가 있는 영국인데,

막상 프랑스혁명이 터지자 타 유럽 국가들과 함께 '반 프랑스 연합'에 가담했고,

돈으로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군대를 지원하며 프랑스 혁명군 탄압에 앞장섰기 때문.

 


결정적으로 프랑스의 앵글로마니들에게 완전히 찬물을 끼얹으며 돌아서게 만든 건

영국의 지성계를 대표하던 에드먼드버크의 발언이었음.

 


"지금 프랑스인들이 벌이고 있는 건 혁명도 자유도 아니다. 저들은 그저 폭동을 일으키고 있는 야만인들에 불과하다."

 


프랑스인들은 그동안 선망하고 부러워했던 영국의 자유는 사실 가짜였고,

우리가 지금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자유이며 혁명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기 시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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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혁명 이후 나폴레옹 시대가 되자 
프랑스인들의 민족주의와 함께 영국에 대한 반감이 절정으로 폭발하며 
앵글로마니는 이제 완전히 역사의 뒤안길로 가라앉게 됨. 

 

 

"영국? 저긴 나라가 아니라 가게(Shop)다"

 

 

나폴레옹은 우리 프랑스가 영광과 명예를 위해 싸우고 있다면,

영국은 돈 몇 푼 벌자고 전쟁하는 가게 주인의 나라이자

카르타고 장사치같은 놈들이라는 애국주의, 민족주의적 프레임을 밀었음

 

 

이 프레임이 먹혀들면서, 프랑스인들은 한때나마 '동경의 대상이었던 나라'였던 영국을

이젠 '돈밖에 모르는 비열한 해적 국가'로 바라보기 시작함.

 

나폴레옹군과 영국군의 결전이 단순한 전투 이상의 의미를 넘어,

사실상 두 나라간의 민족적 자존심 대결로 번진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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