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인 로맨스 주인공 유리천장 깬 하예린
‘성난사람들’로 높아진 한국계 배우 존재감
“높아진 국가 브랜드에 배우들 스포트라이트”
[헤럴드경제=손미정 기자] 지난 2019년 제76회 미 골든글로브 시상식. TV드라마부문 여우주연상 수상자로 ‘킬링 이브’의 주인공 이브 폴라스트리를 연기한 한국계 캐나다인 배우 산드라 오의 이름이 호명됐다. 무대에 오른 그는 트로피를 품에 안은 채 객석에 앉은 부모님을 바라봤다. 벅찬 감정을 애써 추스르며 이어간 수상 소감의 마지막은 뜻밖에도 “엄마, 아빠 사랑해요”란 짧지만 진심 어린 한국어였다.
할리우드의 중심 무대에서 울려 퍼진 그 한마디는 관객들의 뜨거운 박수를 이끌어냈다. 주류의 정점에 한국계 배우가 ‘주인공’으로 선 순간. 이는 한국계 배우들이 더 이상 자신을 설명하거나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장면이기도 했다.
그리고 7년이 흘렀다. 이제 한국계 배우들은 단순히 존재감을 드러내는 수준을 넘어, 할리우드 서사의 중심에서 이야기를 이끄는 얼굴이 되고 있다.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시리즈의 주연으로 한국 배우들이 잇따라 발탁되고, 한국계 제작진과 배우가 함께한 작품들이 에미상을 휩쓰는가 하면, 퀴어 로맨스 드라마의 주연을 맡은 한국계 배우가 단숨에 차세대 스타로 떠오른 요즘이다.
오늘날 한국계 배우들은 더 이상 ‘주인공의 친구’에 머물지 않는다. ‘우리도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산드라 오의 조용하지만 선명한 선언은 현실이 됐다.
가장 큰 변화는 로맨스 장르에서 목격된다. 오랫동안 로맨스물에서 주변부에 머물렀던 동양인 배우들, 특히 한국계 배우들이 잇따라 주연으로 발탁되며 세계적 주목을 받고 있는 것. 그 중심에는 HBO Max 시리즈 ‘히티드 라이벌리’에서 셰인 홀랜더를 연기한 허드슨 윌리엄스가 있다.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히티드 라이벌리’는 라이벌 하키 선수들의 오랜 관계를 그린 퀴어 스포츠 로맨스 드라마다. 공개 직후 글로벌 OTT 수요 2위에 오르며 돌풍을 일으켰고, 지난해 가장 화제가 된 로맨스 시리즈 중 하나가 됐다.
한국계 어머니와 영국·네덜란드계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허드슨 윌리엄은 작품 흥행 전까지 연기 활동과 식당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던 무명 배우였다. 하지만 ‘히티드 라이벌리’에서 섬세한 감정 연기로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고, 드라마 공개 두 달 만에 골든글로브 시상자로 나섰다. 최근 열린 멧 갈라(Met Gala)에서는 투우사를 연상시키는 발렌시아가 룩으로 또 한 번 화제의 중심에 섰다.
허드슨은 한 팟캐스트에서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삶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밝히기도 했다.
북미 연예전문지 버라이어티는 최근 ‘2026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차세대 아시아·태평양 인재’ 중 한 명으로 허드슨을 꼽으며 “하키를 소재로 한 드라마가 그를 스타 반열에 올려놓았다”고 평가했다.
넷플릭스 시리즈 ‘브리저튼’ 시즌4에서 ‘소피 백’을 연기한 하예린 역시 할리우드가 주목하는 배우 중 한 명이다. 그는 세계적으로 성공한 프랜차이즈 시리즈의 새 시즌 주인공으로 낙점된 동양인 여성이란 사실만으로도 작품 공개 전부터 화제의 중심에 섰다.
작품 속 하녀이자 백작의 사생아인 ‘소피’는 ‘베네딕트 브리저튼’과 신분을 뛰어넘는 로맨스를 선보이며 하예린이라는 배우를 대중에게 각인시켰다. 그는 연극배우 손숙의 외손녀이기도 하다.
주요 로맨스물 속 한국계 배우들의 등장은 할리우드 안에서 달라지고 있는 동양인, 그리고 한국인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다. 오랫동안 할리우드 로맨스물의 주인공과 동양인 배우 사이에는 넘기 힘든 유리 천장이 존재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한 콘텐츠 업계 관계자는 “2010년대까지만 해도 할리우드에서 한국계나 아시아계 배우들은 주인공을 받쳐주는 역할로 소비되는 경우가 많았다”면서 “그게 아니면 의사나 FBI 요원, IT 전문가이거나 사회성이 부족한 천재, 주인공의 똑똑한 친구처럼 배역의 틀이 정해져 있던 것이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일찍이 할리우드에서 주연급으로 활동해 온 대니얼 대 킴도 지난해 AP와의 인터뷰에서 “오랜 세월 배우 활동을 했지만 아직도 로맨틱한 주연 역할을 맡아본 적은 거의 없다”면서도 “최근 아시아 남성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낀다”고 밝혔다.
하예린 역시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한 번도 스스로를 로맨스 작품의 여자 주인공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며 “보고 자란 사례가 많지 않으면 어느 순간 자신의 꿈도 그만큼 제한돼 있다고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최근 한국계 배우들의 존재감이 두드러진 데는 넷플릭스 시리즈 ‘성난 사람들’의 역할도 컸다. 한국계 미국인인 이성진 감독이 만들고, 스티븐 연과 영 마지노, 조셉 리 등 한국계 배우와 제작진이 대거 참여한 작품이다.
드라마는 ‘한국’이라는 정체성을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한편, 지금 시대 사람들이 느끼는 분노와 불안, 공허함을 정교하게 건드리는 각본과 연출로 큰 사랑을 받았다. 작품은 지난 2024년 제75회 프라임타임 에미상에서 8개의 상을 싹쓸이했다.
시즌1에서 한국계 배우 스티븐 연이 ‘대니’를 통해 서사를 이끌었다면, 올해 공개된 시즌2에서는 ‘오스틴’ 역의 한국계 배우 찰스 멜튼이 중심축 역할을 맡았다. 한때 잘나가던 운동선수였던 오스틴은 약혼녀 애슐리와의 흔들리는 관계 속에서 욕망과 사랑 사이를 오가는 입체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멜튼은 국내 언론과의 화상 간담회에서 “나의 한국계 뿌리와 맞닿은 연기를 보여줄 기회를 준 이성진 감독에게 감사하다”며 작품에 참여한 소감을 전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에밀리, 파리에 가다’를 통해 유쾌하고 당당한 매력을 선보인 애슐리 박과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트론: 아레스’의 그레타 리 역시 할리우드가 주목하는 한국계 배우들이다. 특히 그레타 리는 ‘패스트 라이브즈’에서 이민자의 정체성과 사랑, 상실의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내며 한국계 배우가 예술영화의 중심 얼굴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이처럼 최근 두드러지고 있는 한국계 배우들의 활약은 세계 시장에서 커지고 있는 ‘한국’의 위상과도 맞닿아 있다. 사실 산드라 오를 비롯해 대니얼 대 킴, 존 조 등이 이끈 한국계 배우들의 활약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다만 전문가들은 전 세계 대중문화 시장에서 한국의 존재감과 국가 브랜드 가치가 높아졌고, 그것이 글로벌 무대에서 한국계 배우들에게 더욱 강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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